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未來2014. 1. 4. 11:00

중국 저술가 리쭝우(李宗吾·1879~1944)는 사람의 표정과 심성을 분석해 후흑학(厚黑學)이란 책을 썼습니다. 후흑은 면후심흑(面厚心黑)의 줄임말입니다. '낯가죽이 두껍고, 마음이 음흉하다'는 뜻이지요. 후흑의 반대는 박백(薄白)입니다. '감정 변화가 표정에 드러나고, 마음이 순박함'을 이릅니다. 리쭝우는 낯 두께의 후박(厚薄)과 마음의 흑백(黑白) 조합에 따라 사람을 4개 유형으로 분류했습니다.

최근 출간된 '초한지 후흑학'(신동준 지음·을유문화사)은 초한지(楚漢志)에 나오는 유방·항우·한신·범증을 예로 들어 후흑박백 처세의 성패를 설명합니다. 초(楚)의 항우는 '박백'형 인간입니다. 명문가 출신 엘리트로 자존심이 강해 포용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마음 또한 단순해 유방의 계략에 말려들었다는 진단입니다.

'초한지 후흑학'에 언급된 표정과 성격.

한신은 불량배의 가랑이 밑을 기어서 통과하고도 모욕을 잘 견뎠으니 낯이 두꺼웠지요. 하지만 마음이 깨끗해 유방에 대한 신의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후백'입니다. 한신은 제나라 왕에 오른 뒤 "천하를 초·한·제 삼국으로 정립(鼎立)하자"는 측근의 조언을 물리치며 유방과의 의리를 지켰지만 훗날 유방에게 목숨을 잃습니다.


항우를 보좌한 범증은 낯이 얇고 마음이 음흉한 '박흑'입니다. 갖은 책략으로 유방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으나 모욕을 참지 못했습니다. 범증은 유방의 꾐에 빠진 항우가 자신을 의심하자 버럭 화를 내며 주군 곁을 떠났습니다.

책은 유방이 최후의 승자가 된 비결로 '후흑'을 꼽습니다. "군신과 부자, 형제, 부부, 벗의 오륜은 물론 예의염치를 깨끗이 버렸기에 군웅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고 분석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해당하십니까. 저는 표정에 좋고 싫음을 숨기지 못하는 편입니다. 새해 첫날 책을 읽으며 그런 저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듭니다. 후흑만 판치는 세상은 얼마나 살기 피곤할까. 회사가 후흑을 내세워 기업 공개를 피하면 투자자 보호는 어찌 되는가. 국가권력의 획득과 유지를 투명한 민주 절차 대신 온갖 모략에 기대야 한다면 또 어떻게 될까. 비록 승리하더라도 그렇게 되기까지 개인·기업·국가의 역량 낭비가 엄청날 것입니다. 그러니 '박백'의 솔직함도 가벼이 버릴 수 없습니다. 어느 책에나 해당하겠지만 후흑의 가치에도 취사선택하는 비판적 독서가 필요해 보입니다.

[출처] 프리미엄조선 김태운의 북&토크

Posted by 프로처럼
공부/方法2013. 4. 6. 14:30

MAC 에서 NTFS 쓰기

외장하드를 거의 안쓰는 편이데 근래 영화를 다운 받다 보니 외장하드 사용 빈도가 늘어났다.
문제는 Mac 에서 NTFS가 읽기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FAT에서는 쓰기/읽기가 다 가능하지만 단일 화일 4G 이상은 지원이 안된다.

OS x 10.7 Lion 이후 NTFS-3G가 작동을 안하게 되었다.

 간단한 해법은 

1. MacFUSE 64 bit 설치 (다운로드 : MacFUSE-Tuxera-2.2.dmg) 
2. NTFS-3G 설치 (ntfs-3g-2010.10.2-macosx.dmg or  Here)
3. "15초... " 에러 메시지 후 완료 
4.  끝

3번째 스텝의 
에러만 나오면 해결 됩니다.

상세한 내용을 원하시는 분은 여기로 (영문입니다. ㅡㅡ;)

그냥 가지 마시고 리셋 하세영 ㅋㅋ


Posted by 프로처럼
공부/未來2012. 8. 4. 15:16

국내 '정의론' 토대 세운 황경식 교수, 정의와 덕을 말하다
한국에서 샌델 '정의' 열풍은 열망 표출 아닌 마케팅 결과
알고도 정의 행하지 않는 건 덕을 익히지 않았기 때문
부모 자식 서로 지나치게 의존, 부모 교육해야 퇴행 막는다

"샌델은 내가 1980년 하버드대에 있을 때 처음 만나 교분을 이어왔다. 5년 전 초청 강연도 시켰다. 그때도 같은 정의를 얘기했지만 미풍도 없었다. 그 뒤 책 한 권으로 그만한 붐(boom)이 일었다는 건 연구 대상이다. 정의에 대한 열망이 컸고 책을 통해 그게 해소됐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샌델은 명문 하버드대의 명강사다. '명'자가 두 번 들어간다. 한국인의 명품 선호가 작동한 건 아닌가. 출판 기획 마케팅에 춤추는 얄팍한 지적 풍토가 아쉽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이전에도 한국에는 '정의론'이 있었다. 황경식(65) 서울대 교수의 거의 평생에 걸친 연구 주제가 '정의론'이었다. 그 논리를 발전시킨 끝에 '덕(德·virtue)의 윤리'에 가 닿았다. 40년이란 긴 여정이었다. 국내 도덕철학계 원로인 황 교수는 올해 정년을 맞는다.

◇한국 정의론의 시발

―오랫동안 연구한 정의론을 요약한다면.

"인생의 경주는 근원적으로 불평등한 것이다. 인생의 불평등한 초기 조건을 두고 우리가 인간적으로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정의를 문제 삼을 수 있다. 경쟁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것이 정의의 중요한 요구 중 한 가지다. 하지만 애초부터 경쟁력이 없거나 취약한 사람도 있다. 불리한 천운을 타고난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도 정의의 또 다른 요구다. 이 때문에 최소 수혜자에 대한 결과적 보상이 필요한 것이다."

―정의론에서 '덕윤리'로 옮아간 것은 왜, 언제인가.

"롤스의 정의론을 1977년 완역한 후 한국 사회에 합당한 정의가 무엇인지 공부해왔다. 정의가 무엇인지 아는 것도 어렵지만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몰라서 정의가 없는 게 아니라 아는 만큼이라도 실천이 안 돼서 사회가 불의한 것 아니냐, 알아도 행하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고민하게 됐다. 2000년대 들어와 동서 덕윤리 비교 연구에 관심을 쏟았다. 본래 소규모 전통 사회는 덕윤리 중심이었다. 근대로 오면서 배경이 다양한 사람이 이합집산하는 시민사회가 되면서 공동 규범으로서 의무가 부각됐다. 도덕이 최소화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최소한의 시민 윤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반성에 따라 국제적으로도 전통 덕윤리에 다시 관심이 쏠리고 있다."

 황경식 교수는 젊어서‘정의론’에 빠졌다가‘덕의 윤리’로 회귀했다.“ 대학시절 사서삼경을 읽던 중‘덕’자에 끌려 호를‘수덕(修德)’이라 지은 적이 있다. 예고된 행로였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이번에 '덕윤리의 현대적 의의'(아카넷)를 냈다. 덕윤리란 무엇인가.

"옳은 것을 알고도 의지의 나약이나 감정의 갈등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도덕적 실패'라 한다. 정의를 실행하는 데는 인지적 각성 외에도 강한 의지와 균형 잡힌 감정이 필요하다. 부단한 연습과 훈련을 통해 습관화해야 한다.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릴 적 습관을 대단히 강조했다. 동양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 덕 수양이 평생 계속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논어의 서두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이다. 반복해서 자기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영을 아는 것과 익혀서 자기 걸로 만들어 물에서 노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왜 굳이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인간다운 존재가 되는 기술이라고 했다. 피리를 연습해야 잘 불듯, 사람도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인간적 기술을 연마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도덕적으로 살면서 행복에 이르기 위한 기술이다. 도덕적으로 살면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지 억지스러운 도덕적 삶은 높게 보지 않았다."

―현대사회가 사람을 도덕적으로 살기 어렵게 만드나.

"현대사회의 문제는 '익면성(匿面性·faceless)'이다. 정보화 사회는 그것이 극대화된 사회다. 익면성이 갖는 긍정적 해방적 기능을 최대한 살리되 부정적 범죄적 기능을 최대한 견제하는 것이 정보사회 윤리의 과제다."

황 교수는 국내 도덕 교육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무엇보다 지금 식의 가정교육은 문제다. 한국인은 너무 가족 의존적이다. 부모는 자식만 알고 애들은 자기 부모만 안다. 두 쪽 다 사회화가 안 돼 있다. 부모들이 흔히 아이들 기죽일까 걱정하는데 기(氣)란 무서운 것이다. 원색적인 기가 살면 그 기는 부모한테까지 간다. 이(理)로 순화된 기(氣)가 중요하다. 가정교육 이전에 부모 교육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부모 교육 안 된 상태에서 가정교육은 더 퇴행을 낳기도 한다. 부모나 자식이나 자율적 인격체로 독립해야 한다."

