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革新2012. 5. 5. 14:06

[Cover Story] 의료 시스템 혁신에 나선 세계최고 병원 '메이요 클리닉'
환자중심 진료·전문의 과정·협진 도입 등100년간 현대 의료 시스템 앞장서 만들어
세계서 환자 몰려드는데 또 혁신센터 설립 디자이너 10여명이 핵심 인력으로 주도

▲ 일러스트=정인성 기자
모든 산업에 걸쳐 가장 까다롭고 힘든 소비자는 누구일까? 아마 정답은 병원을 찾는 환자일 것이다. 자동차나 휴대전화 같은 제품이나 호텔·금융 등 서비스 상품은 개인의 기호(嗜好)에 따라 선택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하지만 중병(重病)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은 치료를 받기 위해 자기 생명을 걸고 그만큼 절박하다. 이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우면서 가장 특별하고 섬세한 서비스를 원하는 고객이다.

올해 88세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국왕은 2008년 말 가족 수십 명과 함께 보잉 747 전용기를 타고 미국 미네소타주에 있는 로체스터시를 찾았다. 압둘라 왕 일행은 한달여 동안 시내 호텔에 머물면서 100만달러가 넘는 돈을 썼다. 로체스터는 인구가 10만명 남짓한 작은 도시로,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드넓은 목초지가 펼쳐져 있고 겨울이면 섭씨 영하 20도를 밑도는 혹한과 수십㎝씩 쌓이는 폭설로 외출조차 힘들다. 그런데도 유럽·중동의 왕족과 부호(富豪), 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이곳을 자기 집 안방처럼 찾아온다. 지리적 불리함이란 한계에 아랑곳없이 '글로벌 의료 성지(聖地)'로 우뚝 선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이 있기 때문이다.

연인원 2000만명이 넘는 환자를 매년 맞는 메이요는 세계에서 환자 만족도가 가장 높은 병원으로 첫손 꼽힌다. 제럴드 포드, 로널드 레이건, 조지 부시 등 전직 미국 대통령과 어니스트 헤밍웨이, 아놀드 파머 같은 유명인도 이 병원에서 최고급 진료와 치료를 받았다.

메이요 클리닉이 갖는 명성의 원천은 1889년 설립 후 100년 넘게 일관되게 '환자 중심' 진료를 실천해 온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다 20세기 초 여러 분야의 의사가 팀을 이뤄 한 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협진(協診)' 개념을 세계 최초로 도입했다. 진료 환자 수에 관계없이 의사에게 같은 급여를 주는 제도도 100여년 전 도입했다. 성과급에 신경 쓰지 말고 메이요를 찾는 모든 환자에게 최선의 진료를 제공하겠다는 취지였다.

▲ 세계적으로 의사와 환자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병원으로 꼽히는 미국 메이요 클리닉은 지난 50여년 동안 발전하지 않은 의료 서비스 체계를 환자 중심 철학에 따라 바꾸겠다는 목표로 혁신센터(CFI)를 만들었다. CFI를 이끄는 두 핵심 인물인 니컬러스 라루소(오른쪽) 박사와 바버라 스푸리어 이사가 의료 서비스 혁신으로 새롭게 미래를 밝히겠다는 의미에서 전구(電球)를 들고 있다 / 메이요 클리닉 제공
세계 최초로 혈액은행 개설 및 전문의 과정 도입, 미국 최초로 CT(컴퓨터 단층 촬영)를 진단에 활용 등…. 메이요 클리닉의 최초 기록은 줄을 잇는다. 그래서 20세기 세계 의료산업 '혁신'의 상징으로도 불린다.

'US 뉴스 & 월드 리포트'지(誌)가 미국 5000여개 병원을 대상으로 한 '최고 병원'(Best Hospitals) 랭킹에서 최근 수십 년 동안 존스홉킨스병원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양대(兩大) 병원으로 뽑혔고 소화기내과·산부인과·신장내과 부문은 단연 미국 1등으로 평가받는다. 올해 초 포천지(誌)가 발표한 '일하고 싶은 100대 기업'에 9년 연속 선정됐다.

