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未來2014. 1. 4. 11:00

중국 저술가 리쭝우(李宗吾·1879~1944)는 사람의 표정과 심성을 분석해 후흑학(厚黑學)이란 책을 썼습니다. 후흑은 면후심흑(面厚心黑)의 줄임말입니다. '낯가죽이 두껍고, 마음이 음흉하다'는 뜻이지요. 후흑의 반대는 박백(薄白)입니다. '감정 변화가 표정에 드러나고, 마음이 순박함'을 이릅니다. 리쭝우는 낯 두께의 후박(厚薄)과 마음의 흑백(黑白) 조합에 따라 사람을 4개 유형으로 분류했습니다.

최근 출간된 '초한지 후흑학'(신동준 지음·을유문화사)은 초한지(楚漢志)에 나오는 유방·항우·한신·범증을 예로 들어 후흑박백 처세의 성패를 설명합니다. 초(楚)의 항우는 '박백'형 인간입니다. 명문가 출신 엘리트로 자존심이 강해 포용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마음 또한 단순해 유방의 계략에 말려들었다는 진단입니다.

'초한지 후흑학'에 언급된 표정과 성격.

한신은 불량배의 가랑이 밑을 기어서 통과하고도 모욕을 잘 견뎠으니 낯이 두꺼웠지요. 하지만 마음이 깨끗해 유방에 대한 신의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후백'입니다. 한신은 제나라 왕에 오른 뒤 "천하를 초·한·제 삼국으로 정립(鼎立)하자"는 측근의 조언을 물리치며 유방과의 의리를 지켰지만 훗날 유방에게 목숨을 잃습니다.


항우를 보좌한 범증은 낯이 얇고 마음이 음흉한 '박흑'입니다. 갖은 책략으로 유방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으나 모욕을 참지 못했습니다. 범증은 유방의 꾐에 빠진 항우가 자신을 의심하자 버럭 화를 내며 주군 곁을 떠났습니다.

책은 유방이 최후의 승자가 된 비결로 '후흑'을 꼽습니다. "군신과 부자, 형제, 부부, 벗의 오륜은 물론 예의염치를 깨끗이 버렸기에 군웅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고 분석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해당하십니까. 저는 표정에 좋고 싫음을 숨기지 못하는 편입니다. 새해 첫날 책을 읽으며 그런 저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듭니다. 후흑만 판치는 세상은 얼마나 살기 피곤할까. 회사가 후흑을 내세워 기업 공개를 피하면 투자자 보호는 어찌 되는가. 국가권력의 획득과 유지를 투명한 민주 절차 대신 온갖 모략에 기대야 한다면 또 어떻게 될까. 비록 승리하더라도 그렇게 되기까지 개인·기업·국가의 역량 낭비가 엄청날 것입니다. 그러니 '박백'의 솔직함도 가벼이 버릴 수 없습니다. 어느 책에나 해당하겠지만 후흑의 가치에도 취사선택하는 비판적 독서가 필요해 보입니다.

[출처] 프리미엄조선 김태운의 북&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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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未來2012. 8. 4. 15:16

국내 '정의론' 토대 세운 황경식 교수, 정의와 덕을 말하다
한국에서 샌델 '정의' 열풍은 열망 표출 아닌 마케팅 결과
알고도 정의 행하지 않는 건 덕을 익히지 않았기 때문
부모 자식 서로 지나치게 의존, 부모 교육해야 퇴행 막는다

"샌델은 내가 1980년 하버드대에 있을 때 처음 만나 교분을 이어왔다. 5년 전 초청 강연도 시켰다. 그때도 같은 정의를 얘기했지만 미풍도 없었다. 그 뒤 책 한 권으로 그만한 붐(boom)이 일었다는 건 연구 대상이다. 정의에 대한 열망이 컸고 책을 통해 그게 해소됐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샌델은 명문 하버드대의 명강사다. '명'자가 두 번 들어간다. 한국인의 명품 선호가 작동한 건 아닌가. 출판 기획 마케팅에 춤추는 얄팍한 지적 풍토가 아쉽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이전에도 한국에는 '정의론'이 있었다. 황경식(65) 서울대 교수의 거의 평생에 걸친 연구 주제가 '정의론'이었다. 그 논리를 발전시킨 끝에 '덕(德·virtue)의 윤리'에 가 닿았다. 40년이란 긴 여정이었다. 국내 도덕철학계 원로인 황 교수는 올해 정년을 맞는다.

◇한국 정의론의 시발

―오랫동안 연구한 정의론을 요약한다면.

"인생의 경주는 근원적으로 불평등한 것이다. 인생의 불평등한 초기 조건을 두고 우리가 인간적으로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정의를 문제 삼을 수 있다. 경쟁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것이 정의의 중요한 요구 중 한 가지다. 하지만 애초부터 경쟁력이 없거나 취약한 사람도 있다. 불리한 천운을 타고난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도 정의의 또 다른 요구다. 이 때문에 최소 수혜자에 대한 결과적 보상이 필요한 것이다."