―요즘 경제 민주화, 복지론이 무성하다.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비도덕적인 것 아닌가.

"자본주의는 인류 다수의 물질적 환경을 개선하는 데 엄청난 기여를 했다. 단순히 비도덕적이라고 폄하할 게 아니다. 다만 부의 불공정한 분배는 걱정해야 한다. 공정이 공평에 의해 보완될 때 정의는 충족된다. 롤스가 말한 '최소 수혜자 최우선 배려' 원칙에도, 사회적 천부적 운도 공유 자산으로 봐야 한다는 도덕관, 박애가 깔려있다."

Posted by 프로처럼
공부/革新2012. 5. 5. 14:06

[Cover Story] 의료 시스템 혁신에 나선 세계최고 병원 '메이요 클리닉'
환자중심 진료·전문의 과정·협진 도입 등100년간 현대 의료 시스템 앞장서 만들어
세계서 환자 몰려드는데 또 혁신센터 설립 디자이너 10여명이 핵심 인력으로 주도

▲ 일러스트=정인성 기자
모든 산업에 걸쳐 가장 까다롭고 힘든 소비자는 누구일까? 아마 정답은 병원을 찾는 환자일 것이다. 자동차나 휴대전화 같은 제품이나 호텔·금융 등 서비스 상품은 개인의 기호(嗜好)에 따라 선택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하지만 중병(重病)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은 치료를 받기 위해 자기 생명을 걸고 그만큼 절박하다. 이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우면서 가장 특별하고 섬세한 서비스를 원하는 고객이다.

올해 88세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국왕은 2008년 말 가족 수십 명과 함께 보잉 747 전용기를 타고 미국 미네소타주에 있는 로체스터시를 찾았다. 압둘라 왕 일행은 한달여 동안 시내 호텔에 머물면서 100만달러가 넘는 돈을 썼다. 로체스터는 인구가 10만명 남짓한 작은 도시로,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드넓은 목초지가 펼쳐져 있고 겨울이면 섭씨 영하 20도를 밑도는 혹한과 수십㎝씩 쌓이는 폭설로 외출조차 힘들다. 그런데도 유럽·중동의 왕족과 부호(富豪), 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이곳을 자기 집 안방처럼 찾아온다. 지리적 불리함이란 한계에 아랑곳없이 '글로벌 의료 성지(聖地)'로 우뚝 선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이 있기 때문이다.

연인원 2000만명이 넘는 환자를 매년 맞는 메이요는 세계에서 환자 만족도가 가장 높은 병원으로 첫손 꼽힌다. 제럴드 포드, 로널드 레이건, 조지 부시 등 전직 미국 대통령과 어니스트 헤밍웨이, 아놀드 파머 같은 유명인도 이 병원에서 최고급 진료와 치료를 받았다.

메이요 클리닉이 갖는 명성의 원천은 1889년 설립 후 100년 넘게 일관되게 '환자 중심' 진료를 실천해 온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다 20세기 초 여러 분야의 의사가 팀을 이뤄 한 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협진(協診)' 개념을 세계 최초로 도입했다. 진료 환자 수에 관계없이 의사에게 같은 급여를 주는 제도도 100여년 전 도입했다. 성과급에 신경 쓰지 말고 메이요를 찾는 모든 환자에게 최선의 진료를 제공하겠다는 취지였다.

▲ 세계적으로 의사와 환자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병원으로 꼽히는 미국 메이요 클리닉은 지난 50여년 동안 발전하지 않은 의료 서비스 체계를 환자 중심 철학에 따라 바꾸겠다는 목표로 혁신센터(CFI)를 만들었다. CFI를 이끄는 두 핵심 인물인 니컬러스 라루소(오른쪽) 박사와 바버라 스푸리어 이사가 의료 서비스 혁신으로 새롭게 미래를 밝히겠다는 의미에서 전구(電球)를 들고 있다 / 메이요 클리닉 제공
세계 최초로 혈액은행 개설 및 전문의 과정 도입, 미국 최초로 CT(컴퓨터 단층 촬영)를 진단에 활용 등…. 메이요 클리닉의 최초 기록은 줄을 잇는다. 그래서 20세기 세계 의료산업 '혁신'의 상징으로도 불린다.

'US 뉴스 & 월드 리포트'지(誌)가 미국 5000여개 병원을 대상으로 한 '최고 병원'(Best Hospitals) 랭킹에서 최근 수십 년 동안 존스홉킨스병원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양대(兩大) 병원으로 뽑혔고 소화기내과·산부인과·신장내과 부문은 단연 미국 1등으로 평가받는다. 올해 초 포천지(誌)가 발표한 '일하고 싶은 100대 기업'에 9년 연속 선정됐다.

이처럼 명실상부한 '글로벌 넘버 원(one)'인 메이요 클리닉이 요즘 미국 경영학계와 의료계에서 최고 혁신 스타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지난 100여년 동안 사실상 고정돼 있던 의료 서비스 체계를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이란 경영 기법을 적용해 21세기 최첨단 모델로 바꾸겠다고 선언하고 이를 실행하고 있어서다. 하버드대 등 미국 유명 경영대학원들은 물론 세계 의료계가 메이요 클리닉의 혁신 사례를 집중 탐구하려는 이유이다.

메이요 클리닉이 추진하는 '파괴적 혁신'의 심장부는 2008년 7월 출범한 혁신센터(Center for Innovation·약칭 CFI)다. CFI는 모든 의료 서비스 체계를 메이요의 '환자 중심' 철학에 맞춰 개선하기 위한 내부 싱크탱크(연구소) 역할을 한다. CFI에서는 특이하게도 10명이 넘는 디자이너가 핵심 인력으로 근무하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세계에서 최고·최상급 환자들이 몰려드는 메이요 클리닉은 왜 서비스 혁신에 나선 걸까? 병원 서비스 혁신과 디자인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Weekly BIZ는 로체스터를 찾아가 '디자인 싱킹'(design thinking·디자인적 사고)으로 전면적인 의료 서비스 혁신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취재했다.

미국 미네소타주 최대 도시인 미니애폴리스에서 자동차로 1시간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 지난달 23일 오전 이 병원의 1층 로비에 들어서자 고급 호텔에 온 듯한 상쾌함이 밀려왔다. 널찍한 로비에는 온통 대리석이 깔려 있고, 천장에는 샹들리에 같은 화려한 전등이 달려 있다. 로비에 배치된 의자는 모두 쿠션이 달린 편안한 의자다. 특히 기다란 복도 모퉁이에는 후안 미로와 앤디 워홀 등 세계적 미술가의 그림과 조각이 전시돼 있다. 유명한 작품을 보려는 방문객을 대상으로 가이드 투어도 진행되고 있다.

메이요 클리닉이 내부 장식에 엄청난 돈을 투자한 목적은 사세(社勢) 과시용이 아니다. "메이요에선 병원 로비를 들어서는 순간부터 진료가 시작된다"는 '환자 중심' 철학에 따라 환자가 최대한 안락한 느낌이 들도록 하려는 '특별 배려'인 것이다.

환자의 경험을 중시하는 메이요의 '환자 중심 철학'은 유별나다. 의사는 초진(初診) 환자를 최소 45분 동안 진료한다. 환자나 보호자와 충분히 대화해야만 제대로 진단을 내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또 모든 의사는 돌보던 환자가 퇴원하면 72시간 이내에 환자를 보낸 다른 병원 의사에게 진료 경과와 회복 상태에 대해 연락을 해줘야 한다.

연락을 하지 않으면 병원 경영진으로부터 경고 이메일을 받는다. 메이요 클리닉의 오재건 박사(심장내과)는 "여기서 일하는 모든 사람은 환자 중심주의를 실천하도록 끊임없이 교육받는다"며 "환경미화원도 '환자의 회복에 도움이 되려면 언제 어디를 깨끗이 정리해야 할까' 고민하는 것이 메이요의 문화"라고 말했다.

메이요 클리닉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병원이 없던 로체스터에서 북군(北軍) 군의관으로 근무한 윌리엄 메이요가 1889년 의사인 두 아들과 함께 세웠다. 메이요 부자(父子)는 설립 초기 외부 의사에게 수술 장면을 처음으로 공개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의료 발전을 위해 메이요가 쌓아온 수술 노하우를 외부와 공유하기 위함이었다. 메이요는 '환자 중심 철학'과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열린 혁신)'으로 세계에서 환자와 의사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병원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메이요가 2008년 7월 세운 혁신센터(CFI)도 '환자 중심'과 '열린 혁신'을 근간으로 한다. 20세기에 의료 기술과 제도 혁신을 주도한 메이요 클리닉은 21세기에는 의료 서비스 혁신을 선도한다는 청사진을 갖고 있다.

