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革新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관리’의 삼성에서 ‘창의’의 삼성으로

프로처럼 2011. 11. 24. 20:06

사람이 곧 혁신이다 26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신경영’은 사실상 ‘창의’의 삼성을 만들기 위한 변화의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대 이병철 회장은 ‘인재 제일’, ‘사업보국’, ‘합리 추구’라는 3대 경영 이념을 제시하고 이에 따라 공채 제도 도입, 연수원 건립 등의 인재 양성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합리적인 시스템을 제일 먼저 들여온 것이다.

1980년대 들어오면서 새로운 변화의 시대가 열렸다. 컴퓨터·반도체가 발전하면서 지식 기반 사회로 변화해 가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 존중받길 원하고 꿈을 이루길 원하고 창의를 살리고 싶어 하는 욕구가 1980년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신경영은 곧 창의 경영

이 회장은 ‘삼성은 잘 짜인 조직이지만 관료화돼 창의가 숨 쉬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한 명 한 명의 역량이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환경이었다. 1988년에 회장으로 취임하며 제2의 창업 이념을 선포했는데, ‘자율경영’, ‘기술 중시’, ‘인간 존중’의 세 가지다.

“자율을 통해서만이 창의가 살아난다. 관리의 틀 속에선 역량을 극대화해 발휘할 수 없다. 앞으로의 지식 기반 사회는 자율적으로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 바탕이 되는 핵심 역량이 기술이다. 모방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첨단 기술로 혁신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의 바탕에 인간 존중이 들어 있어야 한다.” 요약하면 이랬다.

요즘 와서 보니 융합과 창조가 시대의 화두다. 1980년대만 해도 창조라는 인식조차 없었던 시대다. 리더의 선견지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러주는 사례다. 당시 이면우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에게 자문해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삼성을 ‘관리·전략·창의’의 기준으로 나눴던 기억이 난다. 이 교수는 당시 강연에서 “지금까지는 관리의 삼성으로 고도성장을 이룩했지만 앞으로 21세기 시대는 창조의 시대로 가야 한다. 지금부터 노력해 창의와 전략의 삼성을 만들라”고 조언했다.

관리의 삼성이라는 말은 기업의 조직 문화가 조직원들에게 잘 배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창의는 문제가 다르다. 아무리 창의적인 인재라고 하더라도 관료적 조직에선 살아남을 수 없다. 그룹 내부에서도 창의적인 조직을 만들기 위해 이에 걸맞은 인재들을 모아 조직을 꾸렸다. 아무런 제약이 없는 자유분방한 환경을 만들어 준 후 이들에게 삼성의 창의를 맡겼던 것이다. 1994년 삼성전자 전략기획실로 발령받은 후 조직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직접 가서 보니 창의적인 아이디어라곤 도무지 찾아보기 어려웠다. 새로 2기생을 모아 팀을 운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고민 끝에 다시 이 교수에게 부탁했다. “이렇게 젊고 창의적인 인재들을 모아 환경과 일하는 시스템을 다 바꿔주며 마음껏 하라고 했는데 아무 결과가 없다. 지도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교수도 “맡아서 해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비로소 창의 삼성을 위한 지도가 시작됐다.

당시 삼성은 백색가전 부문이 경쟁사에 비해 특히 약했다. 이 부문에서 창의적 아이디어를 발굴해 주면 좋겠다고 건의했는데 놀랍게도 3개월이 지나니 완전히 새로운 세탁기·냉장고·전자레인지가 나오는 게 아닌가. 불과 석 달 만에 워킹 모델(작동 모델)까지 등장했다. 이 교수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창의적인 조직을 만들기 위해선 시스템과 리더십이 뒷받침돼야만 한다. 마냥 편안한 상태에서 아이디어를 내놓으라고 하면 인간의 뇌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었다. 이 교수는 팀원들에게 “백색가전에서 한 번도 LG에 이겨본 적이 없다. 목표는 3개월이다”는 슬로건을 던졌다.