―정의론에서 '덕윤리'로 옮아간 것은 왜, 언제인가.

"롤스의 정의론을 1977년 완역한 후 한국 사회에 합당한 정의가 무엇인지 공부해왔다. 정의가 무엇인지 아는 것도 어렵지만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몰라서 정의가 없는 게 아니라 아는 만큼이라도 실천이 안 돼서 사회가 불의한 것 아니냐, 알아도 행하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고민하게 됐다. 2000년대 들어와 동서 덕윤리 비교 연구에 관심을 쏟았다. 본래 소규모 전통 사회는 덕윤리 중심이었다. 근대로 오면서 배경이 다양한 사람이 이합집산하는 시민사회가 되면서 공동 규범으로서 의무가 부각됐다. 도덕이 최소화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최소한의 시민 윤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반성에 따라 국제적으로도 전통 덕윤리에 다시 관심이 쏠리고 있다."

 황경식 교수는 젊어서‘정의론’에 빠졌다가‘덕의 윤리’로 회귀했다.“ 대학시절 사서삼경을 읽던 중‘덕’자에 끌려 호를‘수덕(修德)’이라 지은 적이 있다. 예고된 행로였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이번에 '덕윤리의 현대적 의의'(아카넷)를 냈다. 덕윤리란 무엇인가.

"옳은 것을 알고도 의지의 나약이나 감정의 갈등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도덕적 실패'라 한다. 정의를 실행하는 데는 인지적 각성 외에도 강한 의지와 균형 잡힌 감정이 필요하다. 부단한 연습과 훈련을 통해 습관화해야 한다.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릴 적 습관을 대단히 강조했다. 동양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 덕 수양이 평생 계속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논어의 서두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이다. 반복해서 자기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영을 아는 것과 익혀서 자기 걸로 만들어 물에서 노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왜 굳이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인간다운 존재가 되는 기술이라고 했다. 피리를 연습해야 잘 불듯, 사람도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인간적 기술을 연마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도덕적으로 살면서 행복에 이르기 위한 기술이다. 도덕적으로 살면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지 억지스러운 도덕적 삶은 높게 보지 않았다."

―현대사회가 사람을 도덕적으로 살기 어렵게 만드나.

"현대사회의 문제는 '익면성(匿面性·faceless)'이다. 정보화 사회는 그것이 극대화된 사회다. 익면성이 갖는 긍정적 해방적 기능을 최대한 살리되 부정적 범죄적 기능을 최대한 견제하는 것이 정보사회 윤리의 과제다."

황 교수는 국내 도덕 교육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무엇보다 지금 식의 가정교육은 문제다. 한국인은 너무 가족 의존적이다. 부모는 자식만 알고 애들은 자기 부모만 안다. 두 쪽 다 사회화가 안 돼 있다. 부모들이 흔히 아이들 기죽일까 걱정하는데 기(氣)란 무서운 것이다. 원색적인 기가 살면 그 기는 부모한테까지 간다. 이(理)로 순화된 기(氣)가 중요하다. 가정교육 이전에 부모 교육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부모 교육 안 된 상태에서 가정교육은 더 퇴행을 낳기도 한다. 부모나 자식이나 자율적 인격체로 독립해야 한다."

―요즘 경제 민주화, 복지론이 무성하다.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비도덕적인 것 아닌가.

"자본주의는 인류 다수의 물질적 환경을 개선하는 데 엄청난 기여를 했다. 단순히 비도덕적이라고 폄하할 게 아니다. 다만 부의 불공정한 분배는 걱정해야 한다. 공정이 공평에 의해 보완될 때 정의는 충족된다. 롤스가 말한 '최소 수혜자 최우선 배려' 원칙에도, 사회적 천부적 운도 공유 자산으로 봐야 한다는 도덕관, 박애가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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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未來2012. 3. 19. 10:46

입력 : 2012.03.18 20:34 / 수정 : 2012.03.19 05:07

 간호사 교육을 받고 나이팅게일 선서를 마친 당시의 젊은 서서평(엘리자베스 셰핑) 선교사. 독신 여성 간호 선교사로 조선 땅에 와서,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평생 병들고 가난한 조선인과 나환자들을 섬기며 살았다. /Serving the People 제공
“1934년 6월 서서평 선교사는 광주에서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숨졌습니다. 그녀가 남긴 건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습니다. 한 장 남았던 담요는 이미 반으로 찢어 다리 밑 거지들과 나눴습니다. 시신도 유언에 따라 의학연구용으로 기증됐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조선에서 22년간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조선인의 친구’가 아니라 그저 ‘조선인’으로 살았던 사람. 가난하고 병든 이웃, 나환자들을 죽기까지 섬겼던 그 사람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살아왔습니다….”