Weekly BIZ는 CFI를 이끄는 두 핵심 인물인 니컬러스 라루소(LaRusso) 이사와 바바라 스푸리어(Spurrier) 이사를 만났다. 라루소는 2000년대 초 메이요의 내과 총괄(Chair of Medicine)을 역임한 명망 있는 의사이고, 스푸리어는 미국 재향군인회 등 의료 관련 기관에서만 20년 넘게 근무한 의료 경영 전문가다. 21세기형 서비스 혁신을 추구하는 CFI의 특징을 5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유별난 환자 중심 철학
로비 등 초호화 편의시설 환자가 다른 병원으로 가면
72시간내 진료 내역 알려줘 어기는 의사에겐 옐로 카드


'환자 중심'에서 나온 서비스 혁신

CFI의 목표는 의료 서비스 체계를 대대적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의료 공급자(의사)와 소비자(환자)의 상호 작용을 분석해 환자가 가장 좋은 경험을 하도록 의료 서비스 체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CFI를 이끄는 라루소 박사는 500명이 넘는 의사를 거느리던 내과 총괄 시절 외래 진료실을 환자 중심으로 혁신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2차 세계대전 이후 50여년 동안 진단·수술 등 의료 과학은 더 이상 발전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하지만 서비스 체계는 제자리걸음을 하며 발전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었다.

라루소는 철저한 관찰과 실험을 통해 진료실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과거 진료실 구조는 의사와 환자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지금은 의사와 환자가 테이블이나 소파에 앉아 진료를 진행한다. 의사가 컴퓨터 모니터만 들여다보며 환자를 진료하면 제대로 대화를 주고받기 어렵다는 관찰 결과에 따라 모니터도 검사 결과를 설명할 때만 의사와 환자가 함께 볼 수 있도록 배치했다.

라루소의 진료실 혁신 과정을 지켜본 메이요 경영진은 이런 혁신 사례를 조직 전체로 확산시키고자 했다. 경영진은 이에 따라 라루소에게 의료 서비스 혁신을 전담할 혁신센터 설립을 요청했으며, 그 결과 전 세계 병원을 통틀어 최초로 서비스 혁신을 위한 내부 싱크탱크가 탄생했다.

혁신의 핵심은 '디자인적 사고'

라루소 박사는 "디자 인 컨설팅 업체인 아이데오(IDEO)와 함께 진료실 혁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의료 서비스 혁신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디자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디자인적 사고(디자인 싱킹·design thinking)'는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유용한 접근법"이라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CFI는 '병원의 모든 일을 환자 중심으로 생각한 뒤 문제를 찾아내고 모든 것을 환자 중심으로 새롭게 디자인한다'는 것을 핵심 개념으로 내걸었다. 수십년 동안 관행적으로 사용되던 모든 기구나 절차를 소비자 시각으로 접근해 개선점을 찾아내 진료 디자인을 바꾸자는 것이다.

'디자인 싱킹'은 아이데오의 팀 브라운 CEO가 주창한 개념인데, 제품을 사용하기 쉽고 팔리기 쉽게 만드는 좁은 의미의 디자인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접근 방식으로 생각하는 넓은 의미의 디자인 개념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게 골자이다.

하지만 CFI 설립 초기 '디자인적 사고'를 이해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의료계 최초로 디자이너를 뽑겠다고 하자 당장 메이요 내부에서조차 '정신 나간 시도'라는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 메이요에서 이 개념이 서비스 혁신의 핵심이라는 점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오히려 전 세계 병원마다 '메이요 클리닉 배우기'가 한창이다.

CFI가 최근 개발한 어린이용 채혈 의자는 디자인적 사고를 반영한 대표적 혁신 사례다. 어린이 대부분은 채혈(採血) 때마다 공포감을 느끼며 심하게 운다. 이런 점을 감안해 채혈 때 어린이가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기기를 설치한 것이 채혈 의자다. 얼핏 사소해 보이지만 지금껏 어떤 병원도 이런 발상을 하지 못했다.

원격 진료 'e컨설트'
방문 어려운 환자를 위해 의사들이 원격 화상 진료
과다한 의료비 지출 줄이고 잠재적 의료 고객 만들어

파괴적 혁신으로 산업 변화를 선도

CFI의 모토는 '크게 생각하고, 작게 시작해, 빨리 움직인다(Think Big, Start Small, Move Fast)'이다. 현재까지는 CFI 성과가 외형적 혁신에 집중된 것처럼 보이지만, CFI의 궁극적 목표는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으로 의료 산업의 지형을 바꾼다는 것이다.

CFI는 최근 일종의 원격 진료 서비스인 'e컨설트'를 시작했다. 거리나 시간 때문에 직접 메이요를 방문하기 어려운 환자를 메이요 클리닉 의사들이 화면으로 원격 협진한 뒤 48시간 이내에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서비스다. 물론 초기엔 '환자가 오지 않으면 메이요의 매출이 줄어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내부 반발도 있었다. 스푸리어 이사는 "앞으로 10~20년 뒤 미국 내 의사 숫자가 절대 부족해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며 "e컨설트는 의사 부족에 따른 의료산업의 구조적 변화를 대비하기 위한 파괴적 혁신 사례"라고 말했다.

환자나 보험사 입장에선 의료비 지출을 줄여 미국의 고질적인 의료보험 제도 개선에 기여할 수 있고, 병원 입장에서도 e컨설트를 경험한 환자가 메이요의 잠재 고객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될 수 있다. 라루소 박사는 "우리의 임무는 '현재 상태(status quo)'를 깨는 것이며 이를 위해선 시대 흐름을 잘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혁신의 사령탑 CFI
4년만에 4명에서 60명으로 디자이너부터 인류학자까지
다양한 분야 전문가 모여 100개 넘는 혁신 과제 추진

다학제적 접근과 협업으로 혁신 창출

현재 CFI에는 60여명이 근무한다. 2008년 7월 출범 당시 4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조직이 엄청나게 커진 셈이다. 특이하게도 CFI에는 산업·제품·그래픽 디자이너 14명을 비롯, 의사·간호사·통계학자·인류학자·분석가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모여 있다. 스푸리어 이사는 "디자이너 채용 공고가 나면 의료 분야에서 특기를 살리겠다는 유명 디자인 스쿨 졸업자가 수천명씩 지원한다"고 말했다.

현재 CFI는 진료실 개선 2차 작업, HAIL (Healthy Aging and Independent Living·건강하고 독립적인 노후 생활) 등 100개가 넘는 혁신 프로젝트를 동시 다발적으로 추진 중이다. 라루소 박사는 "좋은 혁신을 이끌어 내려면 다양한 분야 전문가로 좋은 팀을 구성하는 게 중요하다. 특히 외부 전문가들은 기존 의료 종사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다양한 통찰력으로 혁신을 창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학제적(多學際的·multi-disciplinary) 협업'의 성공 여부는 팀워크에 달려 있다는 판단 아래 CFI는 훌륭한 개인이 아닌 좋은 팀에 보상을 준다. 스푸리어 이사는 "팀 업적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하나의 팀으로 훌륭한 업적을 달성했다는 징표로 신분증에 붙이는 작은 배지를 주는 것이 보상의 전부"라고 말했다.

열린 혁신으로 의료계 동반 혁신 추구

CFI 로비 테이블에는 어린이용 장난감이 놓여 있다. 같은 층에 있는 소아과 환자가 불쑥 찾아와도 내쫓지 않고 시간을 보내도록 한다. CFI는 더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연내에 출입구 개방 공사를 벌일 예정이다. 대부분의 기업이 혁신 활동을 비밀스럽게 추진하고 혁신 담당 조직의 사무실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이다. 스푸리어 이사는 "조직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는 소통 잘못에서 시작된다"며 "외부인과 소통하는 건 새로운 혁신 아이디어를 얻는 좋은 창구이다"고 말했다.

전 세계 병원과 의사들이 벤치마킹을 목적으로 많이 방문한다는 점을 감안해, CFI는 아예 매년 가을 혁신 사례 설명용 대형 콘퍼런스를 개최한다. 메이요 클리닉이 쌓아온 노하우를 모든 이에게 공개해 의료계 전체의 '동반 혁신'을 유도한다는 오픈 이노베이션 정책의 기조 위에서다. 라루소 박사는 "CFI의 의료 서비스 혁신은 메이요의 생존을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국가적·세계적으로 의료 서비스의 전반적 개선을 유도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출처] 조선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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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2. 4. 28.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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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억엔 순손실… 일본 간판기업의 쇼크]

3년前에는 혁신의 아이콘… 포켓몬스터·슈퍼마리오·Wii·DS시리즈로 세계 석권

스마트폰 등 무료게임에 밀려 이제는 천국에서 지옥으로

"스마트폰이 아무리 많이 보급돼도 게임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

지난해 닌텐도(任天堂) 이와타 사토루(岩田聰) 사장은 스마트폰의 무료게임에 밀려 실적이 악화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자, "닌텐도는 다르다"고 했다. 닌텐도는 지난해 게임기 가격 인하, 새로운 소프트웨어 투입, 경비 절감 등 총력전을 펼쳤지만 1962년 상장 이래 첫 적자를 기록했다. 세계 최초라는 안경이 필요 없는 입체 3D게임기도 속수무책이었다.

