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革新2012. 1. 16. 19:51

사람이 곧 혁신이다 32

 1996년 당시 이미 삼성SDI의 모니터 수출량은 전 세계 최고였다. 삼성 안에서 ISO-9000 인증을 제일 먼저 받은 곳도 삼성SDI였다. 하지만 실제로 가보니 안 지키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정말 제대로 해보자. 사느냐 죽느냐는 룰을 지키는 데 있다”며 설득에 들어갔다. ‘삼진아웃’ 제도도 도입했다. 처음 적발되면 경고, 두 번째는 앞의 것까지 합쳐 두 배의 벌, 세 번째는 ‘집에 보낸다’는 뜻이다. 이를 위반하면 식당 앞 게시판에 공고하기까지 했다. 

수원·부산·천안 등 많은 수의 공장 책임자 중 부산의 한 직원이 ISO를 그대로 지키는 프로그램 만들어 열심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직접 찾아가 보니 생산·품질 등 모두가 안정적이었다. 필자는 이를 과감히 도입해 삼성SDI의 표준 품질 프로그램인 SQM(Samsung Quality Management)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다시 만들기도 했다. 

삼성SDI 혁신의 핵심은 ‘프로세스 혁신을 통해 간접 부문의 생산성을 300% 올리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품질 프로세스를 획기적으로 혁신해 품질 코스트를 30% 안으로 줄이고 매년 500억 원씩 적자가 나던 소형 디스플레이를 1년 안에 흑자로 돌리기로 했다.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 등 모두 4가지 방안을 혁신의 모체로 정했다. 

200명이나 되는 인원을 뽑아 혁신 프로젝트팀을 만들었다. 현장에선 “그렇지 않아도 바빠 죽겠는데 그렇게 많은 인원을 데려가면 일이 되겠느냐”는 불만이 쏟아졌다. 사람이 비면 물론 일이 늘고 힘도 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사람과 사람, 조직과 조직 사이에서 오는 손실이 오히려 줄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됐다. 불평불만은 “오히려 일하기 더 편해졌다”는 말로 바뀌었다. 200명의 혁신 팀원도 올곧게 프로세스 혁신에 전념할 수 있었다.

삼성SDI 천안 공장은 생산성 향상을 통해 남은 인력을 투입해 신수종 사업을 시작했다. 사진은 2007년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꼽히는 능동형 유기발광다이오드(AMOLED)를 세계에서 처음 대량생산하기 시작한 천안 사업장의 AMOLED 양산 라인.


팀원만 200명에 이른 혁신 전담팀

필자는 파킨슨 법칙(공무원의 수는 업무의 경중이나 유무에 관계없이 일정 비율로 증가한다는 법칙. 영국의 행정학자 시릴 N. 파킨슨이 주창)을 믿는다. 영국이 전 세계 42개국에 식민지를 뒀는데, 식민지 수가 줄어도 관리청 사람들은 계속 늘어났다고 한다. 일은 주는데 사람은 늘어나는 것이다. 일이란 것은 사람 수에 따라 더 늘어나게 마련이다. 혼자 할 일을 두 사람이 하면 거기서 파생된 관계 문제 때문에 일이 더 많아지고 바빠지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사람을 줄여야 일도 준다. 

200명이나 되는 사람을 간접 부문에서 빼냈으니 규모만도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부임 첫해에 매출 3조 원 중 원가절감 부문에서만 1조1000억 원을 달성했다. 브라운관 가격이 그렇게 떨어지는데도 흑자를 낼 수 있었던 건 위기의 공감, 그리고 신뢰의 공유에 있었다. 위기가 닥치면 ‘망한다’는 부정적인 생각과 ‘기회다, 할 수 있다’는 긍정적 신뢰의 두 가지로 생각이 나뉜다. 위기를 긍정적인 도전 정신으로 승화시키고 융합과 시너지를 이루면 결국 기회로 돌아오게 된다. 

그 무렵 천안에 새로 지은 공장은 최고의 효율을 자랑했다. 그런데 천안 공장의 직원들은 새로 뽑은 인원이 거의 없었다. 기존 공장의 생산성이 오르면서 남는 인원들을 투입한 것이다. SQM으로 품질을 개선했고 1996년 하반기에 식스시그마까지 도입한 결과였다. 

