공부/革新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삼성 발전의 숨은 공신…TDK 마쓰지마 대표와의 인연

프로처럼 2011. 11. 15. 11:50

사람이 곧 혁신이다 (19)

1992년에는 회장 비서실로 자리를 옮겼다. 전자 담당이었다. 당시는 금형 공장 자동화를 위해 캐드캠(CAD/CAM) 시스템 도입이 반드시 필요했다. 생산성 향상과 품질 개선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시스템이었다. 미국과 일본 등 기술 강국의 프로그램들을 검토하다가 일본 샤프와 교섭해 시스템을 사들였다. 당시만 해도 이 시스템에서 샤프를 따라오는 기업은 없었다. 

당시 삼성의 일본인 고문 중 샤프와 잘 아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소개로 샤프와 교섭을 시작하게 됐다. 그런데 이 사람의 말이 “소프트웨어만 도입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금형 가공 데이터를 축적해야 시스템이 돌아간다. 내가 보기에 한국은 축적 데이터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삼성전자도 IBM의 소프트웨어를 사다 놓고 못 쓰고 있는 지가 오래였다. 

삼성의 3차원 설계를 완성하다

지난 2001년 일본 도시바 니시무로 다이조 당시 회장의 방문을 받고 있는 이건희 회장의 모습. 이 회장은 일본 내 여러 기업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으며 오늘날 삼성 기술력의 토대를 쌓았다.

마침 샤프에선 “가공 데이터까지 모두 제공하겠다”고 제안해 왔다. 그런 회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샤프로서도 자신들의 시스템을 도입해 공장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모델이 필요했던 것이다. 

시스템 도입이 결정된 후 샤프의 기술자들이 와서 삼성전자의 3차원 설계 시스템을 진단했다. 진단 결과는 한마디로 엉망이었다. 

디자이너가 3차원으로 디자인하면 설계자들이 이를 다 풀어 2차원으로 만든 후 다시 3차원 설계를 하고 부품 개발자들은 또 설계 부문에서 3차원 데이터를 받아 2차원으로 바꾼 후 다시 3차원 작업을 하는 식이었다. 섬과 섬으로 단절돼 있는 시스템, 그게 당시의 삼성전자의 제조 시스템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이런 사정을 전해 듣고 크게 화를 내며 “100m 가서 원점에 왔다가 다시 뛰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질책했다. 

부분 최적화는 완성했지만 디자인·설계·부품 등의 작업에 호환성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이를 보완하려는 노력도 없었다. 그제야 비로소 삼성전자의 시스템이 디자인부터 부품까지 3차원으로 이어지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이 회장은 특히 이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리더가 가장 핵심이 되는 부문에 관심을 가지면 결국 문제점이 풀리게 마련이다.

삼성전기에 있을 때 제일 어려웠던 사업은 ‘오디오 데크’의 메커니즘을 만드는 일이었다. 쉽게 말해 카세트테이프를 돌리는 시스템인데,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실은 무척 정밀한 기계 조립품이다. 프레스 작업으로 만든 부품을 굉장히 정교하게 조립하는데, 불량률이 너무 높았고 작업 자체도 어려웠다. 

금형의 정밀도를 높여야겠다고 결심한 계기 중 하나가 바로 이 오디오 데크였다. 금형 관리, 철판 재질·규격, 프레스물 낙하 충격, 운반 과정 중의 변형 등 불량 요인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싸구려 중국산 때문에 가격 경쟁력도 확보하기 어려웠다. 

일본의 전자 부품사인 TDK의 마쓰지마 대표를 만난 것도 그즈음이다. 마쓰지마 대표는 ‘혁신의 전도사’로 통하는 분이었다. 이분이 전무였을 때 처음 만났는데, 내게 ‘IPS’에 대해 들려줬다. 풀어서 쓰면 아이디얼 프로덕션 시스템(Ideal Production System), 즉 ‘이상 목표 관리제도’다. 

TDK는 오디오·비디오테이프를 만드는 업체로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공장은 규슈의 가고시마라는 시골 마을에 있었다. 당시는 일본도 경쟁이 심화되고 동남아 제품이 쏟아져 나와 가격 경쟁력에서 밀려 적자를 보는 기업들이 많던 시절이었다. 한국도 새한미디어·선경·LG 등 테이프 제조업체가 굉장히 많아 고전하던 때다. 그런데 유독 TDK만 공장을 이전하지 않고도 살아남았다. 그걸 지도한 이가 바로 마쓰지마 대표다. 