닌텐도는 '2011회계연도'(2011년 4월~2012년 3월)에 423억엔의 순손실을 기록했다고 27일 밝혔다. 매출은 더 비참하다. 전년 동기 36% 줄어든 6476억엔으로, 사상 최고 실적을 냈던 2009년(1조8386억엔)의 3분의 1 토막이다. 불과 3년 만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한 것이다. 1889년 교토(京都)에서 화투 제조업체로 출발한 닌텐도는 완구제조회사를 거쳐 1980년대 가정용 게임시장에 진출했다. 닌텐도DS 시리즈, 가상현실게임 '닌텐도 Wii' 등 혁신적인 제품과 포켓몬스터, 슈퍼마리오 등 전 세계 어린이들이 열광하는 캐릭터를 만들어 세계시장을 석권했다. 2006년 가족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가상현실 게임기 'Wii' 등 연속 히트상품을 내면서 2009년에 사상 최고실적을 냈다. 세상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이라는 찬사가 쏟아졌고 연간 2000억~5500억엔(약 2조8000억~7조7000억원)의 영업이익을 내 일본의 간판 기업이 됐다.

Chosun

위기는 성공의 절정기에 소리도, 형체도 없이 찾아왔다. 성공에 도취한 사이 스마트폰이라는 경쟁자의 부상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것이다. 닌텐도가 게임기 판매에 열중하는 동안 스마트폰과 태블릿PC가 무료 게임을 쏟아냈고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게임도 확산됐다. '게임의 법칙'이 180도 바뀐 후에야 닌텐도는 허둥지둥했다. 닌텐도는 작년 게임기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판매 가격을 40% 인하했지만, 이게 오히려 게임기를 팔면 팔수록 적자가 나는 구조를 정착시키는 악수였다는 평가도 나왔다. 닌텐도는 해외매출의 90%가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 이뤄지고 있어, 급성장하는 아시아시장 대응에도 뒤처졌다.

닌텐도는 지난 2월 인터넷을 통한 게임판매를 연구하는 조직을 만들고 아시아 사업팀도 발족하는 등 사업구조 개편작업에 착수했다. 일부에선 위기 타개를 위해 게임기 판매를 축소하고 소프트웨어를 타사 단말기에 공급하는 등 사업구조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닌텐도는 신제품 'Wii U'를 올 연말에 발매해 역전의 발판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Wii의 차세대 게임기인 'Wii U'는 인터넷을 이용한 음악감상, 노래방 기능, 소프트웨어 다운로드 등 다양한 기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타 사장은 "세상에 닌텐도가 다시 한 번 혁신했다는 평가를 받는 1년이 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도쿄=차학봉 특파원]


[출처]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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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2. 4. 5. 16:40

사람이 곧 혁신이다 -마지막 회

현재 필자는 한국형리더십개발원의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리더십 연구와 보급에 힘쓰고 있다. 한국형리더십개발원의 목표 중 하나는 한국형리더십연구소를 대학에 세우는 것이다. 하버드 케네디 스쿨을 한국에도 세우자는 꿈이다. 1936년에 설립된 케네디 스쿨은 세계적인 공공 정책 전문 대학원이다. 당시 대공황을 겪은 미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은 모든 문제의 원인을 공공 리더십의 부재에서 찾았다. 이들이 돈을 모아 하버드대에 주고 퍼블릭 리더십을 연구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오늘날 케네디 스쿨은 전 세계의 리더들이 한 번씩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가 되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이곳에서 공부했다. 전 세계 리더들의 네트워크가 이곳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인종과 사회문제를 안고 있는 미국이 저렇게 안정적으로 가는 것도 케네디 스쿨 같은 곳에서 공공 리더십으로 무장한 리더들을 많이 육성했기 때문이다.

한국도 1977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을 세웠다. “가난한 한국 사람들이 경제 성장으로 졸부 근성을 가지게 되면 대혼란이 온다. 정신문화를 연구하고 보급하는 활동을 하자”는 의도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주도로 33만500㎡(10만 평)의 설비를 갖추고 훌륭한 학자들을 모았다. 연구원장은 부총리급이었다. 

하지만 불과 2년 활동 뒤 박 대통령이 사망하고 초대 원장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부터 방향을 잃고 헤맨 지 벌써 30년이다. 지금은 원래 정관 1호에 있던 ‘정신문화, 리더십’ 얘기가 다 빠져 있다. 오늘날 사회적 갈등 비용이 국내총생산(GDP)의 27%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런 엄청난 혼란은 결국 공공 리더십의 부재가 아닌가 싶다.

하버드 케네디 스쿨에서 강연하는 앨빈 토플러. 케네디 스쿨은 전 세계 리더들이 한 번씩 거쳐가는 공공 정책 전문 대학원이다.


한국형 리더십 연구·보급 절실

하지만 아직도 한국형 리더십 보급에 나서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부 기관, 기업, 사람들을 많이 만나 필요성을 얘기했지만 참여하고 지원해 주는 경우는 없다. 공공의 생태계·문화를 만드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새마을운동을 겪으며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한국인들이 가장 부지런하고 오래 일하는 사람들로 바뀌었다. 결국 한강의 기적까지 일으켰다. 이제야말로 새로운 리더십·정신문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한국을 만들어야 할 시점이다. 여기에 국민들의 뜻과 지혜를 모을 때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행복나눔 125’ 운동이다. 삼성전자에서 ‘GWP(Great Work Place)’를 도입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시작된 행복한 일터 만들기 운동인데, 최종 지향점은 프라이드(pride: 긍지와 자부심), 트러스트(trust: 신뢰), 펀(fun: 즐거움)의 세 가지다. 이를 조직하고 정착시키는 과정이 한국형 리더십으로 발전할 수 있는데, 문제는 전형적인 서구형 방법론이라는 데 있다. 서양 사람들은 좌뇌 중심으로 논리적으로 움직인다. 반면 한국인은 우뇌 중심으로 감성적으로 움직인다.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기업의 수많은 혁신 운동이 비용만 들어가고 효과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농심 회장일 때도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행복한 일터 만들기와 조직 문화 개선에 힘썼지만 기대했던 성과를 완벽히 거두지 못한 것이 아쉽다. 예를 들어 ‘펀’한 직장을 만들기 위해 많은 최고경영자(CEO)들이 ‘호프데이’ 같은 것을 만든다. 하지만 이때 놀기는 잘 노는데 소통은 안 될 때가 많다. 한국인은 그런 일상적인 자리에서 어려운 문제나 고충을 털어놓는 사람들이 아니다. 호프데이 자리는 즐겁게 논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돈은 돈대로 쓰고 성과가 없는 이유다. 

그러던 중 깨달은 것이 한국적인 방법을 찾자는 아이디어였다. 어느 날 ‘감사 일기’를 쓰면 행복해진다는 ‘감사 나눔’ 운동에 대해 알게 됐다. 오프라 윈프리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딛고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여성이 된 건, 매일 작은 감사 5개를 일기에 적었던 것에서 가능했다고 한다. 

‘우리도 한 번 해보자’는 생각에 ‘감사 나눔 신문’을 발행했다. 여러 사람에게서 지혜를 모으고 매일 감사한 일을 일기에 쓰자는 의도였다. 감사한 일이 100개, 1000개, 1만 개로 늘면 감사의 기적이 일어난다.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너그러워지고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독서, 착한 일, 감사하는 마음. 이 세 가지를 모아 2010년 3월에 틀을 완성했다. 그것이 바로 ‘행복나눔 125’ 운동이다. 행복한 일터와 사회를 만드는 건 우리 모두의 꿈이다. 새마을운동은 배불리 먹고 잘 살아보자는 염원을 담은 운동이었다.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어선 지금은 새마을운동과 다른 새로운 차원의 운동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방법은 첫째, 1주일에 한 번은 착한 일을 한다. 둘째, 한 달에 2권의 좋은 책을 읽는다. 셋째, 하루에 5개의 감사 일기를 쓰자는 것이다. 이를 표현한 게 ‘125’다. 

구체적인 방법이 결정되면 이를 도입해 실현해 줄 조직이 필요하다. 주위의 작은 기업에서 관심을 보이는 곳이 많았지만 이름이 알려진 큰 기업에서 성공시키고 싶었다. 마침 새로 CEO로 선임된 허남석 포스코ICT 사장을 만났다. 

포스코ICT는 포스데이터와 포스콘을 하나로 합쳐 만든 신생 회사였다. 포스데이터는 와이브로 개발에 나섰다가 실패해 큰 손실을 보고 도산 지경에 와 있었다. 포스콘은 엔지니어링 서비스를 주로 해 현장 중심 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기업이었다. 완전히 이질적인 조직 문화를 가졌던 기업이 물리적으로만 합쳐진 상태였던 것이다. 물과 기름 같은 두 기업을 어떻게 하나로 뭉치느냐가 허 사장의 고민이었다. 



행복한 일터와 사회를 만들자

허 사장을 만난 필자는 감사의 위력을 설명하며 행복나눔 125를 소개했다. 사실 그전에 감사 일기를 써볼 것을 권했는데, 허 사장 스스로 감사의 위력을 알게 되며 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허 사장은 유명한 혁신의 전도사답게 행복나눔 125 운동을 전파하고 격려해 나아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009년도 직원 몰입도 조사에서 43%에 그쳤던 결과는 운동 시작을 선언한 2010년 4월부터 불과 몇 달 뒤에 58%로 상승했다.

