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革新2012. 5. 5. 14:06

[Cover Story] 의료 시스템 혁신에 나선 세계최고 병원 '메이요 클리닉'
환자중심 진료·전문의 과정·협진 도입 등100년간 현대 의료 시스템 앞장서 만들어
세계서 환자 몰려드는데 또 혁신센터 설립 디자이너 10여명이 핵심 인력으로 주도

▲ 일러스트=정인성 기자
모든 산업에 걸쳐 가장 까다롭고 힘든 소비자는 누구일까? 아마 정답은 병원을 찾는 환자일 것이다. 자동차나 휴대전화 같은 제품이나 호텔·금융 등 서비스 상품은 개인의 기호(嗜好)에 따라 선택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하지만 중병(重病)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은 치료를 받기 위해 자기 생명을 걸고 그만큼 절박하다. 이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우면서 가장 특별하고 섬세한 서비스를 원하는 고객이다.

올해 88세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국왕은 2008년 말 가족 수십 명과 함께 보잉 747 전용기를 타고 미국 미네소타주에 있는 로체스터시를 찾았다. 압둘라 왕 일행은 한달여 동안 시내 호텔에 머물면서 100만달러가 넘는 돈을 썼다. 로체스터는 인구가 10만명 남짓한 작은 도시로,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드넓은 목초지가 펼쳐져 있고 겨울이면 섭씨 영하 20도를 밑도는 혹한과 수십㎝씩 쌓이는 폭설로 외출조차 힘들다. 그런데도 유럽·중동의 왕족과 부호(富豪), 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이곳을 자기 집 안방처럼 찾아온다. 지리적 불리함이란 한계에 아랑곳없이 '글로벌 의료 성지(聖地)'로 우뚝 선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이 있기 때문이다.

연인원 2000만명이 넘는 환자를 매년 맞는 메이요는 세계에서 환자 만족도가 가장 높은 병원으로 첫손 꼽힌다. 제럴드 포드, 로널드 레이건, 조지 부시 등 전직 미국 대통령과 어니스트 헤밍웨이, 아놀드 파머 같은 유명인도 이 병원에서 최고급 진료와 치료를 받았다.

메이요 클리닉이 갖는 명성의 원천은 1889년 설립 후 100년 넘게 일관되게 '환자 중심' 진료를 실천해 온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다 20세기 초 여러 분야의 의사가 팀을 이뤄 한 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협진(協診)' 개념을 세계 최초로 도입했다. 진료 환자 수에 관계없이 의사에게 같은 급여를 주는 제도도 100여년 전 도입했다. 성과급에 신경 쓰지 말고 메이요를 찾는 모든 환자에게 최선의 진료를 제공하겠다는 취지였다.

▲ 세계적으로 의사와 환자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병원으로 꼽히는 미국 메이요 클리닉은 지난 50여년 동안 발전하지 않은 의료 서비스 체계를 환자 중심 철학에 따라 바꾸겠다는 목표로 혁신센터(CFI)를 만들었다. CFI를 이끄는 두 핵심 인물인 니컬러스 라루소(오른쪽) 박사와 바버라 스푸리어 이사가 의료 서비스 혁신으로 새롭게 미래를 밝히겠다는 의미에서 전구(電球)를 들고 있다 / 메이요 클리닉 제공
세계 최초로 혈액은행 개설 및 전문의 과정 도입, 미국 최초로 CT(컴퓨터 단층 촬영)를 진단에 활용 등…. 메이요 클리닉의 최초 기록은 줄을 잇는다. 그래서 20세기 세계 의료산업 '혁신'의 상징으로도 불린다.

'US 뉴스 & 월드 리포트'지(誌)가 미국 5000여개 병원을 대상으로 한 '최고 병원'(Best Hospitals) 랭킹에서 최근 수십 년 동안 존스홉킨스병원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양대(兩大) 병원으로 뽑혔고 소화기내과·산부인과·신장내과 부문은 단연 미국 1등으로 평가받는다. 올해 초 포천지(誌)가 발표한 '일하고 싶은 100대 기업'에 9년 연속 선정됐다.

이처럼 명실상부한 '글로벌 넘버 원(one)'인 메이요 클리닉이 요즘 미국 경영학계와 의료계에서 최고 혁신 스타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지난 100여년 동안 사실상 고정돼 있던 의료 서비스 체계를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이란 경영 기법을 적용해 21세기 최첨단 모델로 바꾸겠다고 선언하고 이를 실행하고 있어서다. 하버드대 등 미국 유명 경영대학원들은 물론 세계 의료계가 메이요 클리닉의 혁신 사례를 집중 탐구하려는 이유이다.

메이요 클리닉이 추진하는 '파괴적 혁신'의 심장부는 2008년 7월 출범한 혁신센터(Center for Innovation·약칭 CFI)다. CFI는 모든 의료 서비스 체계를 메이요의 '환자 중심' 철학에 맞춰 개선하기 위한 내부 싱크탱크(연구소) 역할을 한다. CFI에서는 특이하게도 10명이 넘는 디자이너가 핵심 인력으로 근무하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세계에서 최고·최상급 환자들이 몰려드는 메이요 클리닉은 왜 서비스 혁신에 나선 걸까? 병원 서비스 혁신과 디자인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Weekly BIZ는 로체스터를 찾아가 '디자인 싱킹'(design thinking·디자인적 사고)으로 전면적인 의료 서비스 혁신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취재했다.

미국 미네소타주 최대 도시인 미니애폴리스에서 자동차로 1시간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 지난달 23일 오전 이 병원의 1층 로비에 들어서자 고급 호텔에 온 듯한 상쾌함이 밀려왔다. 널찍한 로비에는 온통 대리석이 깔려 있고, 천장에는 샹들리에 같은 화려한 전등이 달려 있다. 로비에 배치된 의자는 모두 쿠션이 달린 편안한 의자다. 특히 기다란 복도 모퉁이에는 후안 미로와 앤디 워홀 등 세계적 미술가의 그림과 조각이 전시돼 있다. 유명한 작품을 보려는 방문객을 대상으로 가이드 투어도 진행되고 있다.

메이요 클리닉이 내부 장식에 엄청난 돈을 투자한 목적은 사세(社勢) 과시용이 아니다. "메이요에선 병원 로비를 들어서는 순간부터 진료가 시작된다"는 '환자 중심' 철학에 따라 환자가 최대한 안락한 느낌이 들도록 하려는 '특별 배려'인 것이다.

환자의 경험을 중시하는 메이요의 '환자 중심 철학'은 유별나다. 의사는 초진(初診) 환자를 최소 45분 동안 진료한다. 환자나 보호자와 충분히 대화해야만 제대로 진단을 내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또 모든 의사는 돌보던 환자가 퇴원하면 72시간 이내에 환자를 보낸 다른 병원 의사에게 진료 경과와 회복 상태에 대해 연락을 해줘야 한다.

연락을 하지 않으면 병원 경영진으로부터 경고 이메일을 받는다. 메이요 클리닉의 오재건 박사(심장내과)는 "여기서 일하는 모든 사람은 환자 중심주의를 실천하도록 끊임없이 교육받는다"며 "환경미화원도 '환자의 회복에 도움이 되려면 언제 어디를 깨끗이 정리해야 할까' 고민하는 것이 메이요의 문화"라고 말했다.

메이요 클리닉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병원이 없던 로체스터에서 북군(北軍) 군의관으로 근무한 윌리엄 메이요가 1889년 의사인 두 아들과 함께 세웠다. 메이요 부자(父子)는 설립 초기 외부 의사에게 수술 장면을 처음으로 공개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의료 발전을 위해 메이요가 쌓아온 수술 노하우를 외부와 공유하기 위함이었다. 메이요는 '환자 중심 철학'과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열린 혁신)'으로 세계에서 환자와 의사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병원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메이요가 2008년 7월 세운 혁신센터(CFI)도 '환자 중심'과 '열린 혁신'을 근간으로 한다. 20세기에 의료 기술과 제도 혁신을 주도한 메이요 클리닉은 21세기에는 의료 서비스 혁신을 선도한다는 청사진을 갖고 있다.

Weekly BIZ는 CFI를 이끄는 두 핵심 인물인 니컬러스 라루소(LaRusso) 이사와 바바라 스푸리어(Spurrier) 이사를 만났다. 라루소는 2000년대 초 메이요의 내과 총괄(Chair of Medicine)을 역임한 명망 있는 의사이고, 스푸리어는 미국 재향군인회 등 의료 관련 기관에서만 20년 넘게 근무한 의료 경영 전문가다. 21세기형 서비스 혁신을 추구하는 CFI의 특징을 5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유별난 환자 중심 철학
로비 등 초호화 편의시설 환자가 다른 병원으로 가면
72시간내 진료 내역 알려줘 어기는 의사에겐 옐로 카드


'환자 중심'에서 나온 서비스 혁신

CFI의 목표는 의료 서비스 체계를 대대적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의료 공급자(의사)와 소비자(환자)의 상호 작용을 분석해 환자가 가장 좋은 경험을 하도록 의료 서비스 체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CFI를 이끄는 라루소 박사는 500명이 넘는 의사를 거느리던 내과 총괄 시절 외래 진료실을 환자 중심으로 혁신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2차 세계대전 이후 50여년 동안 진단·수술 등 의료 과학은 더 이상 발전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하지만 서비스 체계는 제자리걸음을 하며 발전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었다.

라루소는 철저한 관찰과 실험을 통해 진료실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과거 진료실 구조는 의사와 환자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지금은 의사와 환자가 테이블이나 소파에 앉아 진료를 진행한다. 의사가 컴퓨터 모니터만 들여다보며 환자를 진료하면 제대로 대화를 주고받기 어렵다는 관찰 결과에 따라 모니터도 검사 결과를 설명할 때만 의사와 환자가 함께 볼 수 있도록 배치했다.

라루소의 진료실 혁신 과정을 지켜본 메이요 경영진은 이런 혁신 사례를 조직 전체로 확산시키고자 했다. 경영진은 이에 따라 라루소에게 의료 서비스 혁신을 전담할 혁신센터 설립을 요청했으며, 그 결과 전 세계 병원을 통틀어 최초로 서비스 혁신을 위한 내부 싱크탱크가 탄생했다.