서서평(본명 엘리제 셰핑·1880~1934) 선교사 기념사업 경과보고를 하던 양국주(63) 씨가 잠시 울먹였다. 17일 광주광역시 양림동 기독간호대학 안 오웬기념각.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 예배 및 서서평 평전 출판 기념회’에 모인 1000여명의 사람이 여기저기서 함께 눈가를 훔쳤다.

독일 출신 미국인인 서서평 선교사는 1912년 32살의 나이에 처음 조선에 온 처녀 간호 선교사였다. 당시 조선은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 제 백성 돌볼 엄두도 못 내던 나라였다. 그녀는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리는 몸으로 광주 제중원 등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와 제주도를 끊임없이 순회하며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가난한 여인들을 가르쳤다.

◇14명의 양자·양녀, 38명의 과부 거둬

서서평이 바라본 조선 땅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번 순회 진료와 전도 여행을 나서면 한 달 이상 말을 타고 270㎞ 이상 거리를 돌았다. 진흙탕에 말이 쓰러지면 머리에 이고 백릿길을 걸었다.

“이번 여행에서 500명 넘는 조선여성을 만났지만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열 명도 안 됐습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 할머니’ ‘개똥 엄마’ ‘큰년’ ‘작은년’ 등으로 불립니다. 남편에게 노예처럼 복종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아들을 못 낳는다고 소박맞고, 남편의 외도로 쫓겨나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팔려 다닙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1921년 내쉬빌 선교부에 보낸 편지)

서서평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국 최초의 여성신학교인 이일학교(현 한일장신대의 전신)를 세워 여성들을 가르쳤다. 조선간호부협회(현 간호협회의 전신)를 세우고 일본과 별도로 세계 간호사협회에 등록하려 애썼던 이도 서서평이다. 한글 말살정책이 진행 중인 일제 치하에서 간호부협회의 소식지와 서적들은 모두 한글 전용을 고집했다. 조선사람들에겐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독립의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1914년 광주 제중원 여성 성경공부반의 조선 부인과 함께 선 서서평(엘리자베스 셰핑) 선교사. 독신 여성 간호 선교사로 조선 땅에 와서,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평생 병들고 가난한 조선인과 나환자들을 섬기며 살았다. /Serving the People 제공
◇출애굽 정신 가르치며 한글 사용 고집

1929년 조선간호부협회를 세계협회에 가입시키기 위해 갔던 미국에서, 서서평은 갓 1살 된 자신을 할머니에게 버려두고 떠났던 어머니를 다시 만난다. 하지만 어머니는 “니 몰골이 내 딸이라 하기에 부끄러우니 썩 꺼지라”고 서서평을 내쳤다.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서서평은 수양딸 13명과 나환자의 아들 1명 등 14명의 한국 아이를 입양해 기른 ‘조선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냥 데려다 기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좋은 곳으로 시집가도록 돕고, 소박이라도 맞으면 자활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 

1933년에는 서서평은 조선인 목회자 등 동역자들과 함께 50여명의 나환자를 이끌고 서울로 행진을 시작했다. 강제 거세 등으로 나환자들의 씨를 말리는 정책을 펴고 있던 일제 총독부에 나환자들의 삶터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소식을 들은 전국 각지의 나환자들이 이 행진에 합류했다. 서울의 총독부 앞에 이르렀을 때 동참한 나환자들의 숫자는 530여명에 달했다. 결국 총독부도 두 손을 다 들었다. 소록도 한센병환자 요양시설과 병원은 이렇게 시작됐다. 

◇장례행렬 나환자들 “어머니” 부르며 오열

최초의 광주시민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를 땐 수천의 광주 시민과 나환자들이 쫓아 나와 “어머니”를 부르며 오열했다. 당시 한 일간지는 사설에서 “백만장자의 귀한 위치에서 하인을 두고 차를 몰고 다니는 선교사들, 동족의 비참한 생활에 눈감고 오직 개인 향락주의로 매진하는 신여성들이 양심에 자극을 받길 바란다”고 썼다.

그가 한국땅을 밟은 지 100년을 맞은 올해에야 기념사업회가 세워졌다. 양창삼 한양대 명예교수의 ‘조선을 섬긴 행복’, 양국주 씨의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이상 Serving the People 펴냄) 등 평전 2권이 세상에 나왔다. 재미교포인 양국주 씨는 미 재무부 등록 전쟁·재난 구호 NGO ‘열방을 섬기는 사람들(Serving the Nations)’ 대표로 활동 중이다.

그는 “서서평 선교사는 남자가 아닌 독신여성, 목사가 아닌 평신도, 의사가 아닌 간호사라는 이유로 잊혀 있었다. 유산 놓고 다투는 부잣집 자식들처럼 가진 게 너무 많아 근심뿐인 한국교회가 다시 돌아봐야 할 분”이라고 했다. 

참석자들은 기념식 뒤 인근 호남신학대 캠퍼스 언덕 위의 선교사 묘역으로 갔다. 이끼 낀 서서평 선교사의 묘비에 화환이 놓였다. 설교를 맡은 서서평기념사업회 회장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원로)의 목소리는 피를 토하듯 절실하게 느껴졌다.