2011년에는 70%에만 도달해도 훌륭하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런데 놀랍게도 84%를 달성했다. 포스코 본사는 물론 계열사에서 최고 기록이었다.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겉돌기만 했던 직원들은 항상 웃고 신바람 나는 사람들로 바뀌어 나갔다. 미래를 걱정하던 조직이 내일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기업으로 변한 것이다. 정준양 회장도 이를 알고 포스코 전 그룹으로 운동을 확산시켰다. 정 회장이 앞장서 가장 먼저 교육을 받았다. 정 회장은 매일 무작위로 직원 3명을 연결해 감사 전화를 걸었다. 

군(軍)과도 협력했다. 당시 국방대학 리더십개발원장이었던 최병순 원장과 상의한 결과 오늘날의 군에서도 이런 운동이 필요하다는 데 동감했다. 수방사 전차부대를 시범부대로 선정해 부대원들에게 감사 일기 쓰기 교육을 진행했다. 젊은 사병들은 거의 모두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일기에 써내려 갔다. 1시간 남짓한 시간에 100가지, 200가지 감사의 마음이 채워졌다. 이윽고 눈물이 앞을 가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감동의 물결이 일었다. 이후부터 문제 사병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올해부터는 전 군과 육사에도 행복나눔 운동을 전파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포스코의 성공 사례를 따라 대림그룹, 광양시, 서울시 공무원노조 등도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자발적인 참여가 이뤄지면 대표적인 풀뿌리 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크다. 행복나눔 125 운동이 지식 창조 사회의 새마을운동으로 성장하는 게 필자의 간절한 소망이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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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2. 3. 23. 09:41
민화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작품 활동의 원동력
2011년 12월 12일 (월) 13:57:14 취재_이진의 기자 top@sisamagazine.co.kr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가장 한국적인 것이라 해도 한국인뿐만 아니라 세계인이게도 통용될 수 있는 보편성이 없다면 한국적인 특수성만을 띤 콘텐츠는 세계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많은 예술가와 콘텐츠 관련 인사들은 과연 어떤 한국적인 콘텐츠에 세계적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보편성을 접목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여기 가장 한국적인 그림, 민화에 대한 사랑으로 똘똘 뭉친 부부작가가 있다.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과 자긍심으로 민화의 캐릭터 활용가치에 주목하고 있는 그들의 활동이 화제가 되고 있다.

“민화 자체가 우리 민족이고 삶이다”

차재성 작가와 김선정 작가는 민화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부부작가이다. 차 작가는 대학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한 후 모자디자이너로 20년 넘게 종사해 왔다. 차 작가는 “일을 하다보니 매너리즘이 찾아왔고, 세계가 주목할 만한 캐릭터를 고민하던 중 전통 민화를 접하게 되었다”며 “전통 민화에 대해 연구하고 공부한 결과 민화를 응용한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다”고 밝혔다.
민화에 몰두하게 된 차 작가는 부인 김 작가에게도 상업미술이 아닌 전통 민화를 권유했고 지금까지 부부는 민화에 몰입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차 작가는 “내가 이윤창출에만 눈이 어두웠다면 부인인 김 작가를 어려운 민화의 길로 인도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과 자긍심 속에 우리 것을 정성스럽게 살려 활용 가치를 극대화 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민화를 접한 것은 꽤 오래전 일이지만 근본적인 계기는 우리나라다운 캐릭터로 세계시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모자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캐릭터를 생각하던 중,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는 전통 민화밖에 없다는 스스로의 답을 얻은 차 작가. 김 작가 또한 “오래전부터 민화에 관심을 갖고 있던 남편의 권유로 3년 전 처음 민화를 접하게 되었다”며 “민화를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해버렸고 그날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민화를 그리게 되었다”고 말했다.

   
차 작가는 민화의 매력에 대해 “민화 그 자체가 우리 민족이고 삶이다”며 “보면 볼수록 편안하고 친근하며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워 그린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자유로운 영혼을 풀어헤친 대한민국 사람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살풀이 같은 그림이다”고 밝혔다.

가장 한국적인 특색의 민화 모자, 외국인에게도 큰 호응

차 작가는 ‘민화’라는 우리 민족만의 특수성을 띤 미술을 ‘모자’라는 보편적 사물에 접목시켜 민화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기여하고 있다. 모자회사에서 자수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미국의 모자를 많이 접하고 디자인을 하다 보니 애국적 오기가 생겨 왜 우리나라 캐릭터로는 세계적 상품이 없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수없이 많은 캐릭터 개발을 하면서 무언가 아쉽고 부족한 느낌을 가지고 있던 중 멸종된 한국 호랑이 이야기를 보다가 전통 민화의 호랑이 얼굴이 떠올랐다고 한다. 차 작가는 “이거다! 살리자! 그림으로라도 금수강산에 호랑이들을 뛰어놀게 하자”라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민화는 한지에 그림을 그린다. 모자는 원단에 수를 놓는다. 전통 민화를 그대로 옮겨 모자에 수를 놓을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캐릭터는 아닐 수 있다. 그래서 차 작가는 민화의 그림 풍을 살리되 현대적 캐릭터로 다듬어서 다시 그려내고 있다. 기계에서 대량생산하듯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자수로 정성껏 모자에 민화캐릭터를 입히고 있다. 차 작가의 민화 모자는 장인정신으로 제작되고 있고, 작품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은 모자 하나하나에 낙관까지 들어가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모자인가? 차 작가 본인이 모자 자수디자이너 출신이기도 하지만 깊은 뜻이 있었다. “모자는 안 쓰면 그만이지만, 모자를 쓸 경우 사람들의 시선은 머리, 즉 모자부터 본다. 머리에 깔끔하지 않은 색채가 올라가 있다면 본인 스스로가 위축되고 자신감이 없어진다”며 “심리적인 요인이 가장 많이 작용하는 곳이 머리, 얼굴이다”고 말했다. 모자는 보편성을 띤 물건이다. 전 세계인들에게 익숙한 모자를 통해 우리의 특수성을 띤 민화를 접목한 모자작품은 외국인들에게도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민화는 가정의 안녕과 건강, 화목, 풍요, 성공 등을 비는 민속신앙적인 면이 있다. 민화 모자의 제작의미와 작가적인 철학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눈으로 보고 느끼는 그 순간만으로도 훌륭한 모자라는 것은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외국인이라도 인지하고 있다. 실제로 한 영국 여성은 자수 모자를 액자로 만들어 벽에 걸겠다고 말했다. 외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장사하고 보자는 식의 제품이 판치고 더군다나 Made in Korea는 찾아볼 수 없는 현실에서 한국적 미를 띤 모자작품이 호응을 얻고 있는 이유다.

“민화 모자를 하나의 한국적인 브랜드로 만들겠다”

차 작가는 올해 다섯 번의 모자전시를 성공리에 마쳤다. 차 작가는 “사람들의 모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많이 바꿔놓은 것 같다”며 전시회의 성과를 밝히며 “모자를 써보신 분들이 남녀노소 없이 어울리며 맘에 들어 하는 모습에 감사했다”고 말했다. 차 작가의 모자작품이 국내외적으로 점차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게 되기까지 부인 김 작가의 공로가 작지 않다. 차 작가는 “항상 나를 믿고 응원하는 부인이 있어 열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활력소가 된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동반자의 입장에서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부부작가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김 작가는 단순히 민화를 그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한지를 이용한 다양한 표현기법을 시도하고 있다. 한지의 표현기법은 한지의 종류만큼 다양해 김 작가의 작품세계에 기본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다. 김 작가의 이러한 작품들은 작년과 올해 영월조선민화박물관  전국 민화 공모전에서 2회 연속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남편은 민화를 새롭게 디자인하여 모자에 자수로 표현하는 대한민국 유일의 모자작가로서, 부인은 민화와 한지를 접목한 작품 활동으로 각자 한국적인 것을 새로운 한국적 콘텐츠로 만들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토론하고 격려하며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차 작가는 “지금 도전하고 있는 것은 15년 전에 구상한 것이고 현재의 모자들을 기획, 디자인하여 샘플을 만드는 데만 만3년이 걸렸다”며 “아직 해야 할 일의 100분의 1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브랜드는 1~2년 만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차 작가는 민화사랑과 자부심 하나로 민화 모자를 하나의 한국적인 브랜드화 하여 한국의 혼이 담긴 캐릭터로 만들고자 하는 길고 긴 여정을 걸어가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가장 세계적인 것으로의 발돋움을 준비하고 있는 차재성, 김선정 부부 작가의 노력을 통해, 이야기가 있는 한국적인 명품이 탄생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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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2. 3. 22. 10:16

사람이 곧 혁신이다 42

2001년 삼성종합기술원에서 ‘미래기술연구회’를 발족했다. “앞으로의 시대는 융합 기술의 시대다. 새로운 융합은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들이 서로 교류하고 이해하는 시너지에서 나온다. 삼성의 미래는 바로 이 융합 기술에 달려 있다.” 연구회가 발족된 배경이다.