혁신의 핵심은 '디자인적 사고'

라루소 박사는 "디자 인 컨설팅 업체인 아이데오(IDEO)와 함께 진료실 혁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의료 서비스 혁신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디자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디자인적 사고(디자인 싱킹·design thinking)'는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유용한 접근법"이라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CFI는 '병원의 모든 일을 환자 중심으로 생각한 뒤 문제를 찾아내고 모든 것을 환자 중심으로 새롭게 디자인한다'는 것을 핵심 개념으로 내걸었다. 수십년 동안 관행적으로 사용되던 모든 기구나 절차를 소비자 시각으로 접근해 개선점을 찾아내 진료 디자인을 바꾸자는 것이다.

'디자인 싱킹'은 아이데오의 팀 브라운 CEO가 주창한 개념인데, 제품을 사용하기 쉽고 팔리기 쉽게 만드는 좁은 의미의 디자인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접근 방식으로 생각하는 넓은 의미의 디자인 개념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게 골자이다.

하지만 CFI 설립 초기 '디자인적 사고'를 이해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의료계 최초로 디자이너를 뽑겠다고 하자 당장 메이요 내부에서조차 '정신 나간 시도'라는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 메이요에서 이 개념이 서비스 혁신의 핵심이라는 점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오히려 전 세계 병원마다 '메이요 클리닉 배우기'가 한창이다.

CFI가 최근 개발한 어린이용 채혈 의자는 디자인적 사고를 반영한 대표적 혁신 사례다. 어린이 대부분은 채혈(採血) 때마다 공포감을 느끼며 심하게 운다. 이런 점을 감안해 채혈 때 어린이가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기기를 설치한 것이 채혈 의자다. 얼핏 사소해 보이지만 지금껏 어떤 병원도 이런 발상을 하지 못했다.

원격 진료 'e컨설트'
방문 어려운 환자를 위해 의사들이 원격 화상 진료
과다한 의료비 지출 줄이고 잠재적 의료 고객 만들어

파괴적 혁신으로 산업 변화를 선도

CFI의 모토는 '크게 생각하고, 작게 시작해, 빨리 움직인다(Think Big, Start Small, Move Fast)'이다. 현재까지는 CFI 성과가 외형적 혁신에 집중된 것처럼 보이지만, CFI의 궁극적 목표는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으로 의료 산업의 지형을 바꾼다는 것이다.

CFI는 최근 일종의 원격 진료 서비스인 'e컨설트'를 시작했다. 거리나 시간 때문에 직접 메이요를 방문하기 어려운 환자를 메이요 클리닉 의사들이 화면으로 원격 협진한 뒤 48시간 이내에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서비스다. 물론 초기엔 '환자가 오지 않으면 메이요의 매출이 줄어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내부 반발도 있었다. 스푸리어 이사는 "앞으로 10~20년 뒤 미국 내 의사 숫자가 절대 부족해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며 "e컨설트는 의사 부족에 따른 의료산업의 구조적 변화를 대비하기 위한 파괴적 혁신 사례"라고 말했다.

환자나 보험사 입장에선 의료비 지출을 줄여 미국의 고질적인 의료보험 제도 개선에 기여할 수 있고, 병원 입장에서도 e컨설트를 경험한 환자가 메이요의 잠재 고객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될 수 있다. 라루소 박사는 "우리의 임무는 '현재 상태(status quo)'를 깨는 것이며 이를 위해선 시대 흐름을 잘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혁신의 사령탑 CFI
4년만에 4명에서 60명으로 디자이너부터 인류학자까지
다양한 분야 전문가 모여 100개 넘는 혁신 과제 추진

다학제적 접근과 협업으로 혁신 창출

현재 CFI에는 60여명이 근무한다. 2008년 7월 출범 당시 4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조직이 엄청나게 커진 셈이다. 특이하게도 CFI에는 산업·제품·그래픽 디자이너 14명을 비롯, 의사·간호사·통계학자·인류학자·분석가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모여 있다. 스푸리어 이사는 "디자이너 채용 공고가 나면 의료 분야에서 특기를 살리겠다는 유명 디자인 스쿨 졸업자가 수천명씩 지원한다"고 말했다.

현재 CFI는 진료실 개선 2차 작업, HAIL (Healthy Aging and Independent Living·건강하고 독립적인 노후 생활) 등 100개가 넘는 혁신 프로젝트를 동시 다발적으로 추진 중이다. 라루소 박사는 "좋은 혁신을 이끌어 내려면 다양한 분야 전문가로 좋은 팀을 구성하는 게 중요하다. 특히 외부 전문가들은 기존 의료 종사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다양한 통찰력으로 혁신을 창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학제적(多學際的·multi-disciplinary) 협업'의 성공 여부는 팀워크에 달려 있다는 판단 아래 CFI는 훌륭한 개인이 아닌 좋은 팀에 보상을 준다. 스푸리어 이사는 "팀 업적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하나의 팀으로 훌륭한 업적을 달성했다는 징표로 신분증에 붙이는 작은 배지를 주는 것이 보상의 전부"라고 말했다.

열린 혁신으로 의료계 동반 혁신 추구

CFI 로비 테이블에는 어린이용 장난감이 놓여 있다. 같은 층에 있는 소아과 환자가 불쑥 찾아와도 내쫓지 않고 시간을 보내도록 한다. CFI는 더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연내에 출입구 개방 공사를 벌일 예정이다. 대부분의 기업이 혁신 활동을 비밀스럽게 추진하고 혁신 담당 조직의 사무실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이다. 스푸리어 이사는 "조직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는 소통 잘못에서 시작된다"며 "외부인과 소통하는 건 새로운 혁신 아이디어를 얻는 좋은 창구이다"고 말했다.

전 세계 병원과 의사들이 벤치마킹을 목적으로 많이 방문한다는 점을 감안해, CFI는 아예 매년 가을 혁신 사례 설명용 대형 콘퍼런스를 개최한다. 메이요 클리닉이 쌓아온 노하우를 모든 이에게 공개해 의료계 전체의 '동반 혁신'을 유도한다는 오픈 이노베이션 정책의 기조 위에서다. 라루소 박사는 "CFI의 의료 서비스 혁신은 메이요의 생존을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국가적·세계적으로 의료 서비스의 전반적 개선을 유도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출처] 조선Biz

Posted by 프로처럼
공부/革新2012. 4. 28.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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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억엔 순손실… 일본 간판기업의 쇼크]

3년前에는 혁신의 아이콘… 포켓몬스터·슈퍼마리오·Wii·DS시리즈로 세계 석권

스마트폰 등 무료게임에 밀려 이제는 천국에서 지옥으로

"스마트폰이 아무리 많이 보급돼도 게임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

지난해 닌텐도(任天堂) 이와타 사토루(岩田聰) 사장은 스마트폰의 무료게임에 밀려 실적이 악화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자, "닌텐도는 다르다"고 했다. 닌텐도는 지난해 게임기 가격 인하, 새로운 소프트웨어 투입, 경비 절감 등 총력전을 펼쳤지만 1962년 상장 이래 첫 적자를 기록했다. 세계 최초라는 안경이 필요 없는 입체 3D게임기도 속수무책이었다.

닌텐도는 '2011회계연도'(2011년 4월~2012년 3월)에 423억엔의 순손실을 기록했다고 27일 밝혔다. 매출은 더 비참하다. 전년 동기 36% 줄어든 6476억엔으로, 사상 최고 실적을 냈던 2009년(1조8386억엔)의 3분의 1 토막이다. 불과 3년 만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한 것이다. 1889년 교토(京都)에서 화투 제조업체로 출발한 닌텐도는 완구제조회사를 거쳐 1980년대 가정용 게임시장에 진출했다. 닌텐도DS 시리즈, 가상현실게임 '닌텐도 Wii' 등 혁신적인 제품과 포켓몬스터, 슈퍼마리오 등 전 세계 어린이들이 열광하는 캐릭터를 만들어 세계시장을 석권했다. 2006년 가족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가상현실 게임기 'Wii' 등 연속 히트상품을 내면서 2009년에 사상 최고실적을 냈다. 세상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이라는 찬사가 쏟아졌고 연간 2000억~5500억엔(약 2조8000억~7조7000억원)의 영업이익을 내 일본의 간판 기업이 됐다.

Chosun

위기는 성공의 절정기에 소리도, 형체도 없이 찾아왔다. 성공에 도취한 사이 스마트폰이라는 경쟁자의 부상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것이다. 닌텐도가 게임기 판매에 열중하는 동안 스마트폰과 태블릿PC가 무료 게임을 쏟아냈고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게임도 확산됐다. '게임의 법칙'이 180도 바뀐 후에야 닌텐도는 허둥지둥했다. 닌텐도는 작년 게임기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판매 가격을 40% 인하했지만, 이게 오히려 게임기를 팔면 팔수록 적자가 나는 구조를 정착시키는 악수였다는 평가도 나왔다. 닌텐도는 해외매출의 90%가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 이뤄지고 있어, 급성장하는 아시아시장 대응에도 뒤처졌다.

닌텐도는 지난 2월 인터넷을 통한 게임판매를 연구하는 조직을 만들고 아시아 사업팀도 발족하는 등 사업구조 개편작업에 착수했다. 일부에선 위기 타개를 위해 게임기 판매를 축소하고 소프트웨어를 타사 단말기에 공급하는 등 사업구조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닌텐도는 신제품 'Wii U'를 올 연말에 발매해 역전의 발판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Wii의 차세대 게임기인 'Wii U'는 인터넷을 이용한 음악감상, 노래방 기능, 소프트웨어 다운로드 등 다양한 기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타 사장은 "세상에 닌텐도가 다시 한 번 혁신했다는 평가를 받는 1년이 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도쿄=차학봉 특파원]


[출처] 조선일보

Posted by 프로처럼
공부/革新2012. 4. 5. 16:40

사람이 곧 혁신이다 -마지막 회

현재 필자는 한국형리더십개발원의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리더십 연구와 보급에 힘쓰고 있다. 한국형리더십개발원의 목표 중 하나는 한국형리더십연구소를 대학에 세우는 것이다. 하버드 케네디 스쿨을 한국에도 세우자는 꿈이다. 1936년에 설립된 케네디 스쿨은 세계적인 공공 정책 전문 대학원이다. 당시 대공황을 겪은 미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은 모든 문제의 원인을 공공 리더십의 부재에서 찾았다. 이들이 돈을 모아 하버드대에 주고 퍼블릭 리더십을 연구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오늘날 케네디 스쿨은 전 세계의 리더들이 한 번씩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가 되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이곳에서 공부했다. 전 세계 리더들의 네트워크가 이곳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인종과 사회문제를 안고 있는 미국이 저렇게 안정적으로 가는 것도 케네디 스쿨 같은 곳에서 공공 리더십으로 무장한 리더들을 많이 육성했기 때문이다.