“여수 애양원에서 나환자를 섬겼던 손양원 목사의 삶, 그리고 서서평 선교사의 삶.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게 원본입니다. 말기암 환자인 91세 박재훈 목사가 손양원 목사를, 뇌졸중으로 쓰러져 다리를 쩔뚝이는 양국주 대표가 서서평의 삶을 이 땅에 되살려냈습니다. 지금 기독교는 대응되는 실제가 없는 공허한 단어로만 말해지고 있습니다. 믿음은 논리가 아닙니다. 삶이며 생명 그 자체입니다. 믿음은 늘 구체적인 삶의 용솟음입니다. 손양원과 서서평이라는 믿음의 원본을 다시 갖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한국교회는 이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입력 : 2012.03.19 03:03 | 수정 : 2012.03.19 08:24

조선 땅에 몸던진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년
전라도·제주 병자 돌본 간호 선교사 - 광주서 과로·영양실조 숨졌을때 담요 반장·강냉이가루 2홉만 남겨
아이 14명 입양, 과부 38명 돌봐줘… 총독부 나환자 정관수술도 막아

 서서평 선교사
"1934년 6월 서서평 선교사는 광주에서 만성 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숨졌습니다. 그녀가 남긴 건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습니다. 시신도 유언에 따라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됐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조선에서 22년간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조선인의 친구'가 아니라 그저 '조선인'으로 살았던 사람. 가난하고 병든 이웃, 나환자들을 죽기까지 섬겼던 그 사람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살아왔습니다…."

서서평(본명 엘리제 셰핑·1880~1934) 선교사 기념사업 경과 보고를 하던 '열방을 섬기는 사람들' 양국주(63) 대표가 울먹였다. 17일 오후 광주광역시 양림동 기독간호대학 안 오웬기념각.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 예배 및 평전 출판 기념회'에 모인 1000여명이 여기저기서 함께 눈가를 훔쳤다. 독일 출신의 미국인 서서평은 1912년 32살의 나이에 처음 조선에 온 독신여성 간호 선교사.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리는 몸을 이끌고 광주 제중원 등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와 제주도를 순회하며 병자를 돌보고 가난한 여인들을 가르쳤다.
◇수많은 '큰년' '작은년'에게 이름을

서서평이 바라본 조선 땅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번 순회 진료 여행을 나서면 말을 타고 한 달 이상 270㎞ 넘는 거리를 이동했다. 진흙탕에 말이 쓰러지면 짐을 머리에 이고 걸어야 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여성 500명 중 이름이 있는 사람은 열명뿐입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할머니' '큰년' '작은년'으로 불립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1921년 내쉬빌 선교부에 보낸 편지) 서서평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국 최초의 여성 신학교인 이일학교(현 한일장신대의 전신)를 세워 여성들을 가르쳤다. 조선간호부협회(현 간호협회의 전신)를 세우고 일본과 별도로 세계 간호사협회에 등록하려 애썼던 이도 서서평이다.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독립의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17일 광주광역시 양림동 기독간호대학 오웬기념관에서 열린‘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예배 및 평전 출판 기념회’. /광주=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14명의 양자·양녀, 38명의 과부 거둬

1929년 안식년을 맞아 갔던 미국에서 서서평은 1살 때 자신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떠났던 어머니를 만난다. 하지만 어머니는 고된 선교사 생활로 가난이 몸에 밴 딸을 "니 몰골이 부끄러우니 썩 꺼지라"고 내친다. 평생 어머니의 사랑에 굶주렸으면서도 서서평은 수양딸 13명과 나환자의 아들 1명 등 한국 아이 14명을 입양해 훌륭하게 키워냈다. 과부 38명이 자립해 새 삶을 살도록 도운 것도 서서평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33년 그녀는 나환자들을 모아서 서울로 행진을 벌인다. 일제 총독부의 나환자 정관수술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총독부 앞에 이르렀을 때 동참한 나환자들의 숫자는 530여명. 결국 총독부는 정관수술 정책을 폐기하고 소록도에 갱생원을 지어주기로 약속한다. '나환자들의 어머니'라는 별명은 이때 생겼다.

 한복 차림의 서서평 선교사가 자신의 조선인 양자·양녀 14명 가운데 유일한 아들인 요셉을 업고 있다. 요셉은 태어나면서 엄마가 죽었고, 나환자인 아버지가 개천에 버리려 하던 걸 데려온 아이였다. /Serving the People 제공
◇장례 행렬 나환자들 "어머니" 부르며 오열

그의 장례는 최초의 광주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수천의 광주 시민과 나환자들이 쫓아 나와 어머니를 부르며 오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 일간지는 당시 사설에서 "서 양은 생전에 '다시 태어난 예수'로 불렸다. 백만장자처럼 하인을 두고 차를 몰고 다니는 선교사들, 동족의 비참에 눈감고 개인 향락주의로 매진하는 신여성들이 양심에 자극을 받길 바란다"고 썼다. 그가 한국에 온 지 100년인 올해에야 양창삼 한양대 명예교수의 '조선을 섬긴 행복', 양국주 씨의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이상 Serving the People 펴냄) 등 평전 2권이 세상에 나왔다.