훗날 일본의 닛케이비즈니스에서 조사를 나온 적이 있다. 2000년 즈음의 일이다. ‘일본의 브라운관은 다 적자가 나서 문을 닫거나 위기인데, 어떻게 삼성SDI만 돈을 버는가’가 그들의 연구 과제였다. 나중에 돌아가 잡지에 특집 기사로 크게 소개했다. 삼성SDI는 생산성을 올려 그중 3분의 1을 신규 사업장인 천안에 투자했다. 천안에서 시작한 이차전지 사업이 대표적이다. 식스시그마로 원가 경쟁에서 일본을 10% 이상 앞서나갔다는 게 기사의 결론이었다.
  
숨겨진 일화도 있다. 시장의 맞수인 LG전자도 브라운관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과 마찬가지로 적자를 보고 있었다. 구자홍 당시 LG전자 부회장은 “왜 삼성만 이익인지 철저히 분석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재료비·인건비 등을 아무리 따져 봐도 브라운관 하나당 8000원 이상 LG 제품이 비싸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유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됐다. 8000원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답은 결국 ‘품질비용’이었다. 식스시그마식으로 말하면 당시 LG의 품질 수준은 3.7~3.8 수준이었고 삼성SDI는 이미 5.2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는 걸 뜻한다. 이 일을 계기로 LG전자도 전사적인 식스시그마 도입에 나서게 됐다. 


대만의 ‘미운 오리 새끼’ 삼성SDI

삼성SDI 사장으로 부임하며 기억에 남는 일 가운데 하나가 ‘대만대첩’이다. 모니터용 컬러 브라운관인 CDT는 1995년에 이미 공급이 수요를 훨씬 뛰어넘은 상황이었다. 가격도 50%나 폭락했다. 살아남는 길은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뿐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고정세(高精細) 기술은 따라잡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CDT는 기본적으로 모니터다. 모니터 자체의 특성에 브라운관을 얹었을 때 궁합이 잘 맞으면 화질도 좋아지고 제조도 쉽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삼성SDI 사람들은 ‘브라운관은 글로벌 스탠더드다. 우리는 우리 것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모니터 쪽에선 생산에 들어가 품질을 조정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들어 했다. 

부임 초기 대만의 업체를 찾아가 생산 책임자를 만났다. 그에게 “일본 히타치와 우리 제품의 차이가 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삼성 제품을 라인에 올리면 생산성이 30% 뚝 떨어진다”는 게 아닌가. “양이 모자라 할 수 없이 쓰지 그렇지 않으면 안 쓸 것”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이 이어졌다. 일개 창고 담당자까지도 우리 물건을 깔아뭉갰다. “물건을 50 대 50으로 샀는데, 생산 반장들이 히타치 것만 가져가려고 하니 창고 관리가 더 힘들다”는 푸념이었다.

낯이 뜨거워 더 이상 듣기 힘들 지경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품질·납기와 고객이 생각하는 게 다르다는 걸 절실히 깨달은 계기였다. 예를 들어 ‘그 달 안에 정해진 1000만 개만 선적하면 된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객으로선 자기가 필요할 때 정확히 필요한 숫자만큼 보내줄 때 비로소 ‘납기가 맞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필요 없을 때 왕창 보내 창고에 쌓아두게 하는 건 납기를 맞추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대만 업체 쪽에선 ‘삼성만큼 납기를 잘 안 지키는 기업’도 없었다. 일전에 만난 대만의 생산 책임자는 “곧 납품 평가가 있는데, 9개의 거래처 중 3개만 남기고 자를 예정”이라고 말했다. 공급과잉 때문이었다. 그는 “9개 중 수원서 오는 건 6등, 부산 것은 9등이다. 둘 다 잘릴 것이다”라고 대놓고 얘기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에게 이렇게 말하며 사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은 내가 새로 부임한 사장이다. 주특기가 프로세스 혁신이고, 두 번째는 품질 혁신이다. 그러니 품질을 완벽히 하겠다. 개선이 안 됐을 때 잘리면 상관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당신들 손해다. 그러니 시간을 달라.”

때마침 히타치의 대만 공장에서 기술자 한 명이 퇴임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는 브라운관과 모니터의 특성을 맞출 수 있는 전문가였다. 품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만한 적임자도 없다고 판단해 얼른 모셔왔다. 일본인 기술자는 모니터 설계에 직접 참여했고 우리가 가져온 브라운관의 특성과 맞춰 주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이후부터 어느새 “삼성SDI의 브라운관은 가져다가 바로 꽂으면(조립하면) 된다”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7대 기술 과제’를 정해 품질 혁신에 나섰다. 9개의 거래처 중 잘해야 6등이었던 삼성SDI는 혁신 석 달 뒤 13개의 거래처가 22개로 늘렸다. 1997년 11월 27일, 드디어 ‘대만대첩’이 완료되는 순간이었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Posted by 프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