이처럼 명실상부한 '글로벌 넘버 원(one)'인 메이요 클리닉이 요즘 미국 경영학계와 의료계에서 최고 혁신 스타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지난 100여년 동안 사실상 고정돼 있던 의료 서비스 체계를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이란 경영 기법을 적용해 21세기 최첨단 모델로 바꾸겠다고 선언하고 이를 실행하고 있어서다. 하버드대 등 미국 유명 경영대학원들은 물론 세계 의료계가 메이요 클리닉의 혁신 사례를 집중 탐구하려는 이유이다.

메이요 클리닉이 추진하는 '파괴적 혁신'의 심장부는 2008년 7월 출범한 혁신센터(Center for Innovation·약칭 CFI)다. CFI는 모든 의료 서비스 체계를 메이요의 '환자 중심' 철학에 맞춰 개선하기 위한 내부 싱크탱크(연구소) 역할을 한다. CFI에서는 특이하게도 10명이 넘는 디자이너가 핵심 인력으로 근무하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세계에서 최고·최상급 환자들이 몰려드는 메이요 클리닉은 왜 서비스 혁신에 나선 걸까? 병원 서비스 혁신과 디자인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Weekly BIZ는 로체스터를 찾아가 '디자인 싱킹'(design thinking·디자인적 사고)으로 전면적인 의료 서비스 혁신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취재했다.

미국 미네소타주 최대 도시인 미니애폴리스에서 자동차로 1시간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 지난달 23일 오전 이 병원의 1층 로비에 들어서자 고급 호텔에 온 듯한 상쾌함이 밀려왔다. 널찍한 로비에는 온통 대리석이 깔려 있고, 천장에는 샹들리에 같은 화려한 전등이 달려 있다. 로비에 배치된 의자는 모두 쿠션이 달린 편안한 의자다. 특히 기다란 복도 모퉁이에는 후안 미로와 앤디 워홀 등 세계적 미술가의 그림과 조각이 전시돼 있다. 유명한 작품을 보려는 방문객을 대상으로 가이드 투어도 진행되고 있다.

메이요 클리닉이 내부 장식에 엄청난 돈을 투자한 목적은 사세(社勢) 과시용이 아니다. "메이요에선 병원 로비를 들어서는 순간부터 진료가 시작된다"는 '환자 중심' 철학에 따라 환자가 최대한 안락한 느낌이 들도록 하려는 '특별 배려'인 것이다.

환자의 경험을 중시하는 메이요의 '환자 중심 철학'은 유별나다. 의사는 초진(初診) 환자를 최소 45분 동안 진료한다. 환자나 보호자와 충분히 대화해야만 제대로 진단을 내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또 모든 의사는 돌보던 환자가 퇴원하면 72시간 이내에 환자를 보낸 다른 병원 의사에게 진료 경과와 회복 상태에 대해 연락을 해줘야 한다.

연락을 하지 않으면 병원 경영진으로부터 경고 이메일을 받는다. 메이요 클리닉의 오재건 박사(심장내과)는 "여기서 일하는 모든 사람은 환자 중심주의를 실천하도록 끊임없이 교육받는다"며 "환경미화원도 '환자의 회복에 도움이 되려면 언제 어디를 깨끗이 정리해야 할까' 고민하는 것이 메이요의 문화"라고 말했다.

메이요 클리닉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병원이 없던 로체스터에서 북군(北軍) 군의관으로 근무한 윌리엄 메이요가 1889년 의사인 두 아들과 함께 세웠다. 메이요 부자(父子)는 설립 초기 외부 의사에게 수술 장면을 처음으로 공개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의료 발전을 위해 메이요가 쌓아온 수술 노하우를 외부와 공유하기 위함이었다. 메이요는 '환자 중심 철학'과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열린 혁신)'으로 세계에서 환자와 의사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병원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메이요가 2008년 7월 세운 혁신센터(CFI)도 '환자 중심'과 '열린 혁신'을 근간으로 한다. 20세기에 의료 기술과 제도 혁신을 주도한 메이요 클리닉은 21세기에는 의료 서비스 혁신을 선도한다는 청사진을 갖고 있다.