기념예배 참석자들은 인근 호남신학대 캠퍼스 언덕 위의 선교사 묘역도 방문했다. 서서평기념사업회 회장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원로)가 서서평의 이끼 낀 묘비 앞에서 설교했다. "서서평 선교사의 삶,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게 원본입니다. 지금 기독교는 원본을 잃었습니다. 믿음은 늘 구체적인 삶의 용솟음입니다. 믿음의 원본을 되찾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한국 교회는 이 자리 

[출처]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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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未來2012. 2. 11. 14:10

건축학 전공 사회공헌모임 '비 온 대지' 9개월에 걸쳐 개발
"누에고치서 나비가 나오듯 노숙인도 이 집에서 살다가 다시 사회인으로 거듭나길"
"장기적으로 자립할 길 마련을"

"노숙인들이 지저분한 종이 박스에서 자는 모습을 많이 봤는데 이 박스는 신기하네요. 깔끔하고."

10일 서울 중구 태평로의 한 지하보도를 지나던 유모(27)씨는 처음 보는 누에고치 모양의 '박스집'앞에서 멈췄다. 일본인 관광객 유키(여·30)씨는 "이런 것은 처음 본다"면서 사진도 찍었다.

이 박스집은 대학연합건축학회 소속 사회 공헌 소모임 '비 온 대지'에서 만들었다. 신상은(24·한양대 건축학과)씨 등 건축 전공 대학생들인 회원 10여명이 지난해 5월부터 개발을 시작해 지난 4일 1차로 15개를 서울 을지로입구역 부근과 시청역 등의 노숙인들에게 나눠줬다. 1개당 7500원이 들고 제작 시간은 10여명이 달라붙으면 15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비 온 대지'는 비 온 뒤 대지에 새싹이 자라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누에고치 모양의 독특한 디자인은 신씨가 건축학 수업 시간에 배운 '절판(折板)구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절판구조'란 종이를 여러 차례 접으면 유리컵을 지탱할 만큼 강한 구조를 갖게 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다. 신씨는 "노숙인들이 자는 박스의 재료가 종이여서 절판 구조를 반영하면 더 단단한 박스집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0일 오후 서울시 중구 태평로의 한 지하보도에서 노숙인이 누에고치 모양의 종이박스집을 설치하고 있다. 이 박스집은 접어서 휴대할 수도 있다(작은 사진).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박스집엔 건축 원리뿐 아니라 '비 온 대지' 회원들의 바람도 담겨 있다. 이화여대 건축학과 3학년 김지희(21)씨는"누에고치에서 나비가 나오듯 노숙인들이 이 박스집에서 살다가 다시 건강한 사회인으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신씨 등은 박스집을 개발하기 위해 지난해 5월 노숙인의 잠자리에 대한 현장 조사를 했다. 설문지를 노숙인들에게 돌리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자기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든 노숙인들에게 50문항의 설문지는 무리였다. 이들은 방법을 바꿨다. 지난해 6월 노숙인들을 5일 동안 무작정 따라다니며 관찰했다. 매일 1명씩 정해서 아침 8시부터 잠드는 저녁 8시 정도까지 약 12시간을 노숙인 관찰에 보냈다.

신씨는 "거리에서 생활하는 노숙인도 프라이버시를 보장받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박스집은 이런 연구의 결과다. 노숙인들이 접어서 휴대하고 다닐 수도 있다. 박스집을 이용하는 노숙인 김모(50)씨는 "바람이 완전히 막혀 들어오지 않아서 따뜻하다"며 "지하도를 오가는 사람들 눈길도 의식하지 않게 돼 좋다"고 말했다.

'비 온 대지'는 11일 5개를 서울역에서 배부하는 등 7주간 35개를 무료로 나눠줄 계획이다. 이후엔 인터넷 홈페이지(www.beondegi.org)를 통해 개인 기부를 받는 대로 박스집을 더 만들어 나눠줄 예정이다. 한 노숙인 구호 단체 회원은 "누에고치집 처럼 노숙인들을 당장 돕는 일과 함께 장기적으로 그들이 노숙에서 벗어나 자립할 길도 마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출처]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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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未來2011. 12. 17. 17:32
잠자던 질문이 눈을 떴다. 무려 24년 만이다. 삼성의 창업주 고(故) 이병철(1910~87) 회장이 타계하기 한 달 전에 천주교 신부에게 내밀었던 종교적 물음이 언론에 처음 공개됐다. 24개의 질문은 A4용지 다섯 장에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신(神)이 존재한다면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가?”라는 첫 물음부터 “지구의 종말(終末)은 오는가?”라는 마지막 물음까지, 경제계의 거목이 던졌던 종교적 질문에는 한 인간의 깊은 고뇌가 녹아 있다. 그 고뇌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종교적 물음을 정면으로 관통한다.