한국도 1977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을 세웠다. “가난한 한국 사람들이 경제 성장으로 졸부 근성을 가지게 되면 대혼란이 온다. 정신문화를 연구하고 보급하는 활동을 하자”는 의도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주도로 33만500㎡(10만 평)의 설비를 갖추고 훌륭한 학자들을 모았다. 연구원장은 부총리급이었다. 

하지만 불과 2년 활동 뒤 박 대통령이 사망하고 초대 원장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부터 방향을 잃고 헤맨 지 벌써 30년이다. 지금은 원래 정관 1호에 있던 ‘정신문화, 리더십’ 얘기가 다 빠져 있다. 오늘날 사회적 갈등 비용이 국내총생산(GDP)의 27%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런 엄청난 혼란은 결국 공공 리더십의 부재가 아닌가 싶다.

하버드 케네디 스쿨에서 강연하는 앨빈 토플러. 케네디 스쿨은 전 세계 리더들이 한 번씩 거쳐가는 공공 정책 전문 대학원이다.


한국형 리더십 연구·보급 절실

하지만 아직도 한국형 리더십 보급에 나서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부 기관, 기업, 사람들을 많이 만나 필요성을 얘기했지만 참여하고 지원해 주는 경우는 없다. 공공의 생태계·문화를 만드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새마을운동을 겪으며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한국인들이 가장 부지런하고 오래 일하는 사람들로 바뀌었다. 결국 한강의 기적까지 일으켰다. 이제야말로 새로운 리더십·정신문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한국을 만들어야 할 시점이다. 여기에 국민들의 뜻과 지혜를 모을 때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행복나눔 125’ 운동이다. 삼성전자에서 ‘GWP(Great Work Place)’를 도입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시작된 행복한 일터 만들기 운동인데, 최종 지향점은 프라이드(pride: 긍지와 자부심), 트러스트(trust: 신뢰), 펀(fun: 즐거움)의 세 가지다. 이를 조직하고 정착시키는 과정이 한국형 리더십으로 발전할 수 있는데, 문제는 전형적인 서구형 방법론이라는 데 있다. 서양 사람들은 좌뇌 중심으로 논리적으로 움직인다. 반면 한국인은 우뇌 중심으로 감성적으로 움직인다.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기업의 수많은 혁신 운동이 비용만 들어가고 효과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농심 회장일 때도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행복한 일터 만들기와 조직 문화 개선에 힘썼지만 기대했던 성과를 완벽히 거두지 못한 것이 아쉽다. 예를 들어 ‘펀’한 직장을 만들기 위해 많은 최고경영자(CEO)들이 ‘호프데이’ 같은 것을 만든다. 하지만 이때 놀기는 잘 노는데 소통은 안 될 때가 많다. 한국인은 그런 일상적인 자리에서 어려운 문제나 고충을 털어놓는 사람들이 아니다. 호프데이 자리는 즐겁게 논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돈은 돈대로 쓰고 성과가 없는 이유다. 

그러던 중 깨달은 것이 한국적인 방법을 찾자는 아이디어였다. 어느 날 ‘감사 일기’를 쓰면 행복해진다는 ‘감사 나눔’ 운동에 대해 알게 됐다. 오프라 윈프리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딛고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여성이 된 건, 매일 작은 감사 5개를 일기에 적었던 것에서 가능했다고 한다. 

‘우리도 한 번 해보자’는 생각에 ‘감사 나눔 신문’을 발행했다. 여러 사람에게서 지혜를 모으고 매일 감사한 일을 일기에 쓰자는 의도였다. 감사한 일이 100개, 1000개, 1만 개로 늘면 감사의 기적이 일어난다.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너그러워지고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독서, 착한 일, 감사하는 마음. 이 세 가지를 모아 2010년 3월에 틀을 완성했다. 그것이 바로 ‘행복나눔 125’ 운동이다. 행복한 일터와 사회를 만드는 건 우리 모두의 꿈이다. 새마을운동은 배불리 먹고 잘 살아보자는 염원을 담은 운동이었다.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어선 지금은 새마을운동과 다른 새로운 차원의 운동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방법은 첫째, 1주일에 한 번은 착한 일을 한다. 둘째, 한 달에 2권의 좋은 책을 읽는다. 셋째, 하루에 5개의 감사 일기를 쓰자는 것이다. 이를 표현한 게 ‘125’다. 

구체적인 방법이 결정되면 이를 도입해 실현해 줄 조직이 필요하다. 주위의 작은 기업에서 관심을 보이는 곳이 많았지만 이름이 알려진 큰 기업에서 성공시키고 싶었다. 마침 새로 CEO로 선임된 허남석 포스코ICT 사장을 만났다. 

포스코ICT는 포스데이터와 포스콘을 하나로 합쳐 만든 신생 회사였다. 포스데이터는 와이브로 개발에 나섰다가 실패해 큰 손실을 보고 도산 지경에 와 있었다. 포스콘은 엔지니어링 서비스를 주로 해 현장 중심 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기업이었다. 완전히 이질적인 조직 문화를 가졌던 기업이 물리적으로만 합쳐진 상태였던 것이다. 물과 기름 같은 두 기업을 어떻게 하나로 뭉치느냐가 허 사장의 고민이었다. 



행복한 일터와 사회를 만들자

허 사장을 만난 필자는 감사의 위력을 설명하며 행복나눔 125를 소개했다. 사실 그전에 감사 일기를 써볼 것을 권했는데, 허 사장 스스로 감사의 위력을 알게 되며 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허 사장은 유명한 혁신의 전도사답게 행복나눔 125 운동을 전파하고 격려해 나아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009년도 직원 몰입도 조사에서 43%에 그쳤던 결과는 운동 시작을 선언한 2010년 4월부터 불과 몇 달 뒤에 58%로 상승했다.

2011년에는 70%에만 도달해도 훌륭하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런데 놀랍게도 84%를 달성했다. 포스코 본사는 물론 계열사에서 최고 기록이었다.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겉돌기만 했던 직원들은 항상 웃고 신바람 나는 사람들로 바뀌어 나갔다. 미래를 걱정하던 조직이 내일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기업으로 변한 것이다. 정준양 회장도 이를 알고 포스코 전 그룹으로 운동을 확산시켰다. 정 회장이 앞장서 가장 먼저 교육을 받았다. 정 회장은 매일 무작위로 직원 3명을 연결해 감사 전화를 걸었다. 

군(軍)과도 협력했다. 당시 국방대학 리더십개발원장이었던 최병순 원장과 상의한 결과 오늘날의 군에서도 이런 운동이 필요하다는 데 동감했다. 수방사 전차부대를 시범부대로 선정해 부대원들에게 감사 일기 쓰기 교육을 진행했다. 젊은 사병들은 거의 모두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일기에 써내려 갔다. 1시간 남짓한 시간에 100가지, 200가지 감사의 마음이 채워졌다. 이윽고 눈물이 앞을 가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감동의 물결이 일었다. 이후부터 문제 사병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올해부터는 전 군과 육사에도 행복나눔 운동을 전파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포스코의 성공 사례를 따라 대림그룹, 광양시, 서울시 공무원노조 등도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자발적인 참여가 이뤄지면 대표적인 풀뿌리 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크다. 행복나눔 125 운동이 지식 창조 사회의 새마을운동으로 성장하는 게 필자의 간절한 소망이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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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2. 3. 23. 09:41
민화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작품 활동의 원동력
2011년 12월 12일 (월) 13:57:14 취재_이진의 기자 top@sisamagazine.co.kr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가장 한국적인 것이라 해도 한국인뿐만 아니라 세계인이게도 통용될 수 있는 보편성이 없다면 한국적인 특수성만을 띤 콘텐츠는 세계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많은 예술가와 콘텐츠 관련 인사들은 과연 어떤 한국적인 콘텐츠에 세계적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보편성을 접목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여기 가장 한국적인 그림, 민화에 대한 사랑으로 똘똘 뭉친 부부작가가 있다.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과 자긍심으로 민화의 캐릭터 활용가치에 주목하고 있는 그들의 활동이 화제가 되고 있다.

“민화 자체가 우리 민족이고 삶이다”

차재성 작가와 김선정 작가는 민화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부부작가이다. 차 작가는 대학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한 후 모자디자이너로 20년 넘게 종사해 왔다. 차 작가는 “일을 하다보니 매너리즘이 찾아왔고, 세계가 주목할 만한 캐릭터를 고민하던 중 전통 민화를 접하게 되었다”며 “전통 민화에 대해 연구하고 공부한 결과 민화를 응용한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다”고 밝혔다.
민화에 몰두하게 된 차 작가는 부인 김 작가에게도 상업미술이 아닌 전통 민화를 권유했고 지금까지 부부는 민화에 몰입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차 작가는 “내가 이윤창출에만 눈이 어두웠다면 부인인 김 작가를 어려운 민화의 길로 인도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과 자긍심 속에 우리 것을 정성스럽게 살려 활용 가치를 극대화 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민화를 접한 것은 꽤 오래전 일이지만 근본적인 계기는 우리나라다운 캐릭터로 세계시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모자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캐릭터를 생각하던 중,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는 전통 민화밖에 없다는 스스로의 답을 얻은 차 작가. 김 작가 또한 “오래전부터 민화에 관심을 갖고 있던 남편의 권유로 3년 전 처음 민화를 접하게 되었다”며 “민화를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해버렸고 그날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민화를 그리게 되었다”고 말했다.