Weekly BIZ는 CFI를 이끄는 두 핵심 인물인 니컬러스 라루소(LaRusso) 이사와 바바라 스푸리어(Spurrier) 이사를 만났다. 라루소는 2000년대 초 메이요의 내과 총괄(Chair of Medicine)을 역임한 명망 있는 의사이고, 스푸리어는 미국 재향군인회 등 의료 관련 기관에서만 20년 넘게 근무한 의료 경영 전문가다. 21세기형 서비스 혁신을 추구하는 CFI의 특징을 5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유별난 환자 중심 철학
로비 등 초호화 편의시설 환자가 다른 병원으로 가면
72시간내 진료 내역 알려줘 어기는 의사에겐 옐로 카드


'환자 중심'에서 나온 서비스 혁신

CFI의 목표는 의료 서비스 체계를 대대적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의료 공급자(의사)와 소비자(환자)의 상호 작용을 분석해 환자가 가장 좋은 경험을 하도록 의료 서비스 체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CFI를 이끄는 라루소 박사는 500명이 넘는 의사를 거느리던 내과 총괄 시절 외래 진료실을 환자 중심으로 혁신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2차 세계대전 이후 50여년 동안 진단·수술 등 의료 과학은 더 이상 발전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하지만 서비스 체계는 제자리걸음을 하며 발전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었다.

라루소는 철저한 관찰과 실험을 통해 진료실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과거 진료실 구조는 의사와 환자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지금은 의사와 환자가 테이블이나 소파에 앉아 진료를 진행한다. 의사가 컴퓨터 모니터만 들여다보며 환자를 진료하면 제대로 대화를 주고받기 어렵다는 관찰 결과에 따라 모니터도 검사 결과를 설명할 때만 의사와 환자가 함께 볼 수 있도록 배치했다.

라루소의 진료실 혁신 과정을 지켜본 메이요 경영진은 이런 혁신 사례를 조직 전체로 확산시키고자 했다. 경영진은 이에 따라 라루소에게 의료 서비스 혁신을 전담할 혁신센터 설립을 요청했으며, 그 결과 전 세계 병원을 통틀어 최초로 서비스 혁신을 위한 내부 싱크탱크가 탄생했다.

혁신의 핵심은 '디자인적 사고'

라루소 박사는 "디자 인 컨설팅 업체인 아이데오(IDEO)와 함께 진료실 혁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의료 서비스 혁신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디자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디자인적 사고(디자인 싱킹·design thinking)'는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유용한 접근법"이라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CFI는 '병원의 모든 일을 환자 중심으로 생각한 뒤 문제를 찾아내고 모든 것을 환자 중심으로 새롭게 디자인한다'는 것을 핵심 개념으로 내걸었다. 수십년 동안 관행적으로 사용되던 모든 기구나 절차를 소비자 시각으로 접근해 개선점을 찾아내 진료 디자인을 바꾸자는 것이다.

'디자인 싱킹'은 아이데오의 팀 브라운 CEO가 주창한 개념인데, 제품을 사용하기 쉽고 팔리기 쉽게 만드는 좁은 의미의 디자인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접근 방식으로 생각하는 넓은 의미의 디자인 개념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게 골자이다.

하지만 CFI 설립 초기 '디자인적 사고'를 이해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의료계 최초로 디자이너를 뽑겠다고 하자 당장 메이요 내부에서조차 '정신 나간 시도'라는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 메이요에서 이 개념이 서비스 혁신의 핵심이라는 점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오히려 전 세계 병원마다 '메이요 클리닉 배우기'가 한창이다.

CFI가 최근 개발한 어린이용 채혈 의자는 디자인적 사고를 반영한 대표적 혁신 사례다. 어린이 대부분은 채혈(採血) 때마다 공포감을 느끼며 심하게 운다. 이런 점을 감안해 채혈 때 어린이가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기기를 설치한 것이 채혈 의자다. 얼핏 사소해 보이지만 지금껏 어떤 병원도 이런 발상을 하지 못했다.

원격 진료 'e컨설트'
방문 어려운 환자를 위해 의사들이 원격 화상 진료
과다한 의료비 지출 줄이고 잠재적 의료 고객 만들어

파괴적 혁신으로 산업 변화를 선도

CFI의 모토는 '크게 생각하고, 작게 시작해, 빨리 움직인다(Think Big, Start Small, Move Fast)'이다. 현재까지는 CFI 성과가 외형적 혁신에 집중된 것처럼 보이지만, CFI의 궁극적 목표는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으로 의료 산업의 지형을 바꾼다는 것이다.