 이 질문지는 1987년 ‘천주교의 마당발’로 통하던 절두산 성당의 고(故) 박희봉(1924~88) 신부에게 전해졌고, 박 신부는 이를 가톨릭계의 대표적 석학인 정의채(86·당시 가톨릭대 교수) 몬시뇰에게 건넸다. 정 몬시뇰은 답변을 준비했고, 조만간 이 회장을 직접 만날 예정이었다. 그러다 이 회장의 건강이 악화됐다. “건강이 좀 회복되면 만나자”는 연락이 왔지만, 이 회장은 폐암으로 한 달 후에 타계하고 말았다. 문답의 자리는 무산됐다. 정 몬시뇰은 20년 넘게 질문지를 간직했다. 그러다가 2년 전 제자인 차동엽(53·인천가톨릭대 교수·미래사목연구소장) 신부에게 질문지가 들어갔다. 차 신부가 여기에 답을 준비했다. 그 답을 모아 연말에 『잊혀진 질문』(명진출판사)이란 책을 낸다.

 8일 경기도 김포의 미래사목연구소에서 정 몬시뇰과 차 신부를 단독 인터뷰했다. 가톨릭 신자이자 서강대 총장을 역임한 손병두(70) KBS 이사장도 자리에 함께했다. 교계의 최고 원로인 정 몬시뇰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차 신부님에게 넘어갔네요”라고 운을 뗀 뒤 “이건 이병철 회장이 죽음을 앞두고 한 인간으로서 던졌던 인간과 종교에 대한 깊은 물음이다. 차 신부님이 요즘 세대의 젊은이들도 공유할 수 있게끔 잘 풀어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차 신부는 “몬시뇰께선 제 스승이시다. 종종 뵙고 교감한다. 몬시뇰께 배운 가르침을 제가 대신 풀어냈을 뿐이다”고 답했다. 손 이사장은 삼성그룹 비서팀에서 10년간 이병철 회장을 보필했다. 탁자 위에 놓인 질문지를 본 손 이사장은 “당시 회장 비서실에 있었던 필경사의 필체가 틀림없다. 딱 보니 알겠다. 이 회장께 보고서를 올릴 때면 필경사가 깔끔하게 다시 써서 올렸다. 오랜만에 이 글씨를 보니 참 반갑다”고 말했다.

 질문지를 손에 들고 쭉 훑어보던 차 신부는 “이 질문을 깊이 파고들어가 보라. 모든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던지는 종교적 물음과 만나게 된다”고 말했다. 마주 앉은 차 신부에게 물었다. 이병철 회장이 던졌던 인간과 종교, 그리고 신에 대한 ‘잊혀진 질문’을 24년 만에 다시 던졌다. 차 신부는 “이 질문지에는 지위고하도 없고, 빈부도 없다. 인간의 깊은 고뇌만 있다. 나는 그 고뇌에 답변해야 하는 사제다. 그래서 답한다”고 말했다.

글=백성호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첫 질문은 둘러가지 않았다. 바로 과녁의 정중앙을 향했다. “신이 있는가. 있다면 왜 나타나지 않나.” 역사 속에서 수없는 무신론자가 던졌을 물음이다. 무신론자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유신론자도 기도 속에서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이 회장의 첫 질문은 그렇게 단도직입적이었다.



 “우리 눈에는 공기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공기는 있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의 영역이 정해져 있다. 가청영역 밖의 소리는 인간이 못 듣는다. 그러나 가청영역 밖의 소리에도 음파가 있다. 소리를 못 듣는 것은 인간의 한계이고, 인간의 문제다. 신의 한계나 신의 문제가 아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가령 개미와 코끼리를 보라. 개미는 이차원적인 존재다. 작고,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에겐 평면만 존재한다. 입체도 개미에겐 평면이 된다. 그런 개미가 코끼리 몸을 기어 다닌다. 개미는 코끼리 몸을 느낀다. 그러나 코끼리의 실체를 파악하진 못한다. 왜 그런가. 개미의 인식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코끼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결국 개미는 코끼리를 모르는 건가.

 “아니다. 개미는 코끼리를 느낀다. 코끼리의 부위에 따라 다른 질감을 느낀다. 신과 인간의 관계도 비슷하다. 인간도 그렇게 신을 느낀다. 우리가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할 뿐이다. 신은 자신의 존재를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이미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현대 물리학에선 우주의 차원을 11차원이라고 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 너머의 차원까지 관통할 것이다. 3차원적 존재가 11차원적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겠나. 흑백TV로 3D컬러 영상물을 수신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성경에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돼 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처음 기록됐다. 그리스어로 ‘말씀’은 ‘로고스(Logos)’다. 로고스의 뜻이 뭔가. ‘원리’다. 다시 말해 ‘존재 원리’를 뜻한다. 그러니 요한복음서의 첫 구절은 ‘태초에 존재 원리가 있었다’가 된다. 우주에는 기가 막히게 섬세한 질서가 있다. 결국 그러한 존재 원리, 그리도 섬세한 질서의 근원이 무엇인가라는 거다.”