그러곤 팀원들과 매일 새벽 2~3시까지 함께 연구하고 뒹굴다시피 했다. 이런 리더라면 함께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생기자 팀원들 스스로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프로토타입(시험 제작 원형)을 만드는 일도 삼성의 시스템을 활용하면 6개월도 더 결렸다. 이 교수는 “대한민국 내에서 찾아보면 얼마든지 빠른 방법이 있다”며 새로운 방법론을 찾았다. 당시만 해도 청계천 세운상가만 가면 어떤 부품, 어떤 모양이든 밤을 새워 만들어 주는 소규모 업체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밤낮없이 노력하니 3개월 만에 워킹 모델이 나오기에 이른 것이다.


창의적인 기업만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다. 소니는 본래 독창적인 기술로 세상에 없는 제품을 만들던 회사였는데, 재무관리를 중시한 나머지 오늘날 위기에 몰리게 됐다.


창의적 리더가 창의적 조직을 만든다

창의의 삼성(조직)을 만들기 위해선 그만큼 창의적 리더가 중요했다. 리더를 중심으로 창의적인 조직 문화를 만들고 그것을 끊임없이 서포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했다.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는 거의 도산 직전까지 가는 어려움을 겪다가 최근에 다시 미국 시장 1위를 탈환했다. GM의 전 부회장이자 지금은 고문으로 있는 밥 루츠의 일화가 재미있다. 그는 GM에 있다가 포드와 크라이슬러를 거쳐 2009년에 다시 GM 부회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복귀해서 보니 최고의 제품으로 승부한다는 기존 경영 철학이 재무 성과만 추구하는 경영진의 방침 때문에 흐트러져 있었다고 한다.

품질과 명성을 잃는 순간 도산 직전까지 가게 된 것이다. 밥 루츠는 이를 ‘현장 인력(Car Guys) vs 회계사(Bean Counters)’라고 표현했다. ‘차를 만드는 장인과 콩을 세는 재무관리자’는 뜻이다. 최고의 기술자들이 재무관리자들에게 밀리는 순간 기업의 경쟁력은 무너지고 만다.

밥 루츠는 제일 먼저 디자이너에게 “어떻게 이런 엉터리 같은 디자인을 하느냐”고 질책했다. 그러자 디자인 총괄은 “제품의 원가절감만 고려해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GM의 최고 경영 방침이 재무책임자들에게 밀린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오늘날 소니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도 비슷하다. 소니는 본래 독창적인 기술,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드는 기술력으로 승부하는 기업이었다. 하지만 창조적인 연구·개발(R&D) 활동을 무시하고 재무적인 측면, 서비스 부문에 힘을 기울이는 순간 핵심 역량을 잃어버리게 됐다.

이 회장이 2000년대 들어 다시 강조하는 것도 창조 경영이다. 또 이를 위해 “‘초일류 인재’를 확보하는 것이 삼성의 살 길”이라고 얘기하곤 한다. 얼마 전 경영 일선에 다시 복귀하고 나서도 이를 강조하고 있다고 들었다.

창조적인 조직과 문화를 만드는 것도 힘들지만 그만큼 이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은 창의를 실현하는 리더를 양성하고 그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춰야만 진정한 창의 조직으로 변신할 수 있다.

애플이라는 기업의 부침은 한 사람의 리더가 조직의 성패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애플은 스티브 잡스라는 리더를 떼어 놓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기업이다. 잡스라는 창의적 리더가 있을 때 애플은 반짝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재무 전문가들에 의해 쫓겨나자 비로소 위기가 시작됐다.

이후 잡스가 복귀하자 놀라운 변신을 거듭하며 오늘날 최고의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으로 성장했다. 잡스는 어떤 제품을 내놓을 것인가라는 문제보다 어떻게 하면 조직의 문화를 창의적으로 발전시켜 갈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것이 애플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믿었다.

삼성의 ‘브레인 스토밍’의 핵심은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 대해 비평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남의 아이디어에 편승해 발전시키는 것을 장려하는 것이다. 관리하려고 하는 순간 아이디어를 판단하고 평가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아이디어는 사라지고 만다. 근무 환경이 아무리 창의적으로 바뀌어도 창의적인 조직으로 변하지 않는 이유는 리더의 창의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선 창의적인 환경은 공간 낭비일 뿐이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