CFI는 최근 일종의 원격 진료 서비스인 'e컨설트'를 시작했다. 거리나 시간 때문에 직접 메이요를 방문하기 어려운 환자를 메이요 클리닉 의사들이 화면으로 원격 협진한 뒤 48시간 이내에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서비스다. 물론 초기엔 '환자가 오지 않으면 메이요의 매출이 줄어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내부 반발도 있었다. 스푸리어 이사는 "앞으로 10~20년 뒤 미국 내 의사 숫자가 절대 부족해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며 "e컨설트는 의사 부족에 따른 의료산업의 구조적 변화를 대비하기 위한 파괴적 혁신 사례"라고 말했다.

환자나 보험사 입장에선 의료비 지출을 줄여 미국의 고질적인 의료보험 제도 개선에 기여할 수 있고, 병원 입장에서도 e컨설트를 경험한 환자가 메이요의 잠재 고객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될 수 있다. 라루소 박사는 "우리의 임무는 '현재 상태(status quo)'를 깨는 것이며 이를 위해선 시대 흐름을 잘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혁신의 사령탑 CFI
4년만에 4명에서 60명으로 디자이너부터 인류학자까지
다양한 분야 전문가 모여 100개 넘는 혁신 과제 추진

다학제적 접근과 협업으로 혁신 창출

현재 CFI에는 60여명이 근무한다. 2008년 7월 출범 당시 4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조직이 엄청나게 커진 셈이다. 특이하게도 CFI에는 산업·제품·그래픽 디자이너 14명을 비롯, 의사·간호사·통계학자·인류학자·분석가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모여 있다. 스푸리어 이사는 "디자이너 채용 공고가 나면 의료 분야에서 특기를 살리겠다는 유명 디자인 스쿨 졸업자가 수천명씩 지원한다"고 말했다.

현재 CFI는 진료실 개선 2차 작업, HAIL (Healthy Aging and Independent Living·건강하고 독립적인 노후 생활) 등 100개가 넘는 혁신 프로젝트를 동시 다발적으로 추진 중이다. 라루소 박사는 "좋은 혁신을 이끌어 내려면 다양한 분야 전문가로 좋은 팀을 구성하는 게 중요하다. 특히 외부 전문가들은 기존 의료 종사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다양한 통찰력으로 혁신을 창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학제적(多學際的·multi-disciplinary) 협업'의 성공 여부는 팀워크에 달려 있다는 판단 아래 CFI는 훌륭한 개인이 아닌 좋은 팀에 보상을 준다. 스푸리어 이사는 "팀 업적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하나의 팀으로 훌륭한 업적을 달성했다는 징표로 신분증에 붙이는 작은 배지를 주는 것이 보상의 전부"라고 말했다.

열린 혁신으로 의료계 동반 혁신 추구

CFI 로비 테이블에는 어린이용 장난감이 놓여 있다. 같은 층에 있는 소아과 환자가 불쑥 찾아와도 내쫓지 않고 시간을 보내도록 한다. CFI는 더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연내에 출입구 개방 공사를 벌일 예정이다. 대부분의 기업이 혁신 활동을 비밀스럽게 추진하고 혁신 담당 조직의 사무실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이다. 스푸리어 이사는 "조직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는 소통 잘못에서 시작된다"며 "외부인과 소통하는 건 새로운 혁신 아이디어를 얻는 좋은 창구이다"고 말했다.

전 세계 병원과 의사들이 벤치마킹을 목적으로 많이 방문한다는 점을 감안해, CFI는 아예 매년 가을 혁신 사례 설명용 대형 콘퍼런스를 개최한다. 메이요 클리닉이 쌓아온 노하우를 모든 이에게 공개해 의료계 전체의 '동반 혁신'을 유도한다는 오픈 이노베이션 정책의 기조 위에서다. 라루소 박사는 "CFI의 의료 서비스 혁신은 메이요의 생존을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국가적·세계적으로 의료 서비스의 전반적 개선을 유도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출처] 조선Biz

Posted by 프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