한국 최고의 전문가들을 연구회 회원으로 초청해 강연을 열었다. 나노·바이오·통신·컴퓨터에서 건축과 사회 분야 전문가까지 20명 정도를 조직했다. 지금도 2, 3기로 이어지고 있다. 이 자리에는 삼성전자의 차세대 리더들과 최고경영자가 함께 참여했다. 당시 전무였던 이재용 사장도 멤버였다. 기술원의 전문가들, 삼성전자의 최고기술경영자들이 함께 참여해 이들과 교류했다. 서로 듣고 배우는 자리였다.

연구회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가 만족감이 대단했다. 이들은 서로 각 분야에서 1등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다른 분야는 잘 몰랐다. 흔하지 않은 교류의 기회를 열어준 것에 대해 굉장히 고마워할 정도였다. 삼성도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대표들의 지혜·지식을 나눌 수 있는 기회였다.

요즘 동반 성장과 공생이 화두인데, 사업 초기만 해도 모회사만 잘되고 하청 업체들은 수단만 제공하는 시대였다. 그야말로 하청 관계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협력회사’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지금에 와서는 공생 시대를 말하게 됐다. 단순히 어떤 회사와 거래 관계에 있는 협력회사가 아니라 전자산업 전체를 뒷받침하는 큰 생태계(클러스터)를 올바르게 육성하는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개념으로 발전한 것이다. 생태계를 바탕으로 모기업이 크고 협력사도 발전하면 개인이나 작은 기업도 상승 발전하게 된다. 어장을 크게 만들어야 큰 물고기가 많이 놀고 어부도 고기를 잘 잡을 수 있다. 미래기술연구회는 융합 기술의 리더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생태계를 만들자는 개념이었다. 오늘날의 공생이나 동반 성장과 같은 개념이다.



한국 최고들이 모인 미래기술연구회

4세대 통신 연구가 좋은 예다. 처음부터 5개 대학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대학에 10~20명 정도의 연구 인력이 참여하는 대형 산학협력 클러스터를 만들었다. 일종의 4세대 통신 생태계다. 오늘날 한국이 통신 강국으로 자리한 것도 이런 생태계가 뒷받침이 됐다.

2004년 1월 필자는 5년간의 기술원 생활을 마감하고 삼성인력개발원장으로 부임했다. 그 시절 항상 고민했던 것 중 하나가 “왜 공대를 나오고도 기업에 오면 3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제 역할을 하는가”였다. 미국에선 졸업 후 바로 기업 활동에 뛰어들어도 적응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2~3년씩 교육을 해야만 했다. 중소기업이나 대기업 할 것 없이 수천만 원에서 1억 원 넘게 재교육에 투자했던 것이다. 삼성도 마찬가지다. 해마다 뽑는 신입 사원들을 제일 처음 교육하는 곳이 바로 인력개발원이다. 학교와 기업 사이의 변화를 이어주는 중간 다리 역할이다.

삼성의 신입 사원 교육은 유명하다. 4주간에 걸쳐 짜임새 있는 교육이 강도 높게 진행된다. 인력개발원을 거치고 나야 비로소 삼성맨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신입 사원들의 특성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는 곳도 개발원이다. 각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는 어떤 인재인가, 우리가 받아들인 인재는 어떤가. 우선 이 갭부터 채워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연수 기간 안에 모든 과목과 훈련 내용을 식스시그마적으로 분석해 설계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즉, 과학적인 분석 방법론이다.

기업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부족한 것이 데이터 조사다. 특히 신입 사원들의 기초 소양 데이터 조사에만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이 시간을 줄이는 교육과정 개발이 부임 후 첫 번째 목표가 됐다. ‘3년 걸리던 걸 2년 안에 하자’, 그리고 다시 ‘1년 만에 끝내자’는 목표를 세웠다. 그다음에는 각 대학과 협력해 입사 후 오리엔테이션을 거쳐 바로 업무에 투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신입 사원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 중 하나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었다. 단순한 기술 습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두 번째는 팀워크 같은 공동체 의식이다. 하지만 부족한 점들이 있더라도 삼성에 입사한 사람이라면 이미 어느 정도 검증된 인재들이었다. 즉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인력개발원의 모든 교육과정을 대학 교육과 직장 업무 사이의 갭을 채우는 교과과정으로 개편했다. 하지만 필자가 떠난 후 애석하게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지는 못했다. 만약 계속 발전했더라면 대학 교육까지 심도 있는 협력이 이뤄져 큰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를 가나, 무엇을 하나 원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저 연수시키고 교육하는 게 다가 아니다. 단순한 오리엔테이션 정도의 개념과 신입 사원의 역량·특성을 분석해 부족한 것을 찾고 체계적으로 교육, 보완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이를 계속 분석하고 연구해 3년에서 2년, 1년, 즉시로 심화했다면 대한민국 교육의 생태계가 변화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삼성 신입 사원들은 입사 1년 후 평창에 모여 ‘수련회’를 다시 연다. 7000~8000명 수준이다. 이곳에는 교육 담당도 모두 모여 잔치를 치르듯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진다. 1년 동안 수고했다는 축하의 의미다. 계열사 사장들도 모두 참석해 굉장히 성대하게 치러진다. 필자도 행사에 참석해 관계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잔치하는 이유가 뭐냐. 수고·격려·칭찬으로 그치는 것이냐. 신입 사원 입장에선 맞다. 하지만 교육자 입장에선 그것만으론 안 된다.”


삼성그룹의 신입 사원 교육은 강도 높기로 유명하다. 사진은 신입 사원 하계 수련회 모습.


한국형 리더십을 찾다

신입 사원 교육을 마친 후 각 계열사로 보내 1년이 지나면 어느 회사 신입 사원들이 역량을 발휘하고 발전했는지 비교 분석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그렇게 해서 최고의 교육 방법론, 최악의 사례를 발굴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역량을 발휘하고 빠르게 적응하는지 반성하고 깨닫는 학습의 장이 1년 후의 수련회가 돼야 한다는 게 지금도 필자의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 잘하는 곳을 벤치마킹하고 못하는 곳은 더 노력해 배우고 연구해야 한다. 이런 목적의식을 갖고 임하는 것이 인력개발원의 가장 중요한 일이자 목표가 돼야 한다.

당시 리더십 관련 교육을 체계화하면서 한국에서 최초로 체계적인 리더십 양성 과정을 만들게 됐다. 제너럴일렉트릭(GE)의 시스템을 많이 참고했는데, 실제로 GE의 컨설턴트를 초빙해 프로그램을 설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를 진행하다 보니 모든 것이 다 서구의 교육과정이었다. 미국과 유럽의 이론과 교재가 바탕이 된 것이다. 그때 비로소 의문이 생겼다. 한국인의 특성과 생각이 서구와 다른데, 이를 그대로 도입하는 게 효과적인가. 우리나라는 지식 창조 사회의 대표적 리더인 세종이 있는데, 왜 교육에는 접목되지 않았나. 이런 의문에 답을 준 분이 국민대의 리더십 전문가인 백기복 교수였다. 백 교수는 이후 ‘세종의 마음경영’이란 책도 쓰고 한국형 리더십 연구의 중심으로 활동하는 분이다.

한국형 리더십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하게 됐다. 잭 웰치와 이건희는 분명 차이가 있다. GE식이 과연 한국에 맞는지 물어보면 답은 ‘아니다’다. 한국인은 진돗개와 비슷해 위기가 오면 기적 같은 일을 이룬다. 또 한국인은 감성적이고 서구는 논리적이다. 한국인은 마음으로 통하고 승복하지 않으면 진정한 힘을 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에 맞는 리더십이 따로 있는 게 아닐까. 그 DNA를 분석하고 전파해 각 분야에서 한국형 리더십이 살아 움직이면 세계적 일류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활동이 2007년부터 벌써 6년째 이어지고 있다.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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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2. 3. 22. 10:15

사람이 곧 혁신이다 41

일본 산요전기의 이우에 사토시 회장이 2003년 이건희 회장의 초청을 받아 삼성을 방문했다. 이우에 회장은 삼성종합기술원도 찾아 필자와 만났다. 산요는 삼성전자의 역사에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였다. 삼성전자 창업 때부터 이미 ‘삼성산요전기 주식회사’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했던 것이다. TV만 조립해 수출하는 특화된 회사였다. 삼성의 전자 산업 시작에 산요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가 삼성전자 부임 후 처음 배치 받은 곳은 냉장고 사업팀이었다. 난생처음 냉장고를 만드는 회사로서는 당연히 기술 파트너를 필요로 했다. 이때도 역시 많은 기술을 산요로부터 도입했다. 많은 직원들이 직접 산요를 방문해 연수도 받고 기술 자료를 도입해 냉장고 생산을 시작했다.

삼성전자 초기에 기술 전수를 도운 일본의 산요는 이후 삼성전자의 성공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사진은 1971년 삼성산요전기의 흑백TV 공장 모습.


산요와 삼성이 다른 점은

삼성전기라는 부품 회사도 원래는 ‘삼성산요파츠’라는 이름으로 1973년에 설립됐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기업에 기술을 전수하고 사원 연수를 제공해 기업을 육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 바로 이우에 회장이었다.