   
차 작가는 민화의 매력에 대해 “민화 그 자체가 우리 민족이고 삶이다”며 “보면 볼수록 편안하고 친근하며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워 그린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자유로운 영혼을 풀어헤친 대한민국 사람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살풀이 같은 그림이다”고 밝혔다.

가장 한국적인 특색의 민화 모자, 외국인에게도 큰 호응

차 작가는 ‘민화’라는 우리 민족만의 특수성을 띤 미술을 ‘모자’라는 보편적 사물에 접목시켜 민화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기여하고 있다. 모자회사에서 자수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미국의 모자를 많이 접하고 디자인을 하다 보니 애국적 오기가 생겨 왜 우리나라 캐릭터로는 세계적 상품이 없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수없이 많은 캐릭터 개발을 하면서 무언가 아쉽고 부족한 느낌을 가지고 있던 중 멸종된 한국 호랑이 이야기를 보다가 전통 민화의 호랑이 얼굴이 떠올랐다고 한다. 차 작가는 “이거다! 살리자! 그림으로라도 금수강산에 호랑이들을 뛰어놀게 하자”라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민화는 한지에 그림을 그린다. 모자는 원단에 수를 놓는다. 전통 민화를 그대로 옮겨 모자에 수를 놓을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캐릭터는 아닐 수 있다. 그래서 차 작가는 민화의 그림 풍을 살리되 현대적 캐릭터로 다듬어서 다시 그려내고 있다. 기계에서 대량생산하듯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자수로 정성껏 모자에 민화캐릭터를 입히고 있다. 차 작가의 민화 모자는 장인정신으로 제작되고 있고, 작품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은 모자 하나하나에 낙관까지 들어가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모자인가? 차 작가 본인이 모자 자수디자이너 출신이기도 하지만 깊은 뜻이 있었다. “모자는 안 쓰면 그만이지만, 모자를 쓸 경우 사람들의 시선은 머리, 즉 모자부터 본다. 머리에 깔끔하지 않은 색채가 올라가 있다면 본인 스스로가 위축되고 자신감이 없어진다”며 “심리적인 요인이 가장 많이 작용하는 곳이 머리, 얼굴이다”고 말했다. 모자는 보편성을 띤 물건이다. 전 세계인들에게 익숙한 모자를 통해 우리의 특수성을 띤 민화를 접목한 모자작품은 외국인들에게도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민화는 가정의 안녕과 건강, 화목, 풍요, 성공 등을 비는 민속신앙적인 면이 있다. 민화 모자의 제작의미와 작가적인 철학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눈으로 보고 느끼는 그 순간만으로도 훌륭한 모자라는 것은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외국인이라도 인지하고 있다. 실제로 한 영국 여성은 자수 모자를 액자로 만들어 벽에 걸겠다고 말했다. 외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장사하고 보자는 식의 제품이 판치고 더군다나 Made in Korea는 찾아볼 수 없는 현실에서 한국적 미를 띤 모자작품이 호응을 얻고 있는 이유다.

“민화 모자를 하나의 한국적인 브랜드로 만들겠다”

차 작가는 올해 다섯 번의 모자전시를 성공리에 마쳤다. 차 작가는 “사람들의 모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많이 바꿔놓은 것 같다”며 전시회의 성과를 밝히며 “모자를 써보신 분들이 남녀노소 없이 어울리며 맘에 들어 하는 모습에 감사했다”고 말했다. 차 작가의 모자작품이 국내외적으로 점차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게 되기까지 부인 김 작가의 공로가 작지 않다. 차 작가는 “항상 나를 믿고 응원하는 부인이 있어 열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활력소가 된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동반자의 입장에서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부부작가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김 작가는 단순히 민화를 그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한지를 이용한 다양한 표현기법을 시도하고 있다. 한지의 표현기법은 한지의 종류만큼 다양해 김 작가의 작품세계에 기본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다. 김 작가의 이러한 작품들은 작년과 올해 영월조선민화박물관  전국 민화 공모전에서 2회 연속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남편은 민화를 새롭게 디자인하여 모자에 자수로 표현하는 대한민국 유일의 모자작가로서, 부인은 민화와 한지를 접목한 작품 활동으로 각자 한국적인 것을 새로운 한국적 콘텐츠로 만들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토론하고 격려하며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차 작가는 “지금 도전하고 있는 것은 15년 전에 구상한 것이고 현재의 모자들을 기획, 디자인하여 샘플을 만드는 데만 만3년이 걸렸다”며 “아직 해야 할 일의 100분의 1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브랜드는 1~2년 만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차 작가는 민화사랑과 자부심 하나로 민화 모자를 하나의 한국적인 브랜드화 하여 한국의 혼이 담긴 캐릭터로 만들고자 하는 길고 긴 여정을 걸어가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가장 세계적인 것으로의 발돋움을 준비하고 있는 차재성, 김선정 부부 작가의 노력을 통해, 이야기가 있는 한국적인 명품이 탄생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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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2. 3. 22. 10:16

사람이 곧 혁신이다 42

2001년 삼성종합기술원에서 ‘미래기술연구회’를 발족했다. “앞으로의 시대는 융합 기술의 시대다. 새로운 융합은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들이 서로 교류하고 이해하는 시너지에서 나온다. 삼성의 미래는 바로 이 융합 기술에 달려 있다.” 연구회가 발족된 배경이다.

한국 최고의 전문가들을 연구회 회원으로 초청해 강연을 열었다. 나노·바이오·통신·컴퓨터에서 건축과 사회 분야 전문가까지 20명 정도를 조직했다. 지금도 2, 3기로 이어지고 있다. 이 자리에는 삼성전자의 차세대 리더들과 최고경영자가 함께 참여했다. 당시 전무였던 이재용 사장도 멤버였다. 기술원의 전문가들, 삼성전자의 최고기술경영자들이 함께 참여해 이들과 교류했다. 서로 듣고 배우는 자리였다.

연구회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가 만족감이 대단했다. 이들은 서로 각 분야에서 1등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다른 분야는 잘 몰랐다. 흔하지 않은 교류의 기회를 열어준 것에 대해 굉장히 고마워할 정도였다. 삼성도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대표들의 지혜·지식을 나눌 수 있는 기회였다.

요즘 동반 성장과 공생이 화두인데, 사업 초기만 해도 모회사만 잘되고 하청 업체들은 수단만 제공하는 시대였다. 그야말로 하청 관계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협력회사’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지금에 와서는 공생 시대를 말하게 됐다. 단순히 어떤 회사와 거래 관계에 있는 협력회사가 아니라 전자산업 전체를 뒷받침하는 큰 생태계(클러스터)를 올바르게 육성하는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개념으로 발전한 것이다. 생태계를 바탕으로 모기업이 크고 협력사도 발전하면 개인이나 작은 기업도 상승 발전하게 된다. 어장을 크게 만들어야 큰 물고기가 많이 놀고 어부도 고기를 잘 잡을 수 있다. 미래기술연구회는 융합 기술의 리더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생태계를 만들자는 개념이었다. 오늘날의 공생이나 동반 성장과 같은 개념이다.



한국 최고들이 모인 미래기술연구회

4세대 통신 연구가 좋은 예다. 처음부터 5개 대학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대학에 10~20명 정도의 연구 인력이 참여하는 대형 산학협력 클러스터를 만들었다. 일종의 4세대 통신 생태계다. 오늘날 한국이 통신 강국으로 자리한 것도 이런 생태계가 뒷받침이 됐다.

2004년 1월 필자는 5년간의 기술원 생활을 마감하고 삼성인력개발원장으로 부임했다. 그 시절 항상 고민했던 것 중 하나가 “왜 공대를 나오고도 기업에 오면 3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제 역할을 하는가”였다. 미국에선 졸업 후 바로 기업 활동에 뛰어들어도 적응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2~3년씩 교육을 해야만 했다. 중소기업이나 대기업 할 것 없이 수천만 원에서 1억 원 넘게 재교육에 투자했던 것이다. 삼성도 마찬가지다. 해마다 뽑는 신입 사원들을 제일 처음 교육하는 곳이 바로 인력개발원이다. 학교와 기업 사이의 변화를 이어주는 중간 다리 역할이다.

삼성의 신입 사원 교육은 유명하다. 4주간에 걸쳐 짜임새 있는 교육이 강도 높게 진행된다. 인력개발원을 거치고 나야 비로소 삼성맨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신입 사원들의 특성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는 곳도 개발원이다. 각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는 어떤 인재인가, 우리가 받아들인 인재는 어떤가. 우선 이 갭부터 채워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연수 기간 안에 모든 과목과 훈련 내용을 식스시그마적으로 분석해 설계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즉, 과학적인 분석 방법론이다.

기업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부족한 것이 데이터 조사다. 특히 신입 사원들의 기초 소양 데이터 조사에만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이 시간을 줄이는 교육과정 개발이 부임 후 첫 번째 목표가 됐다. ‘3년 걸리던 걸 2년 안에 하자’, 그리고 다시 ‘1년 만에 끝내자’는 목표를 세웠다. 그다음에는 각 대학과 협력해 입사 후 오리엔테이션을 거쳐 바로 업무에 투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신입 사원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 중 하나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었다. 단순한 기술 습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두 번째는 팀워크 같은 공동체 의식이다. 하지만 부족한 점들이 있더라도 삼성에 입사한 사람이라면 이미 어느 정도 검증된 인재들이었다. 즉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인력개발원의 모든 교육과정을 대학 교육과 직장 업무 사이의 갭을 채우는 교과과정으로 개편했다. 하지만 필자가 떠난 후 애석하게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지는 못했다. 만약 계속 발전했더라면 대학 교육까지 심도 있는 협력이 이뤄져 큰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를 가나, 무엇을 하나 원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저 연수시키고 교육하는 게 다가 아니다. 단순한 오리엔테이션 정도의 개념과 신입 사원의 역량·특성을 분석해 부족한 것을 찾고 체계적으로 교육, 보완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이를 계속 분석하고 연구해 3년에서 2년, 1년, 즉시로 심화했다면 대한민국 교육의 생태계가 변화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삼성 신입 사원들은 입사 1년 후 평창에 모여 ‘수련회’를 다시 연다. 7000~8000명 수준이다. 이곳에는 교육 담당도 모두 모여 잔치를 치르듯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진다. 1년 동안 수고했다는 축하의 의미다. 계열사 사장들도 모두 참석해 굉장히 성대하게 치러진다. 필자도 행사에 참석해 관계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잔치하는 이유가 뭐냐. 수고·격려·칭찬으로 그치는 것이냐. 신입 사원 입장에선 맞다. 하지만 교육자 입장에선 그것만으론 안 된다.”


