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革新

[손욱의 혁신 경영 이야기] 브라운관 사업의 위기와 삼성 SDI의 혁신

프로처럼 2012. 1. 3. 19:17

사람이 곧 혁신이다 31


초창기 브라운관 사업은 역시 TV가 주종을 이뤘다. TV 시장은 성장률은 낮은 편이지만 반대로 매우 안정적인 시장이다. 완성 세트나 부품 업체 모두 묵시적인 균형을 이룬 상태로, 과당경쟁도 없어 이익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구조적으로도 브라운관은 항상 공급 부족 상태였다. 삼성전관(현 삼성SDI) 역시 한 해도 적자를 내지 않으며 삼성그룹 내에서도 최고의 회사로 인정받았다. 

TV는 컨베이어벨트와 조립용 툴만 있으면 조립 공장을 갖출 수 있다. 반면 브라운관은 부품 자체가 굉장히 무겁고 고정밀도를 요구하는 장치산업이다. 아무나 쉽게 투자할 수 있는 산업 분야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항상 수요가 부족했고 웬만한 품질 수준만 확보되면 가격도 부르는 게 값인 상황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모니터 시장은 급속히 팽창하기 시작했다. PC의 등장 덕분이다. PC용 모니터는 TV보다 더 작은 고정세(정밀·세밀) 제품으로 가격도 3배 가까이 비쌌다. 시장도 엄청 빠르게 성장하다 어느 해는 확 고꾸라지는 등 PC 산업의 궤적에 따라 변동이 심했다. 오늘날의 반도체 산업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안정적이었던 TV 시장에 비해 PC용 모니터는 널뛰기 장세로 부를 만큼 변동성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도성장할 것이라는 시장 전망은 브라운관 제조에 너도나도 뛰어들게 만들며 과당경쟁을 유도했다. 모니터용 브라운관 설비 투자 경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가 삼성전관 사장으로 부임한 1995년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그런데 1995년 말이 되니 시장이 얼어붙고, 공급과잉 현상 등 악재가 겹치기 시작했다. 가격도 급락해 거의 절반 수준으로, 어떤 제품은 3분의 1까지 떨어지는 등 엄청난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말았다. 

1995년 삼성전관 사장으로 부임하며 처음 시작한 일은 프로스세스 혁신 등 일련의 혁신 작업이었다. 사진은 삼성SDI가 2004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초슬림 브라운관 `‘빅슬림’`의 생산 라인.


90년대 중반 ‘브라운관’ 시장 악화

삼성전관은 해마다 상여금도 많이 주는 튼튼하고 안정적인 회사였다. 그래서인지 이러한 시장의 격변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위기’라고 말해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필자는 1993년에 삼성전자에서 신경영을 시작한 이후 1994년에는 프로세스를 혁신해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을 도입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와 똑같은 혁신 작업을 삼성전관 사장으로 와서도 추진하기로 마음먹었다. 삼성전관 내부에서도 1995년 하반기부터 팀을 만들어 준비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가서 실제로 보니 그 정도 준비로는 턱도 없었다. “이런 수준으로 가격이 떨어지면 감당할 수 없다. 위기의식을 가지고 생명을 건 돌파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심어줘야 했다. 

모든 조직원들이 위기를 제대로 느끼게 하려면 실질적인 것을 보여줘야 한다. 이를 위해 현재 브라운관·모니터 산업이 취한 현실을 그림과 도표로 그리도록 했다. 그리고 이것을 ‘사면초가’라고 부르며 사업장을 돌기 시작했다. 

당시 위기의 징후를 돌아보면 첫째, 모니터용 브라운관에 너무 많은 투자가 몰려 있었다. 그러나 수요가 줄어들고 경쟁사는 계속 늘어나 공급이 넘쳐날 것이 빤했다. “가격이 계속 떨어질 텐데 그 끝을 모른다. 겨우 몇 %의 이익으론 버티지 못한다”며 위기를 똑바로 인식하게 했다. 

둘째, 그 와중에도 일본의 경쟁사들은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들어 냈다. 우리가 14인치 모니터를 만들면 17·19인치 제품을 만드는 식이다. 정밀도 경쟁에서 더 수준 높은 제품을 만들어 하이엔드 마켓에 내놓았기 때문에 그들의 시장은 경쟁이 없는 블루오션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고정세·대형화 기술로 블루오션에서 이익을 확보하는 것이다. 