이우에 회장이 방한한 2003년은 삼성과 산요가 처음 파트너십을 맺고 일한 지 약 30년 정도가 흐른 뒤였다. 그런데 이미 그 당시 삼성전자는 글로벌 정상 기업으로 도약해 있었고 산요는 점점 경영 상황이 어려워져 고전을 면치 못하던 때였다. 이우에 회장으로선 격세지감이 컸을 것이다.

이우에 회장은 ‘삼성의 성장 비결은 무엇이고, 산요는 왜 쇠퇴했는가’를 생각하며 만감이 교차하는 감회를 품은 채 방문했다. 하나의 기업이나 리더가 어떤 꿈을 가지고 경영하는지, 그리고 구성원들의 잠재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리더십·조직문화·전략적 의사결정을 어떻게 하는지를 배우기 위해 삼성을 찾은 것이다. 두 기업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요약하면 리더십과 기술 혁신의 결과다.

산요는 원래 가전으로 시작한 기업이다. 그러다 점차 2차전지 등 부품 분야에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종합 전자회사로 변신하는 데는 실패했다. 마쓰시타는 1980년대 들어 ‘이대로 가면 안 된다’고 판단해 종합 전자회사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고노스케 회장은 “아날로그 시대의 방향으로는 미래가 없다”며 틀을 바꿨다. 시작은 리더를 바꾸는 일이었다.

고노스케 회장은 20여 명의 임원진 가운데 가장 신참인 야마시타를 사장으로 발탁하며 오래된 중역들을 다 내보냈다. 야마시타는 가전 부문에서 에어컨의 글로벌 경쟁력을 이끈 변화의 리더였다. 고노스케는 ‘야마시타가 10년은 사장을 해야 한다. 그래야 체질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전권을 맡겼다. 그러고는 매주 독대하며 경영을 직접 챙겼다. 리더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방향과 목표를 향해 가는지는 기업의 사활에 가장 중요한 요소다. ‘마쓰시타는 어떤 회사가 되고, 그걸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은 이가 바로 고노스케 회장이었다.

야마시타는 1주일 동안 활동한 것을 전부 녹음하고 채록해 고노스케 회장에게 보고했다. 고노스케는 야마시타의 보고를 들으며 어떤 것엔 동의하고 칭찬하고 또 조언하는 등 멘토링을 통해 리더로 키워갔다. 그렇게 3년이 지난 후에야 전권을 믿고 맡겼다. 삼성의 이병철·이건희 회장의 리더십도 같다. 삼성이 어디로 가고, 어떻게 갈 것인지 가장 선두에 서서 치열하게 고민한 이들이 바로 두 회장이다.

안타깝게도 산요에는 그런 방향성이 없었다. 특히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화하는 시점에서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가전산업에서 종합 전자회사로 가는 핵심 역량을 키우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이우에 회장으로 하여금 삼성을 돌아보게 한 계기였다.

당시 산요는 차세대 에너지 사업으로 오랫동안 연료전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2차전지에서는 글로벌 1~2등을 차지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룹 전체의 힘이 약해지니 추진력이 떨어지고 있던 차였다. 20여 년간 축적된 기술을 묻히기에는 너무 아까웠기에 삼성에서 먼저 공동 개발을 제안했다. “30년 전 협력했던 정신으로 함께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이를 기술원과 산요가 공동 협력하는 것으로 계약을 성사시켜 추진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감이 많았다. 결국 얼마 안 돼 산요의 연료전지 부문은 마쓰시타에 인수됐다. 이를 지켜보며 정말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다.



한일 양국이 힘 합쳐야

NEC는 컴퓨터와 통신, 즉 C&C(Computer & Communication) 시대를 연 세계적 기업이다. 삼성도 이들에게 진공관·브라운관 기술을 전수받아 삼성전관을 창립했다. 그 뒤에는 컴퓨터 회사도 합작으로 운영했다. 다른 기업에서 IBM을 쓸 때 삼성SDI만 NEC 컴퓨터를 쓸 정도였다. 양 사의 끈끈한 관계는 삼성·NEC 교류회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오랜 기간 지속됐고 삼성 측 대표를 필자가 맡기도 했다.

양 사의 협력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이 반도체 부문이다. 당시만 해도 반도체 기술의 왕자는 누가 뭐래도 NEC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삼성은 후발 주자였다. 그런데 협력 회의에 가보면 NEC는 나이가 많은 분들이 죽 둘러앉아 있고 삼성은 젊은 연구원들이 대부분이었다. 흡사 스승과 제자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교류회가 거듭될수록 삼성 쪽의 개발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한 사람 한 사람 기술자의 역량을 비교해 보면 NEC가 훨씬 깊은 기술과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제품 개발은 삼성이 빨랐던 것이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흔히 “한국 사람은 협력할 줄 모른다. 모래알 같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엔 일본인보다 오히려 협력을 잘하는 게 한국인이다.

일본은 장인 정신, 탐구 정신이 있어 한 분야에 매우 깊숙이 파고 들어간다. 그 분야에는 깊은 전문 지식을 쌓을 수 있다. 반면 다른 분야에는 관심이 없다. 즉 시너지 창출이 어렵고 융합이 안 되는 것이다. 반면 한국인은 한 분야에는 약하지만 다른 분야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많아 서로의 분야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방향과 목표에 대한 공감대만 형성되면 똘똘 뭉쳐 시너지를 창출하는 게 한국인이다. ‘모래알 같다’는 평은 일이 잘 안 될 때, 후퇴 시, 평화 시의 모습일 때가 많다. 그러나 도전적이고 가슴이 뛰는 높은 목표를 향하면 기존의 어려움은 다 잊고 융합과 시너지를 창출하는 독특한 특성이 있다. 메모리 반도체에서 세계 제일이 되겠다는 목표 아래 똘똘 뭉친 것이 좋은 예다.

한국 사람들의 이런 좋은 특성들을 가장 잘 파악하고 경영에 활용한 기업이 삼성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오늘날 어려워진 건 바로 변화의 리더십을 갖지 못해서가 아닌가 싶다. 앞으로는 중국이 끊임없이 성장해 세계적인 경제 대국이 되는 게 명약관화하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한국만의 힘만으론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힘들다. 한국의 강점과 일본의 강점이 합쳐져 시너지를 창출하도록 한일 협력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지가 굉장히 중요한 화두다. 일본의 전자회사들은 지금 변화를 갈망하고 있다. 이들은 깊은 수준의 기초 기술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은 전문성은 약하지만 글로벌 활동을 위한 에너지가 충만하다.

양국의 원로들이 자리를 함께해 심도 있는 토론을 해야 한다. 여기서 좋은 방향이 도출되면 21세기 글로벌 힘의 균형에서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중국으로서는 일본이나 한국 어느 하나만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꼴이겠지만 일본과 한국이 힘을 합치면 손바닥 위에만 올려놓기는 힘들 것이다.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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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未來2012. 3. 19. 10:46

입력 : 2012.03.18 20:34 / 수정 : 2012.03.19 05:07

 간호사 교육을 받고 나이팅게일 선서를 마친 당시의 젊은 서서평(엘리자베스 셰핑) 선교사. 독신 여성 간호 선교사로 조선 땅에 와서,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평생 병들고 가난한 조선인과 나환자들을 섬기며 살았다. /Serving the People 제공
“1934년 6월 서서평 선교사는 광주에서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숨졌습니다. 그녀가 남긴 건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습니다. 한 장 남았던 담요는 이미 반으로 찢어 다리 밑 거지들과 나눴습니다. 시신도 유언에 따라 의학연구용으로 기증됐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조선에서 22년간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조선인의 친구’가 아니라 그저 ‘조선인’으로 살았던 사람. 가난하고 병든 이웃, 나환자들을 죽기까지 섬겼던 그 사람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살아왔습니다….”

서서평(본명 엘리제 셰핑·1880~1934) 선교사 기념사업 경과보고를 하던 양국주(63) 씨가 잠시 울먹였다. 17일 광주광역시 양림동 기독간호대학 안 오웬기념각.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 예배 및 서서평 평전 출판 기념회’에 모인 1000여명의 사람이 여기저기서 함께 눈가를 훔쳤다.

독일 출신 미국인인 서서평 선교사는 1912년 32살의 나이에 처음 조선에 온 처녀 간호 선교사였다. 당시 조선은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 제 백성 돌볼 엄두도 못 내던 나라였다. 그녀는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리는 몸으로 광주 제중원 등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와 제주도를 끊임없이 순회하며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가난한 여인들을 가르쳤다.

◇14명의 양자·양녀, 38명의 과부 거둬

서서평이 바라본 조선 땅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번 순회 진료와 전도 여행을 나서면 한 달 이상 말을 타고 270㎞ 이상 거리를 돌았다. 진흙탕에 말이 쓰러지면 머리에 이고 백릿길을 걸었다.