삼성그룹의 신입 사원 교육은 강도 높기로 유명하다. 사진은 신입 사원 하계 수련회 모습.


한국형 리더십을 찾다

신입 사원 교육을 마친 후 각 계열사로 보내 1년이 지나면 어느 회사 신입 사원들이 역량을 발휘하고 발전했는지 비교 분석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그렇게 해서 최고의 교육 방법론, 최악의 사례를 발굴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역량을 발휘하고 빠르게 적응하는지 반성하고 깨닫는 학습의 장이 1년 후의 수련회가 돼야 한다는 게 지금도 필자의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 잘하는 곳을 벤치마킹하고 못하는 곳은 더 노력해 배우고 연구해야 한다. 이런 목적의식을 갖고 임하는 것이 인력개발원의 가장 중요한 일이자 목표가 돼야 한다.

당시 리더십 관련 교육을 체계화하면서 한국에서 최초로 체계적인 리더십 양성 과정을 만들게 됐다. 제너럴일렉트릭(GE)의 시스템을 많이 참고했는데, 실제로 GE의 컨설턴트를 초빙해 프로그램을 설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를 진행하다 보니 모든 것이 다 서구의 교육과정이었다. 미국과 유럽의 이론과 교재가 바탕이 된 것이다. 그때 비로소 의문이 생겼다. 한국인의 특성과 생각이 서구와 다른데, 이를 그대로 도입하는 게 효과적인가. 우리나라는 지식 창조 사회의 대표적 리더인 세종이 있는데, 왜 교육에는 접목되지 않았나. 이런 의문에 답을 준 분이 국민대의 리더십 전문가인 백기복 교수였다. 백 교수는 이후 ‘세종의 마음경영’이란 책도 쓰고 한국형 리더십 연구의 중심으로 활동하는 분이다.

한국형 리더십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하게 됐다. 잭 웰치와 이건희는 분명 차이가 있다. GE식이 과연 한국에 맞는지 물어보면 답은 ‘아니다’다. 한국인은 진돗개와 비슷해 위기가 오면 기적 같은 일을 이룬다. 또 한국인은 감성적이고 서구는 논리적이다. 한국인은 마음으로 통하고 승복하지 않으면 진정한 힘을 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에 맞는 리더십이 따로 있는 게 아닐까. 그 DNA를 분석하고 전파해 각 분야에서 한국형 리더십이 살아 움직이면 세계적 일류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활동이 2007년부터 벌써 6년째 이어지고 있다.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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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2. 3. 22. 10:15

사람이 곧 혁신이다 41

일본 산요전기의 이우에 사토시 회장이 2003년 이건희 회장의 초청을 받아 삼성을 방문했다. 이우에 회장은 삼성종합기술원도 찾아 필자와 만났다. 산요는 삼성전자의 역사에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였다. 삼성전자 창업 때부터 이미 ‘삼성산요전기 주식회사’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했던 것이다. TV만 조립해 수출하는 특화된 회사였다. 삼성의 전자 산업 시작에 산요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가 삼성전자 부임 후 처음 배치 받은 곳은 냉장고 사업팀이었다. 난생처음 냉장고를 만드는 회사로서는 당연히 기술 파트너를 필요로 했다. 이때도 역시 많은 기술을 산요로부터 도입했다. 많은 직원들이 직접 산요를 방문해 연수도 받고 기술 자료를 도입해 냉장고 생산을 시작했다.

삼성전자 초기에 기술 전수를 도운 일본의 산요는 이후 삼성전자의 성공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사진은 1971년 삼성산요전기의 흑백TV 공장 모습.


산요와 삼성이 다른 점은

삼성전기라는 부품 회사도 원래는 ‘삼성산요파츠’라는 이름으로 1973년에 설립됐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기업에 기술을 전수하고 사원 연수를 제공해 기업을 육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 바로 이우에 회장이었다.

이우에 회장이 방한한 2003년은 삼성과 산요가 처음 파트너십을 맺고 일한 지 약 30년 정도가 흐른 뒤였다. 그런데 이미 그 당시 삼성전자는 글로벌 정상 기업으로 도약해 있었고 산요는 점점 경영 상황이 어려워져 고전을 면치 못하던 때였다. 이우에 회장으로선 격세지감이 컸을 것이다.

이우에 회장은 ‘삼성의 성장 비결은 무엇이고, 산요는 왜 쇠퇴했는가’를 생각하며 만감이 교차하는 감회를 품은 채 방문했다. 하나의 기업이나 리더가 어떤 꿈을 가지고 경영하는지, 그리고 구성원들의 잠재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리더십·조직문화·전략적 의사결정을 어떻게 하는지를 배우기 위해 삼성을 찾은 것이다. 두 기업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요약하면 리더십과 기술 혁신의 결과다.

산요는 원래 가전으로 시작한 기업이다. 그러다 점차 2차전지 등 부품 분야에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종합 전자회사로 변신하는 데는 실패했다. 마쓰시타는 1980년대 들어 ‘이대로 가면 안 된다’고 판단해 종합 전자회사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고노스케 회장은 “아날로그 시대의 방향으로는 미래가 없다”며 틀을 바꿨다. 시작은 리더를 바꾸는 일이었다.

고노스케 회장은 20여 명의 임원진 가운데 가장 신참인 야마시타를 사장으로 발탁하며 오래된 중역들을 다 내보냈다. 야마시타는 가전 부문에서 에어컨의 글로벌 경쟁력을 이끈 변화의 리더였다. 고노스케는 ‘야마시타가 10년은 사장을 해야 한다. 그래야 체질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전권을 맡겼다. 그러고는 매주 독대하며 경영을 직접 챙겼다. 리더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방향과 목표를 향해 가는지는 기업의 사활에 가장 중요한 요소다. ‘마쓰시타는 어떤 회사가 되고, 그걸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은 이가 바로 고노스케 회장이었다.

야마시타는 1주일 동안 활동한 것을 전부 녹음하고 채록해 고노스케 회장에게 보고했다. 고노스케는 야마시타의 보고를 들으며 어떤 것엔 동의하고 칭찬하고 또 조언하는 등 멘토링을 통해 리더로 키워갔다. 그렇게 3년이 지난 후에야 전권을 믿고 맡겼다. 삼성의 이병철·이건희 회장의 리더십도 같다. 삼성이 어디로 가고, 어떻게 갈 것인지 가장 선두에 서서 치열하게 고민한 이들이 바로 두 회장이다.

안타깝게도 산요에는 그런 방향성이 없었다. 특히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화하는 시점에서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가전산업에서 종합 전자회사로 가는 핵심 역량을 키우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이우에 회장으로 하여금 삼성을 돌아보게 한 계기였다.

당시 산요는 차세대 에너지 사업으로 오랫동안 연료전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2차전지에서는 글로벌 1~2등을 차지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룹 전체의 힘이 약해지니 추진력이 떨어지고 있던 차였다. 20여 년간 축적된 기술을 묻히기에는 너무 아까웠기에 삼성에서 먼저 공동 개발을 제안했다. “30년 전 협력했던 정신으로 함께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이를 기술원과 산요가 공동 협력하는 것으로 계약을 성사시켜 추진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감이 많았다. 결국 얼마 안 돼 산요의 연료전지 부문은 마쓰시타에 인수됐다. 이를 지켜보며 정말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다.



한일 양국이 힘 합쳐야

NEC는 컴퓨터와 통신, 즉 C&C(Computer & Communication) 시대를 연 세계적 기업이다. 삼성도 이들에게 진공관·브라운관 기술을 전수받아 삼성전관을 창립했다. 그 뒤에는 컴퓨터 회사도 합작으로 운영했다. 다른 기업에서 IBM을 쓸 때 삼성SDI만 NEC 컴퓨터를 쓸 정도였다. 양 사의 끈끈한 관계는 삼성·NEC 교류회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오랜 기간 지속됐고 삼성 측 대표를 필자가 맡기도 했다.

양 사의 협력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이 반도체 부문이다. 당시만 해도 반도체 기술의 왕자는 누가 뭐래도 NEC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삼성은 후발 주자였다. 그런데 협력 회의에 가보면 NEC는 나이가 많은 분들이 죽 둘러앉아 있고 삼성은 젊은 연구원들이 대부분이었다. 흡사 스승과 제자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교류회가 거듭될수록 삼성 쪽의 개발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한 사람 한 사람 기술자의 역량을 비교해 보면 NEC가 훨씬 깊은 기술과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제품 개발은 삼성이 빨랐던 것이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흔히 “한국 사람은 협력할 줄 모른다. 모래알 같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엔 일본인보다 오히려 협력을 잘하는 게 한국인이다.

일본은 장인 정신, 탐구 정신이 있어 한 분야에 매우 깊숙이 파고 들어간다. 그 분야에는 깊은 전문 지식을 쌓을 수 있다. 반면 다른 분야에는 관심이 없다. 즉 시너지 창출이 어렵고 융합이 안 되는 것이다. 반면 한국인은 한 분야에는 약하지만 다른 분야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많아 서로의 분야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방향과 목표에 대한 공감대만 형성되면 똘똘 뭉쳐 시너지를 창출하는 게 한국인이다. ‘모래알 같다’는 평은 일이 잘 안 될 때, 후퇴 시, 평화 시의 모습일 때가 많다. 그러나 도전적이고 가슴이 뛰는 높은 목표를 향하면 기존의 어려움은 다 잊고 융합과 시너지를 창출하는 독특한 특성이 있다. 메모리 반도체에서 세계 제일이 되겠다는 목표 아래 똘똘 뭉친 것이 좋은 예다.