이병철 회장의 종교에 대한 24개 물음을 담은 질문지. A4 용지 다섯 장 분량이다.
●그 근원은 뭔가.

 “만물의 창조주로서 신의 존재는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신을 만날 건가의 문제다. 만나면 증명이 되는 거니까. 그럼 신을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가톨릭 신학생 시절, 수업 시간에 은사 신부님을 통해 고(故) 최민순(1912~75) 신부님의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최 신부님은 아침 수업에서 이런 시상(詩想)을 내놓았다고 한다. ‘꽃을 본다/꽃의 아름다움을 본다/꽃의 아름다우심을 본다.’ 이 구절을 듣는 순간, 제겐 충격이었다.”

●왜 충격이었나.

 “우주의 철리(哲理)가 사통팔달로 뚫리는 기분이었다. 꽃의 아름다움, 나무의 아름다움, 땅의 아름다움, 하늘의 아름다움이 모두 하나의 고백이다. 변화하는 이 아름다움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신 분이 아니면 누가 만들 수 있겠는가. 결국 한 송이 꽃을 통해서도 신을 체험할 수 있고, 그 체험이 자신에겐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되는 거다.”

이 회장의 물음은 ‘창조’에서 ‘진화’로 이어졌다. 신의 창조와 인간의 진화는 양립할 수 있을까. 아니면 철저하게 양자택일의 문제일까. 그건 신학과 물리학이 만나는 가장 현대적인 접점이기도 하다.



차 신부는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 150돌, 물리학자-신부의 열린 대화’라는 대담을 중앙일보(2009년 2월 5일자 21면, 9일자 25면)에서 한 적이 있다. 차 신부는 물리학계의 거두인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와의 대담에서 “신이 인간을 빚었나?”라는 물음에 소상하게 답한 바 있다. 당시 대담 내용을 끄집어내며 차 신부는 답을 이어갔다.

 “‘하느님이 실제 진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이해 방식은 3차원적 사고에 갇힌 거다. 그런 생각은 신앙적으로 더 큰 잘못이다. 초월적 존재의 하느님을 인간의 3차원적 사고 안에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걸 떠나 계신 분이다. ‘신이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건 단지 은유적 표현이다. 오랜 세월에 걸친 진화의 과정을 ‘흙으로 빚었다’는 말로 축약했다고 봐도 된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대립적 관계가 아니다. 지구의 환경, 우주의 환경은 끊임없이 변한다. 신이 창조한 생명체도 변화하는 환경에서 생존하려면 끝없이 진화해야 한다. 그런 진화를 인정한다. 그러나 진화론은 창조론이란 더 큰 울타리 안에 포함된 개념일 뿐이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무신론자가 늘어날까. 흥미로운 조사 결과가 있다. 1916년 미국 과학자 중 40%가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했다. 당시 조사를 했던 제임스 류바는 미래의 과학자는 무신론자 비율이 크게 늘어날 거라고 예측했었다. 그런데 1997년 영국의 과학잡지 네이처에 실린 연구 결과를 보면 딴판이다. 81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미국 과학자의 40%가 여전히 유신론자라고 나왔다. 그 81년간 과학 발전의 총량은 엄청났다. 그럼에도 신의 존재를 믿는 과학자의 비율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과학과 종교, 대립적 관계가 아닌가.

 “과학과 종교는 대립적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과학이 발달할수록 신의 섭리가 과학을 통해 더 명쾌하게 증명될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고 말했던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렇게 말했다. ‘약간의 과학(A little science)은 사람을 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러나 더 많은 과학(More science)은 인간을 다시 신에게 돌아가게 한다.’”

이 회장의 질문은 이제 ‘하늘과 땅’을 물었다. ‘신과 인간’을 물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사랑의 물결과 고통의 물결을 번갈아 물었다. 신이 사랑한다는데, 왜 우리는 고통스럽냐고. 신이 있는데, 왜 세상에 악인도 있느냐고. 그걸 물었다.



 “어쩌면 우리가 신을 사랑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바로 고통이다. 이슬람 최고의 신비주의 시인 루미(1207~1273)는 이렇게 말했다. ‘때로 우리를 돕고자, 그분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물이 흐르는 곳이면 어디든지/생명이 피어난다/눈물이 떨어지는 곳이면 어디든/신의 자비가 드러난다.’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한다. ‘신을 믿을 건가, 말 건가’조차도 선택의 대상이다. 고통의 뒤에는 선택이 있고, 그 선택 뒤에는 자유의지가 있다.”

●그럼 고통은 언제 오나.