“이번 여행에서 500명 넘는 조선여성을 만났지만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열 명도 안 됐습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 할머니’ ‘개똥 엄마’ ‘큰년’ ‘작은년’ 등으로 불립니다. 남편에게 노예처럼 복종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아들을 못 낳는다고 소박맞고, 남편의 외도로 쫓겨나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팔려 다닙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1921년 내쉬빌 선교부에 보낸 편지)

서서평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국 최초의 여성신학교인 이일학교(현 한일장신대의 전신)를 세워 여성들을 가르쳤다. 조선간호부협회(현 간호협회의 전신)를 세우고 일본과 별도로 세계 간호사협회에 등록하려 애썼던 이도 서서평이다. 한글 말살정책이 진행 중인 일제 치하에서 간호부협회의 소식지와 서적들은 모두 한글 전용을 고집했다. 조선사람들에겐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독립의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1914년 광주 제중원 여성 성경공부반의 조선 부인과 함께 선 서서평(엘리자베스 셰핑) 선교사. 독신 여성 간호 선교사로 조선 땅에 와서,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평생 병들고 가난한 조선인과 나환자들을 섬기며 살았다. /Serving the People 제공
◇출애굽 정신 가르치며 한글 사용 고집

1929년 조선간호부협회를 세계협회에 가입시키기 위해 갔던 미국에서, 서서평은 갓 1살 된 자신을 할머니에게 버려두고 떠났던 어머니를 다시 만난다. 하지만 어머니는 “니 몰골이 내 딸이라 하기에 부끄러우니 썩 꺼지라”고 서서평을 내쳤다.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서서평은 수양딸 13명과 나환자의 아들 1명 등 14명의 한국 아이를 입양해 기른 ‘조선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냥 데려다 기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좋은 곳으로 시집가도록 돕고, 소박이라도 맞으면 자활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 

1933년에는 서서평은 조선인 목회자 등 동역자들과 함께 50여명의 나환자를 이끌고 서울로 행진을 시작했다. 강제 거세 등으로 나환자들의 씨를 말리는 정책을 펴고 있던 일제 총독부에 나환자들의 삶터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소식을 들은 전국 각지의 나환자들이 이 행진에 합류했다. 서울의 총독부 앞에 이르렀을 때 동참한 나환자들의 숫자는 530여명에 달했다. 결국 총독부도 두 손을 다 들었다. 소록도 한센병환자 요양시설과 병원은 이렇게 시작됐다. 

◇장례행렬 나환자들 “어머니” 부르며 오열

최초의 광주시민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를 땐 수천의 광주 시민과 나환자들이 쫓아 나와 “어머니”를 부르며 오열했다. 당시 한 일간지는 사설에서 “백만장자의 귀한 위치에서 하인을 두고 차를 몰고 다니는 선교사들, 동족의 비참한 생활에 눈감고 오직 개인 향락주의로 매진하는 신여성들이 양심에 자극을 받길 바란다”고 썼다.

그가 한국땅을 밟은 지 100년을 맞은 올해에야 기념사업회가 세워졌다. 양창삼 한양대 명예교수의 ‘조선을 섬긴 행복’, 양국주 씨의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이상 Serving the People 펴냄) 등 평전 2권이 세상에 나왔다. 재미교포인 양국주 씨는 미 재무부 등록 전쟁·재난 구호 NGO ‘열방을 섬기는 사람들(Serving the Nations)’ 대표로 활동 중이다.

그는 “서서평 선교사는 남자가 아닌 독신여성, 목사가 아닌 평신도, 의사가 아닌 간호사라는 이유로 잊혀 있었다. 유산 놓고 다투는 부잣집 자식들처럼 가진 게 너무 많아 근심뿐인 한국교회가 다시 돌아봐야 할 분”이라고 했다. 

참석자들은 기념식 뒤 인근 호남신학대 캠퍼스 언덕 위의 선교사 묘역으로 갔다. 이끼 낀 서서평 선교사의 묘비에 화환이 놓였다. 설교를 맡은 서서평기념사업회 회장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원로)의 목소리는 피를 토하듯 절실하게 느껴졌다.

“여수 애양원에서 나환자를 섬겼던 손양원 목사의 삶, 그리고 서서평 선교사의 삶.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게 원본입니다. 말기암 환자인 91세 박재훈 목사가 손양원 목사를, 뇌졸중으로 쓰러져 다리를 쩔뚝이는 양국주 대표가 서서평의 삶을 이 땅에 되살려냈습니다. 지금 기독교는 대응되는 실제가 없는 공허한 단어로만 말해지고 있습니다. 믿음은 논리가 아닙니다. 삶이며 생명 그 자체입니다. 믿음은 늘 구체적인 삶의 용솟음입니다. 손양원과 서서평이라는 믿음의 원본을 다시 갖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한국교회는 이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입력 : 2012.03.19 03:03 | 수정 : 2012.03.19 08:24

조선 땅에 몸던진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년
전라도·제주 병자 돌본 간호 선교사 - 광주서 과로·영양실조 숨졌을때 담요 반장·강냉이가루 2홉만 남겨
아이 14명 입양, 과부 38명 돌봐줘… 총독부 나환자 정관수술도 막아

 서서평 선교사
"1934년 6월 서서평 선교사는 광주에서 만성 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숨졌습니다. 그녀가 남긴 건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습니다. 시신도 유언에 따라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됐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조선에서 22년간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조선인의 친구'가 아니라 그저 '조선인'으로 살았던 사람. 가난하고 병든 이웃, 나환자들을 죽기까지 섬겼던 그 사람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살아왔습니다…."

서서평(본명 엘리제 셰핑·1880~1934) 선교사 기념사업 경과 보고를 하던 '열방을 섬기는 사람들' 양국주(63) 대표가 울먹였다. 17일 오후 광주광역시 양림동 기독간호대학 안 오웬기념각.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 예배 및 평전 출판 기념회'에 모인 1000여명이 여기저기서 함께 눈가를 훔쳤다. 독일 출신의 미국인 서서평은 1912년 32살의 나이에 처음 조선에 온 독신여성 간호 선교사.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리는 몸을 이끌고 광주 제중원 등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와 제주도를 순회하며 병자를 돌보고 가난한 여인들을 가르쳤다.
◇수많은 '큰년' '작은년'에게 이름을

서서평이 바라본 조선 땅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번 순회 진료 여행을 나서면 말을 타고 한 달 이상 270㎞ 넘는 거리를 이동했다. 진흙탕에 말이 쓰러지면 짐을 머리에 이고 걸어야 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여성 500명 중 이름이 있는 사람은 열명뿐입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할머니' '큰년' '작은년'으로 불립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1921년 내쉬빌 선교부에 보낸 편지) 서서평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국 최초의 여성 신학교인 이일학교(현 한일장신대의 전신)를 세워 여성들을 가르쳤다. 조선간호부협회(현 간호협회의 전신)를 세우고 일본과 별도로 세계 간호사협회에 등록하려 애썼던 이도 서서평이다.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독립의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17일 광주광역시 양림동 기독간호대학 오웬기념관에서 열린‘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예배 및 평전 출판 기념회’. /광주=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14명의 양자·양녀, 38명의 과부 거둬

1929년 안식년을 맞아 갔던 미국에서 서서평은 1살 때 자신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떠났던 어머니를 만난다. 하지만 어머니는 고된 선교사 생활로 가난이 몸에 밴 딸을 "니 몰골이 부끄러우니 썩 꺼지라"고 내친다. 평생 어머니의 사랑에 굶주렸으면서도 서서평은 수양딸 13명과 나환자의 아들 1명 등 한국 아이 14명을 입양해 훌륭하게 키워냈다. 과부 38명이 자립해 새 삶을 살도록 도운 것도 서서평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33년 그녀는 나환자들을 모아서 서울로 행진을 벌인다. 일제 총독부의 나환자 정관수술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총독부 앞에 이르렀을 때 동참한 나환자들의 숫자는 530여명. 결국 총독부는 정관수술 정책을 폐기하고 소록도에 갱생원을 지어주기로 약속한다. '나환자들의 어머니'라는 별명은 이때 생겼다.

 한복 차림의 서서평 선교사가 자신의 조선인 양자·양녀 14명 가운데 유일한 아들인 요셉을 업고 있다. 요셉은 태어나면서 엄마가 죽었고, 나환자인 아버지가 개천에 버리려 하던 걸 데려온 아이였다. /Serving the People 제공
◇장례 행렬 나환자들 "어머니" 부르며 오열

그의 장례는 최초의 광주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수천의 광주 시민과 나환자들이 쫓아 나와 어머니를 부르며 오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 일간지는 당시 사설에서 "서 양은 생전에 '다시 태어난 예수'로 불렸다. 백만장자처럼 하인을 두고 차를 몰고 다니는 선교사들, 동족의 비참에 눈감고 개인 향락주의로 매진하는 신여성들이 양심에 자극을 받길 바란다"고 썼다. 그가 한국에 온 지 100년인 올해에야 양창삼 한양대 명예교수의 '조선을 섬긴 행복', 양국주 씨의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이상 Serving the People 펴냄) 등 평전 2권이 세상에 나왔다.

기념예배 참석자들은 인근 호남신학대 캠퍼스 언덕 위의 선교사 묘역도 방문했다. 서서평기념사업회 회장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원로)가 서서평의 이끼 낀 묘비 앞에서 설교했다. "서서평 선교사의 삶,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게 원본입니다. 지금 기독교는 원본을 잃었습니다. 믿음은 늘 구체적인 삶의 용솟음입니다. 믿음의 원본을 되찾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한국 교회는 이 자리 

[출처] 조선일보 
Posted by 프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