그에게 오디오 데크 이야기를 했더니, 규슈 공장에 와보라고 권유했다. 당장 공장을 찾아가 프레스물을 보니 1분에 몇 번 찍는다는 설비 규격이 눈에 띄었다. 한국은 대부분 최종 규격의 80%만 찍어냈다. 풀 캐퍼를 채우지 못한 것이다. 금형이나 작업 환경 등 여러 요소 때문에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였다. 그런데 TDK는 120%를 찍고 있었다. 

“기계를 만든 사람의 최고 이상 설계만 달성하자”는 게 120% 생산의 비결이었다. 마쓰지마 대표의 말에 따르면 이데아(Idea), 즉 이상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개념이다. 최대치를 설정해 놓고 도전하는 것이다. 마쓰지마 대표는 이런 생각 끝에 “금형의 문제를 뿌리 뽑고 소재 문제를 개선하면 100% 가동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그리고 공장의 모든 부분을 설비 규격대로 돌리는 운동을 전개했고 몇 달 만에 이를 달성했다. 

마쓰지마 대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음으로 생각한 것이 “모든 설비 설계자는 반드시 여유를 둔다”는 것이다. 안전계수가 통상 20~30% 주어진다는 데서 착안한 발상이었다. 그는 “우리는 기계를 여유의 끝까지 쓰자”고 주장했다. 

실제로 TDK 공장에 가보니 모든 설비가 기어를 맞추듯 완벽히 돌아가고 있었다. 자연히 불량도 거의 없었다. 합성수지 사출기가 200개가 넘는데 근무하는 사람은 단 두 명에 불과했다. 설비 점검·보존에 한 명, 소재 공급에 한 명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자동화 시스템으로 이뤄져 있었다. 

200대가 넘는 기계를 단 두 사람이 본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당시 삼성전자는 한 사람이 2대 보던 걸 4대로 늘렸다며 한국 최고라고 자랑하던 시절이다. TDK는 공장 가동의 ‘극한’ 상태를 보여주었다. 바로 아이디얼(Ideal)의 상태다. TDK 가고시마 공장은 원가 면에서 유리한 해외 공장을 짓지 않고도 365일 양품을 만들어 내면서 전 세계 그 어느 공장보다 경쟁력을 갖춘 공장이 되었다. 지금도 세계의 음악 마니아들이 TDK를 찾는 이유다. 


‘이건희와 일본 친구들’, LJF

일본인들은 예전부터 부품을 엄청 소중하게 생각했다. 부품 경쟁력이 세트의 경쟁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 회장도 “삼성전자가 잘되려면 일본 부품 회사들과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고 얘기하곤 했다. 실제로 이 회장은 협력 모임을 만들라고 지시했는데, 이것이 ‘이 회장의 일본 친구들’이라는 뜻으로 통상 불렀던 ‘LJF’다. 정식 명칭도, 조직도 아니었지만 일본의 유명한 전자 부품 대표들과 이 회장이 친분을 쌓고 기술 협력을 진행했다. 마쓰지마 대표도 LJF의 멤버였다. 

이 회장은 LJF를 통해 부품의 중요성, 협력사와의 공생 발전 등을 배워 삼성에 뿌리내렸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지적이 “왜 삼성이나 한국 기업은 구매 책임자들이 상무·전무급이냐? 일본은 넘버 2다. 그건 부품의 소중함을 몰라서다”라는 얘기다. 마쓰지마 대표는 이 회장에게 이런 말도 전했다. 

“일본도 초기에는 독일과 미국에서 부품을 수입했습니다. 그때는 세트 업체들이 부품 업체를 홀대했죠. 하지만 1970년대 들어 부품의 소중함을 알게 되면서 부품 업체가 방문하면 세트 사장이 맨발로 뛰어나와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기업도 그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이 회장님이 모범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 덕분에 삼성전자에선 일본 전자 부품 전시회가 여러 번 열리고 세미나도 많이 진행됐다. 마쓰지마 대표는 그야말로 혁신의 전도사였다. 한번은 “삼성전기가 초소형 칩 콘덴서(MLCC) 제조에 문제가 많아 고민”이라며 고민을 토로한 적이 있다. 

마쓰지마 당시 전무는 “구체적인 기술은 영업 비밀이라 이야기해 줄 수 없다”면서 “TDK도 비슷한 고생을 했고 기술자 전원이 몇 달에 걸쳐 원인을 찾아 개선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씩 웃으며 “먼지가 원인이었다”는 말을 흘렸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먼지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환경도 다 뜯어고쳤다. 지금은 삼성의 MLCC 품질이 세계 최고다.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