또 ‘중화영관’ 같은 대만 기업은 가격 경쟁력이 매우 뛰어났다. 대만은 원래 중소기업들이 강하고 모든 사회 인프라가 저가 구조인 것이 특징이다. 한국에 비해 오버헤드 비용이 절반에 가까울 정도였다. 기술 수준이 비슷하면 가격 경쟁이 안 되고, 일본은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공략하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액정표시장치(LCD) 가격도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LCD는 ‘가격이 너무 비싸 아무나 쓰는 디스플레이가 아니다’는 인상이 강했다. 하지만 원가절감에 들어가면서 시장이 확대될 것이고 언젠가는 브라운과과 LCD가 격전해 시장을 빼앗길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하지만 위기의식은 턱없이 부족했다. 



위기 극복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 사면초가로 표현한 것이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흑자를 내고 안전하다는 인식 때문에 위기의식을 갖기 힘들다. 무작정 “위기다, 어렵다”고 얘기하면 무너지기 십상이다. 직원들에게 절박한 심정으로 몇 가지를 제안했다. 이를 통해서만 생존과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첫째가 ‘PI(Process Innovation)’, 즉 프로세스 혁신이다. 당시 이미 미국은 업무의 95%를 정보 시스템으로 자동화하고 5%만 사람이 직접 했다. 하지만 한국 제일이라던 삼성전자마저도 5%만 자동화였고 나머지를 사람이 했다. 미국과는 정반대였다. 이렇게 해서는 인건비 등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프로세스 혁신이 이뤄지면 적어도 300%의 생산성 향상을 통해 비용을 엄청나게 줄일 수 있었다. 직원들에게는 “생산성을 300% 향상하고 나머지 인원은 새로운 부가가치에 나서자”고 설득했다. 

두 번째는 ‘일본을 잡고 블루오션으로 올라가 보자’는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구소·개발 파트 할 것 없이 똘똘 뭉쳐 하나의 팀이 돼 목숨을 걸고 도전해야 했다. 어차피 대만은 기술을 못 따라온다고 보고 일본 수준만 오르면 된다고 결론 내렸다. 이를 위해 ‘17·19인치 모니터 특공대팀’을 만들었다. 

당시 삼성전관에는 골칫거리가 하나 있었다. 전화기·게임기·시계 등에 쓰이는 소형 디스플레이 사업부로 이를 STN(수동형) LCD라고 불렀다. 브라운관을 대체할 평판 디스플레이를 위해 10년째 사업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돈을 벌기는커녕 해마다 500억 원의 적자를 내는 애물단지였다. 현재 삼성전자에서 생산하는 소형 디스플레이는 AM LCD(능동형)라고 부른다. 원래는 삼성전관에서 STN과 AM을 모두 생산했다. 그런데 AM의 특성이 반도체와 가까운 기술이었기 때문에 사업 조정 차원에서 전자로 이관됐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삼성전관이 고생한 배경이기도 하다. 

또 다른 소형 디스플레이로 형광표시관(VFD)이라는 것이 있다. 자동차나 오디오용으로 많이 쓰이는 초록색 디스플레이다. VFD는 세계적으로도 생산하는 회사가 몇 개 없다. 삼성전관에서는 STN과 VFD를 평판 디스플레이의 주력으로 삼고 키우고 있었지만 모두 자리를 잡지 못해 적자를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1년 내에 두 개를 흑자로 돌리자고 마음먹었다. 앞으로 소형 디스플레이의 시대가 오리란 걸 확신했기 때문이다. 두 사업을 끌어올려 보완하고 식스시그마를 도입해 불량률을 줄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사업 분야가 바로 소형 디스플레이였다. 

일본은 불량률이 몇 %인지 하는 개념으로 품질관리를 했다. 하지만 미국 최고경영자(CEO)는 %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일본은 현장 출신이 많아 불량률 얘기를 하면 바로 인식하지만 미국은 ‘이익에 몇 %의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식으로 ‘돈’으로 돌려 얘기하면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품질 코스트 개념이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30%의 반만 줄이면 15%의 이익이 더 난다는 식이다. 

삼성전관의 품질 코스트는 30%는커녕 40~50% 정도는 개선해야 했다. 우선 PI를 통해 생산성과 품질을 잡아서 올려야 했다. 그런 다음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해 이익을 내고 무엇보다 평판 부문의 적자를 면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삼성전관이 망하더라도 브라운관 기업 중에선 제일 마지막에 망해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