한국 사람들의 이런 좋은 특성들을 가장 잘 파악하고 경영에 활용한 기업이 삼성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오늘날 어려워진 건 바로 변화의 리더십을 갖지 못해서가 아닌가 싶다. 앞으로는 중국이 끊임없이 성장해 세계적인 경제 대국이 되는 게 명약관화하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한국만의 힘만으론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힘들다. 한국의 강점과 일본의 강점이 합쳐져 시너지를 창출하도록 한일 협력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지가 굉장히 중요한 화두다. 일본의 전자회사들은 지금 변화를 갈망하고 있다. 이들은 깊은 수준의 기초 기술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은 전문성은 약하지만 글로벌 활동을 위한 에너지가 충만하다.

양국의 원로들이 자리를 함께해 심도 있는 토론을 해야 한다. 여기서 좋은 방향이 도출되면 21세기 글로벌 힘의 균형에서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중국으로서는 일본이나 한국 어느 하나만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꼴이겠지만 일본과 한국이 힘을 합치면 손바닥 위에만 올려놓기는 힘들 것이다.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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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2. 3. 14. 13:25

사람이 곧 혁신이다 40

기업의 혁신과 성장을 이끌 연구 방법론을 배우기 위해선 이를 잘 실천하고 있는 선진 기업을 찾아가 보고 듣고 실천하면 된다. 삼성도 과거 일본의 일류 기업을 배우고 이들과 협력하는 것이 중요한 전략이었다. 소니·도시바·히타치·도요타·캐논·일본전장 등과 같은 기업을 방문하고 실무자 미팅 등을 통해 연구 방법론도 서로 교류해 왔다.

일본의 연구소들은 일본식의 방법론으로 혁신을 추진했다. 미국과는 많이 달랐다. 문화의 차이 때문이다. 우리는 어차피 거의 모든 기술이 일본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구원들 중에는 많은 수가 미국에서 공부한 이들이었다.

‘미국과 일본의 장점, 여기에 한국의 문화를 융합해 우리 것을 만들면 일본을 이길 수 있지 않겠나’하는 데 생각이 미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래서 삼성종합기술원의 연구·개발 방법론은 일본과 서구 방식이 섞여 있었다. 바로 한국 특유의 ‘곰탕·비빔밥론’이다.


일본에서 배운 조직 문화 혁신

우리의 기업·조직 문화에서 제일 부족했던 것 중 하나가 토론 문화다. 과거 세종 때는 집현전에 학사들이 모여 밤낮없이 왕과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새로운 기술, 국가 경영 시스템 등이 주요 안건이었다. 조상들은 이미 600년 전에 가장 성공한 조직 문화 모델을 만들어 활용한 것이다.

특히 ‘경연(經筵)’이 매우 활발했는데, 이는 임금과 관리, 학자가 모여 앉아 학문을 논하고 국정을 토론하는 자리였다. 세종 때 열린 경연의 횟수만 해도 1898회에 이른다. 이런 토론을 통해 국가 전체의 지식 수준이 올라갔다. 전체가 업그레이드되는 효과다. 또 경연을 통해 우수한 인재를 발탁하고 기술자들끼리 융합해 시너지를 낼 수 있었다.

왕이 토론을 중요하게 여기며 이끄니 전국 방방곡곡에 이런 문화가 퍼졌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어느 때부터인가 훌륭한 전통이었던 토론 문화를 잃어버린 채 권위적인 문화로 바뀌었다. 톱 다운의 단순한 문화로 바뀐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개개인의 잠재 역량이 발휘되지 않고 조직 전체의 지혜도 모이지 않는다. 이러니 동기부여가 있을 수 없다.

도요타와 캐논을 견학하고 제일 감탄했던 것이 바로 ‘와글와글 미팅’이다. 과거 일본의 능률협회가 ‘도대체 왜 일본의 생산성이 떨어지는가’를 연구한 적이 있는데, 결론은 토론의 부재였다고 한다. 반면 미국인들은 어려서부터 가정에서도 토론을 벌이는 데 익숙하다. 학교 수업도 역시 토론으로 진행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기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그런데 동양적 사고에서는 나와 다른 얘기를 하는 사람을 내 생각에 반대하고 거부한다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아예 얘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알아도, 몰라도 말 자체를 안 하는 것이다. 토론과 말하기를 좋아하는 미국의 조직 문화에선 서로 뭘 알고 모르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러다 보니 시너지가 창출되는 것이다.

‘이런 문화를 일본도 배우자’고 해서 탄생한 것이 와글와글 미팅이었다. 서로 자유롭게 떠들면서 토론하자는 것이다. 전문 용어로 바꾸면 ‘KI(Knowledge Intensive) 미팅’이다. 구체적인 방법을 보자. 제일 먼저 하는 건 벽에 자기 의견을 붙이고 공유하게 하는 것이다. 말하는 것은 어렵고 쑥스러워도 쓰는 건 거부반응이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토론이 이뤄진다. 삼성기술원에서도 이를 도입했다. 일본에서 KI 미팅을 창시한 분을 초청해 교육도 받았다. 직접 도입해 보니 놀라운 성과가 나타났다. 개발 기간, 시간, 비용이 모두 30% 줄어드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지금은 포스코가 이를 도입해 활용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자동차 강판을 만드는 원동력 가운데 하나다.

열린 마음으로 임하는 토론은 놀라운 성과를 가져오는 원동력이다. 사진은 2002년 삼성종합기술원 휴먼컴퓨터인터페이스 연구팀의 음성인식 로봇 실험 장면.


창의는 자유롭게 떠들 때 나온다

기술원의 조직 문화를 바꾸는 방법론 가운데 다른 하나는 오픈 마인드였다. 이를 위해 모든 연구실을 열린 연구실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그전까지 모든 연구실의 문은 육중한 철제문으로 돼 있었다. 연구실 안에도 높은 칸막이가 쳐 있어 내부 소통마저 어려운 분위기였다.

우선 몇몇 연구실의 문을 투명한 유리로 바꿨다. 처음에는 산만하다 뭐다 해서 반대도 많았다. 하지만 이후 조금씩 분위기가 밝아지고 소통도 잘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왜 우리 연구실은 안 바꿔 주느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인식이란 때로 순식간에 바뀌기도 한다.

소통을 위한 ‘커피 브레이크’도 만들었다. 일할 땐 최대한 집중하고 중간에 적절한 휴식 시간을 챙기자는 의미다. 최대한 안락한 분위기에서 소통할 수 있도록 휴게 공간도 많이 만들었다.

그 이후 일본의 조미료 제조업체인 아지노모토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굉장히 특이하고 인상 깊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연구실은 굉장히 좁게 쓰면서도 복도는 마당처럼 넓었던 것. 복도 옆에는 예쁜 조경과 뛰어난 전망이 갖춰져 있었다. “왜 이렇게 복도가 넓으냐”고 물으니 “창의는 뭘 하자고 해서 나오는 게 아니라 우연히 나온다. 우연은 대화를 통해 나온다. 화장실에 가다가 누군가를 만나 차 한잔을 하거나 담배 한 개비를 피우며 얘기하다가 떠오르는 착상이 바로 창의다. 그런 공간이 넓고 쾌적하고 편리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넓은 복도에 탁자나 컴퓨터 등이 갖춰져 있었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바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든 배려였다.

당시는 회사마다 금연 운동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반도체의 경우 담뱃재는 치명적이어서 회사 울타리 안에선 절대로 못 피웠다. 그런데 반도체 울타리 바로 바깥은 기술원이다. 때마침 반도체와의 협력 강화를 고심할 때였다. 물론 기술원도 건물 안에서는 금연이었다. 하지만 건물 밖에서는 편리하고 안락한 흡연 장소를 만들자고 계획했다. 그러면 반도체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오게 될 것이란 계산에서였다. 실제로 반도체 직원들은 이 공간을 즐겨 찾았다. 봄가을로는 뜰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소통하는 도시락 데이도 만들었다

이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한 연구팀이 몇 년간 열심히 연구한 과제가 있었는데, 막판에 큰 차질과 위기를 맞게 됐다. 더 이상의 아이디어도 고갈된 상태였다. 그전 같으면 포기하고 말았겠지만 이들은 새로운 발상을 실행에 옮겼다. 기술원에 1000명이나 되는 훌륭한 연구원들이 있으니 우리 연구실만이 아니라 1000명의 지혜를 구하자는 것이었다.

“○○연구실을 ○월 ○○일 점심시간에 오픈한다. 방문한 분들께 맛있는 점심과 음료를 제공한다”는 공지를 올렸다. 그리고 연구실 벽에 그동안 진행해 왔던 과제와 연구 실적, 실패 사례 등을 자세히 써 붙여 놓았다. 실제로 연구실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이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40명 정도가 참여해 진지한 토론이 이뤄졌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단 몇 시간 만에 떠오른 아이디어가 몇 년 동안 고심한 것보다 더 뛰어난 해결책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특허를 얻는 등 관련 연구는 성공을 거뒀다. 그 후 열린 미팅은 기술원 안에서 유행이 됐다.

일본은 KI 미팅을 통해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는 동력을 얻었다. 그런데 KI 미팅 같은 방법이야말로 한국인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론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서로 소통하며 창의력을 자극하고 융합과 시너지를 창출하는 문화…. 한국 사람은 예로부터 소통만 잘되면 엄청난 결과를 이뤄내 왔다. 이를 증명하는 이가 바로 세종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소통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문화가 많이 부족한 실정이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출처] 한경 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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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2. 3. 14. 13:22
한 나라 과학 수준은 연구인력이나 예산, 논문, 과학교육 등 다양한 지표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흔히 간과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바로 국민의 과학 수준이다.

북미나 유럽 국가 국민은 과학에 대한 소비 욕구가 높다. 과학전시관에 가보면 자녀들 보호자로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과학관을 찾는 어른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과학과는 거리가 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가, 그들이 가진 과학상식이나 과학에 대한 깊은 관심에 깜짝 놀란 적이 많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꾸준히 과학을 접하고 누리는 그들 모습에서 과학 선진국의 숨겨진 밑거름을 보게 된다. 과학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사랑은 과학이라는 나무를 자라게 하는 토양이다.

두뇌가 좋고 산수를 잘하는 우리 국민의 과학 수준은 어떨까? 문학과 예술처럼 과학을 즐기고 소비하는 사람, 과학이 취미인 사람은 얼마나 될까? 과학이 과학자들 전유물이어서는 과학 선진국이 되기 어렵다. 세금을 내는 국민이 과학의 맛을 누리고 호기심과 지적 욕구를 채울 수 있어야 막대한 예산을 쓰는 국가의 과학정책도 설득력을 갖게 되지 않을까?

대중 과학 발전을 가로막는 두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성인을 위한 과학 콘텐츠가 없다는 점이다. 대학생과 함께 과학전시관을 방문하면 많이들 실망한다. 대부분 전시물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대중 과학서를 봐도 그렇다. 다른 분야에 비해 도서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고 그나마 외국 도서 번역물이 주종을 이룬다. 중ㆍ고생만 되어도 대중 과학서 독자층은 과학자를 꿈꾸는 몇몇 아이들로 한정되어 버린다.

과학문화라는 말이 유행이다. 과학을 가지고 대중에게 다가가는 노력은 고무적이지만 그 대상이 주로 초ㆍ중ㆍ고 학생들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을까? 성인들이 과학을 접할 기회, 어른을 위한 과학 콘텐츠는 많지 않다. 인터넷 등 매체를 통해 과학정보가 다채로워지고 접근성이 높아지고 있지만 어른들을 위한 과학 콘텐츠는 여전히 부족하다. 소비할 과학 콘텐츠가 없어서 과학에 관심이 없어지는 것인지, 소비층이 없어서 과학 콘텐츠가 생산되지 않는 것인지를 따지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학교 졸업과 동시에 과학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에 대한 지적 욕구는 누구에게나 잠재해 있다는 말이다. 누구나 쉽게 과학을 접하고 누릴 수 있도록 과학 대중화를 위한 다양하고 체계적인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

둘째, 과학 대중화를 책임질 전문인력이 부족하다. 이해하기 어려운 외국 기사 번역물이 과학뉴스 중 다수를 차지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내용을 이해하고 쓴 것인지 의문이 드는 오류 투성이인 과학기사도 부끄럽다. 주요 신문사나 방송국에서 전문적으로 과학을 다루는 과학 전문기자는 손에 꼽힐 만큼 적다. 분야별로 박사학위를 가진 과학기자들이 포진하고 있는 세계적인 대중매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과학저널리즘에 대한 이해와 투자가 절실하다.

딱딱한 과학을 대중에게 던져주면 아무도 먹지 않는다. 대중 입맛에 맞으면서도 동시에 영양이 풍부한 좋은 먹을거리로 과학을 요리하는 작업은 전문성을 요구한다. 과학을 쉽게 풀어내고 다양한 문화 형태로 제공하는 과학 대중화 작업을 과학자들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 과학 전공자들을 과학 언론인, 작가, 과학문화가로 키우는 장기적 안목과 정책이 필요하다. 대중 과학 분야 종사자들이 전문성을 기를 수 있도록 교육과 훈련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과학자들도 소통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대중에게 다가서야 한다.

과학 세계는 경이롭다. 우주와 생명의 신비를 봄직하고 먹음직한 과학 콘텐츠로 제공하여 누구나 향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과학을 소수의 전유물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


[우종학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출처]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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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2. 3. 5. 17:09

사람이 곧 혁신이다 39


함께 연구하며 시너지를 내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열린 마음이다. 다른 이의 주장이나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자기 것을 열어서 보여주고 함께하는 소통과 통합의 리더십 그리고 조직 문화가 굉장히 중요하다. 이런 문화가 없는 삼성종합기술원을 어떻게 이끌고 나갈 것인지가 기술원 부임 후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펄떡이는 물고기’론이다. 미국 시애틀의 조그만 어시장에 자리 잡은 생선 가게의 얘기다.

이 생선 가게는 일본인 2세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 즉 2세 경영자가 부임한 이후 리더십 문제가 불거지며 침체되기만 했다. 아버지 대부터 일했던 좋은 직원들이 떠나기 시작하자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가게는 점점 몰락의 길로 내려가고 사장은 사장대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뭔가를 자꾸 강요하게만 됐다. 종업원들의 반발과 저항은 당연했다.

어느 날 이를 지켜본 사장의 누이가 “좋은 컨설턴트를 소개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잠재 역량을 발휘하게 하고 신바람 나게 시너지를 내는 조직 문화 없이는 망할 수밖에 없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사장이 시키는 대로 하라. 왜 하지 않느냐’고 다그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모두의 뜻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야기를 들은 사장도 이를 받아들였다.

사장은 모든 직원을 한자리에 모은 후 저녁을 함께하면서 “도대체 어떤 가게가 돼야 신바람이 나겠느나”며 직원들의 의견을 들었다. 처음으로 직원들과 함께 상의하고 서로 의견을 내는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저녁밥을 먹는 가운데 수많은 얘기가 나왔다. 그중 하나가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생선 가게가 되자”는 아이디어였다.



가장 유명한 생선 가게 만들기

공감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구체적인 액션이 이어져야 했다. 이것 역시 직원들과 함께 상의했다. 결론은 ‘직원들 각자가 생각한 가장 유명한 생선 가게가 되기 위한 방법을 실천하자’는 것이었다. 처음 시작된 건 손님에게 ‘아주 큰소리로 인사하기’였다. 이어 팔린 고기를 앞에서 뒤로 던지며 “○○에서 ○○로 대구 한 마리 갑니다. 오징어 다섯 마리 갑니다”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말로 하면 ‘평양에서 대구 갑니다’하는 식이다.

큰소리로 웃으며 일하자 일 자체가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그저 일에 불과했던 생선 주고받기가 이후로는 마치 캐치볼을 하듯이 재미있어졌다. 공놀이 하듯 생선을 종이봉투에 담고 춤추듯, 놀이하듯 즐겁게 일하는 생선 가게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가게 앞에 구경꾼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장사가 잘됐다.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봉투에 예쁜 생선도 나눠주고 맛있는 간식도 주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니 엄마도 가게를 찾는 횟수가 늘게 됐다. 그렇게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내며 즐거운 일터를 만들어 나갔다. 결과는 어땠을까. 직원 전부가 주인이 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비린내 가득하고 짜증만 나는 일이 어느새 세상 무엇보다 즐겁고 재미있는 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가게로 걸려왔다. 시애틀에 살던 어린아이가 미네소타로 이사해 큰 병원에 입원했는데, 아이가 “생선 가게 아저씨들이 보고 싶다”고 조른다는 사연이었다. 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직원들이 위문 공연을 제안했다. 값비싼 항공료는 사장이 내줬다. 생선 대신 물고기 인형을 준비한 직원들은 미네소타의 병원으로 날아가 가게 풍경을 그대로 재연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지역 방송국과 신문사가 찾아와 취재했고 결국 전국 방송으로까지 확대됐다. 시애틀의 재미있는 생선 가게가 하루아침에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생선 가게가 된 것이다.

삼성종합기술원은 삼성그룹 전체 연구·개발의 플랫폼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사진은 2003년 중국과학원과 포괄적 연구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있는 필자의 모습.


기술원 사람들의 변화

다시 기술원 얘기로 돌아와 보자. 연구원들은 자신만의 연구에 깊이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다른 기술에 별 관심이 없고 즐겁게 일한다는 개념도 부족하다. 이를 바꾸기 위해 ‘펄떡이는 물고기’ 책을 사서 읽게 하고 토론도 가졌다. 그러자 책을 읽고 감명 받은 ‘청년중역회’ 각 위원들이 해외 연수 계획을 짜 왔다. “시애틀에 들렀다가 오겠다”는 것이었다. 책을 읽고 토론만 하게 내버려뒀더니 직원들 스스로 변화를 결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청년중역회는 각 조직의 대표자로 이뤄져 있다. 이들 위원들이 자신이 속한 조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것 역시 자발적인 변화였다. 그중 제일 먼저 변한 곳이 ‘분석센터(AE)’다. 분석센터는 시료를 받아 성분을 분석해 결과를 통보해 주는 게 업무다. 그러다 보니 ‘남의 것만 처리해 주는 하청 업체’라는 인식이 다분했다. 스스로 목표를 세워 연구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가치가 떨어지고 동기부여도 힘든 대표적인 부서였다.

그런데 이들이 펄떡이는 물고기 운동을 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노벨상 수상자를 보니 분석실 출신이 많더라. 단순한 분석이라고 여기면 재미없지만 다양한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과제를 갖고 오니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나. 연구한다는 마인드로 깊이 있게 접근하자.” 이런 정신으로 연구에 임하니 분석 성과가 좋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프로세스도 개선됐다. 협력사와의 관계도 좋아지고 점점 신바람 나는 조직으로 변해갔다. 연구원들 스스로 ‘대한민국의 노벨상은 여기서 나온다’는 표어까지 써 붙여 놓을 정도였다.

통계를 내보니 물고기 운동 전에는 분석 의뢰를 받아 결과가 나오기까지 평균 한 달이 걸렸다. 그런데 운동 후에는 채 1년이 안 돼 불과 3일로 줄었다. 관계사가 좋아하는 건 당연했다. 관계사마다 서로 더 좋은 설비를 분석센터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기까지 했다. 일도 3배까지 늘고 관계사에서 칭찬이 자자해졌다.

분석센터의 변화는 다른 부서로까지 이어졌다. 슈퍼컴퓨터를 운용하는 CSE(Computer Simulation Engineering)센터였다. 센터는 5개 그룹, 50명의 전문가로 이뤄져 있었다. 하지만 한국 최고의 슈퍼컴퓨터를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동률과 성과가 점점 떨어지기만 했다. 연구 성과가 수준에 못 미치니 관계사도 외면하기 일쑤였다. 왜 그랬을까.

문제를 받으면 5개 팀이 힘을 모아야 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한 팀에서만 해결해 제대로 된 답이 아닌 것을 내놓았던 것이다. 자연히 결과에 대한 불평이 쏟아졌고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비난하기에 바빴다.

급기야 젊은 연구원들이 모여 “우리도 바꿔보자”고 나섰다. 기술 융합을 위해 자리부터 바꿨다. 한 팀에서 한 명씩 뽑아 5개 팀을 새로 만든 것이다. 이들이 매일 점심도 같이 먹고 회식도 같이하고, 심지어 영화도 같이 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제가 주어지면 5명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비로소 정답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과제를 의뢰했던 관계사는 기가 막힌 답을 보며 점점 의뢰 일감을 늘렸다. 그러자 얼마 되지 않아 컴퓨터 가동률이 100%에 이르렀고 설비를 늘려달라는 말까지 나왔다. 업무량도 3배까지 늘어났다. 연구 인력이 꽉 차 관계사 사람들까지 파견을 나올 정도가 됐다. 어둡고 침울하기만 했던 CSE센터는 항상 싱글벙글한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간으로 변화했다.

자신의 일을 즐기는 문화, 이것이 바로 펄떡이는 물고기 이론이다. 조직 문화가 변하니 기술원의 성과가 높아진 것은 당연했다. 한국인은 역량이 뛰어나고 머리도 좋아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해야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아직은 조직 문화와 리더십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경영자들이 많지 않다.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커가는 결정적 요소가 바로 조직 문화인데 말이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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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2. 3. 5. 16:34

사람이 곧 혁신이다 38


필자가 삼성종합기술원에서 근무한 기간은 1999년 1월에서 2003년 1월까지로 만 5년간이다.
사실 기술원은 너도나도 가고 싶어 하는 그런 사업장은 아니다. 대부분의 최고경영자(CEO)들이 현장을 선호하지 연구소 책임자로 가는 건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곳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그릇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전까지 삼성 안만 바라보던 내부 지향적 사고가 대학과 수많은 연구소의 전문가들과 교류하며 확대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또 국가의 기술 정책을 만드는 과정에도 참여하는 등 활동 범위가 굉장히 넓어졌다. 개인적으로 돌아보면 경영자(CEO)로서의 인생과 이후 기술 경영인으로서의 삶으로 나눌 수 있을 정도다.

세계 최초의 다연장 로켓포인 신기전. 세종대왕대에 세계에서 최초로 발명된 로켓이다. 이후의 로켓은 450년이 지난 뒤에나 등장했다.


기술 경영인으로서의 새로운 삶

기술원장 재직을 통해 운명적인 만남도 가지게 됐다. 바로 ‘세종대왕’과의 만남이다. 세종을 통해 기술 경영인의 삶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세종과의 만남은 성신여대 총장을 지낸 전상운 박사의 ‘한국 과학기술사’라는 책을 우연히 접하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나중에 전 박사는 ‘한국과학사의 새로운 이해’라는 제목의 책을 다시 썼다. 이 책 제1장 3절을 보면 ‘세종시대 과학기술의 새로운 조명’이라는 챕터가 나오고 “이 연구는 삼성전자 기획 연구 과제로 이뤄진 것이다. 세종대(代)의 과학기술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삼성전관 손욱 사장의 지원이 컸다”는 구절도 나온다.

전 박사의 책을 접한 필자는 ‘우리나라에도 이런 창조적 혁신의 시대가 있었구나’하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대에 이뤄진 과학기술의 혁신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훈민정음·자격루·신기전 등이 책 속에 자세히 소개돼 있었다. ‘책을 쓴 저자라면 이렇게 뛰어난 과학기술과 세종의 방법론에 대해 알지 않겠나’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이를 잘만 배울 수 있다면 우리도 창조적 혁신을 할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전 박사를 직접 만나 부탁했다. 도대체 어떤 리더십을 발휘했기에 세계적인 창조 기술을 이끈 시스템과 문화를 만들 수 있었는지 물었다. 그러면서 “과학기술의 내용은 이미 널리 알려졌으니 리더십이라는 측면에서 한 번 봐 달라”고 부탁했다. 전 박사도 이에 흔쾌히 동의했다. “연구를 진행하고 싶었지만 지원이 없어 손을 놓고 있었는데, 삼성이 도와주면 해보겠다”는 답이었다.

얼마 후 ‘세종의 리더십과 방법론’을 정리한 내용을 논문으로 받았다. 논문을 다 읽은 필자는 ‘이대로만 하면 바꿀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다. 하지만 당시에는 삼성SDI의 프로세스 혁신 작업에 쫓겨 연구·개발(R&D) 과정에서 제대로 활용하지는 못했다. 세종의 리더십을 본격적으로 도입해 활용한 건 기술원에 가서였다.

역시 전 박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연구원들의 긍지와 자긍심을 자극하려면 우리 역사에 이런 시대가 있었다는 걸 얘기해야 한다. 그런 기술들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40가지 기술이다. 지금도 삼성기술원 벽에 붙어 있다. 예를 들어 ‘신기전’은 서양식으로 하면 로켓에 해당한다. 로켓은 신기전 이후 450년이 지나서야 다른 나라에서 등장했다. 측우기도 200년이나 앞선 기술이고 금속활자도 마찬가지다. 훈민정음·자격루 등 세계 최초의 혁신 기술이 모두 세종대에 등장한 것이다.

이런 세계적인 기술들을 벽에 붙여놓고 기술원 연구원들로 하여금 “우리도 저런 걸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회의실의 이름도 ‘장영실방’ 등으로 바꿨고 세종대의 천문기기도 진열했다.

필자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한국형 리더십’ 연구도 세종의 리더십 연구에서 출발한다. 한국형 리더십 연구원을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일하는 것도 알고 보면 세종 덕택인 셈이다. 2007년부터 포스코의 후원으로 한국형 리더십 연구회를 매월 한 번씩 열고 연구 활동을 벌이고 있다. 매년 개최되는 심포지엄도 마찬가지다. 세종의 기술 개발 방식을 연구하다가 한국형 MOT(Management Of Technology) 개념이 나오는 등 모든 연구 활동에 세종이 연관돼 있다. 세종과의 만남을 운명적이라고 여기는 이유다.

세종의 꿈은 ‘품격 있는 나라’였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세종은 ‘왕이라는 건 백성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여겼다. 세종이 즉위해 제일 먼저 한 얘기는 “나는 잘 모르니 함께 의논해서 하자”는 말이었다. 즉 토론 문화다. 나라의 근본인 백성의 행복을 위해 모두 함께 고민하고 연구하고 실천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이 세종의 가장 큰 비전이고 목표였다.



세종에게서 배운 한국형 리더십

그렇다면 세종이 생각한 행복한 나라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모든 백성이 지혜로워야 한다. 그러려면 책을 많이 읽게 해야 한다. 즉 교육이다. 백성을 교육시킬 책을 출판하기 위해선 필사나 목판만으론 부족했다. 세종은 이를 위해 하루에 40벌씩 인쇄할 수 있는 고려의 금속활자를 계승해 궁궐 안에 주자소를 지었다. 왕 자신이 수시로 드나들며 이전보다 두 배나 많은 책을 찍어냈다. 특히 모든 백성들의 교과서인 ‘소학’은 1만 권이나 펴냈다고 한다. 당시 약 21만 가구가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오늘날의 기준으로 100만 권을 찍어낸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자연히 나라 안에 책이 넘쳤다. 한자가 어려운 백성들을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기까지 했다.

관료나 학자들과는 끊임없이 토론했다. 재위 32년 동안 경연 횟수만 1800회가 넘는다. 토론을 거듭하면 전체 관료·학자들의 지식수준이 올라가고 유능한 인재도 발탁할 수 있다. 서로 교류해 문제를 해결하니 시너지가 창출되는 건 당연했다.

세종이 꿈꾼 두 번째는 ‘행복한 사회’다. 이를 표현한 게 ‘생생지락(生生之樂)’이다. 첫 번째 생은 ‘생활’을 가리킨다. 두 번째 생은 ‘생업’ 즉, 직업을 뜻한다. 풀어 쓰면 ‘생활과 일의 즐거움’이다. 모든 이들이 자기 삶과 일을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삶이 바로 생생지락이다. 백성들이 생업을 즐기게 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개발하고 교육시키고 어려움을 해결해 줘야 한다. 세종은 수시로 백성을 만나 얘기를 듣는 등 소통을 중시했다. 이런 방식을 ‘삼통’이라고 하는데, 뜻과 말과 마음이 통한다는 의미다.

뜻과 말을 세워 일방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고 백성과 관료의 마음이 통해야 했다. 상징적인 인물이 좌의정 허조다. 그는 분석력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왕의 의견이라도 ‘안 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반대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도 세종은 허조를 무척 아꼈다고 한다. 반대하는 내용을 개선하면 성공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소통은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요즘 들어 소통의 부재로 사회적 갈등이 많다고 한다. 소통에 따른 갈등 비용이 국내총생산(GDP)의 27%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마지막은 ‘존경받는 국가’였다. 이는 외부로부터의 평가다. 세종 시대는 뛰어난 과학기술력이 있었고 정신문화도 꽃피웠다. 중국의 사신들도 “중국에 있다가 조선 땅에 들어오면 모든 사람들이 질서 있고 깨끗하고 예의바르다”며 세종을 칭찬하고 부러워했다. 여기에 막강한 국방력까지 갖춰 여진족을 몰아내고 압록강 국경을 확립했다. 왜구들이 단 한 번도 침범하지 못했던 때도 바로 세종대다.

농경 기술과 문화를 일본에 전수해 일본의 농업 생산성이 400% 향상되기도 했다. 곳간마다 양식이 넘쳐 남는 식량을 왜구의 근거지에 공급한 결과였다. 힘만 있는 게 아니라 나눌 줄도 알았던 것이다. 이런 역사를 알게 되면 세종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세종대야말로 우리 역사를 통해 가장 품격 있는 나라를 일군 시기였다. 백성은 지혜롭고 사회는 행복하고 존경도 받는 나라. 기업도 마찬가지다. 행복한 일터, 사랑받는 기업이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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