 “고통은 주로 자유의지를 엉뚱하게 썼을 때 온다. 우리의 선택이 신의 섭리, 그 섭리의 궤도에서 벗어날 때 고통이 찾아온다. 그래서 고통은 일종의 ‘경고 사인’이다. 신의 섭리, 우주의 존재 원리, 그 궤도를 다시 찾으라는 신호다. 가령 불에 손을 넣으면 어떻게 되나. 뜨겁다. 고통스럽다. 그래서 재빨리 손을 뺀다. 만약 고통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손이 다 타고 만다. 고통과 불행과 죽음은 올바른 궤도를 찾기 위한 신호다.”



 “신이 악인을 만든 것이 아니다. 신은 자유의지를 주었을 뿐이다. 우리 같은 신부는 독신이라 잘 모르겠지만, 부부관계도 비슷하리라 본다. 어떤 부부는 상대방을 가두고 소유하려고 하고, 어떤 부부는 상대방을 믿고 자유를 준다. 최고의 사랑은 결국 상대방에게 자유를 주는 사랑이다. 그 자유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다. 그러니 신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지 않나. 그 사랑을 엉뚱하게 쓰는 이들이 악인이 될 뿐이다.”



 “‘죄’는 히브리어로 ‘하타(Hata)’,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다. ‘과녁을 빗나간 상태’란 뜻이다. 과녁이 뭔가. 기준이다. 어떠한 기준을 벗어난 상태가 죄라는 얘기다. 우주에 깃든 섭리, 그런 섬세한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이 죄다. 그럼 신은 왜 우리가 죄를 짓게 내버려두실까. 그 역시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은 1000년 동안 사람의 입을 통해 구전되던 이야기를 기록한 작품이다. 이것을 짜맞추고, 모자이크해 보니 어떤 그림이 나왔다. 그 그림을 봤더니 ‘하느님 그림’이었다. 긴 세월, 여러 사람, 다양한 음성을 통해 나온 말이 어쩌면 그렇게 합치될 수 있을까. 물론 표본오차 수준의 편차도 약간 있다. 그건 성경을 기록한 사람의 어투와 성격 때문이다. 신·구약성경에는 전체 이야기를 관통하는 일관된 기조가 있다. 그걸 볼 때 성경의 원저자는 저 위에 계신 분이고, 성령이고, 이 밑에 있는 사람들이 입과 손과 가슴을 빌려준 것이라고 본다.”

‘천주교’란 과녁을 향하던 이 회장의 질문은 이제 ‘종교’라는 더 큰 과녁으로 시위를 돌렸다. 종교가 뭔가, 왜 필요한가, 영혼이란 뭔가, 각 종교는 무엇이 같고, 또 무엇이 다른가. 불과 서너 가지 질문에 ‘종교학 개론’의 뼈대가 담겨 있다.



 “벼락이나 천둥이 칠 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신을 찾는다. 마취 직전, 수술대에 누운 이들도 기도를 한다. 무신론자도 슬픔에 직면하면 본능적으로 하느님을 원망한다. 그래서 ‘참호 속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는 말도 있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존재다. 그래서 무한을 동경한다. 영원을 갈망한다. 그런 염원이 하나의 형식이 됐을 때 종교가 된다.”

●종교는 인간에게 왜 필요한가.

 “인간은 영원을 찾다가 자꾸 벽에 부딪힌다. 부딪힐수록 무한에 대한 동경은 커진다. 결국 동경하던 무한성에 ‘신’이란 이름을 붙인 거다. 그 무한성을 인격체로 여긴 사람들이 그걸 숭배하게 되고, 도움 받기를 청하는 거다. 자신이 그 벽을 넘어설 수가 없으니까. 결국 인간은 종교라는 터널을 통해 영원을 갈망하는 거다.”



 “그리스 철학은 유신론이 아니라 자연철학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세 가지 혼이 있다고 한다. 생혼(生魂)과 각혼(覺魂), 그리고 영혼이다. 모든 생물의 중심에 생혼이 있다고 한다. 나무나 풀에도 생혼이 있다. 나무의 수명이 다하면 생혼도 죽는다. 다음은 각혼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감각하는 동물에겐 생혼과 각혼이 있다. 그리고 사람에겐 생혼과 각혼에다 영혼까지 있는 거다. 물질계를 초월하는 생명현상, 그게 영혼이라는 거다. 영혼이 제대로 작동할 때 우리는 본래의 인간에 더 가까워진다.”



  “크게 계시 종교와 자연 종교가 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계시 종교다. 힌두교와 불교는 자연종교에 속한다.”

차 신부의 설명은 간략했다. 이웃 종교에 대한 공개적인 평가라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항목이었다. 질문은 다시 ‘천주교’를 향했다. 이번에는 ‘구원의 범위’에 대해서였다. 종교가 없어도, 혹은 달라도 착한 사람들. 신은 그들을 어떻게 보는지, 이 회장은 물었다.



 “예전에는 ‘천주교밖에는 구원이 확실하지 않다’고 말했다. 거의 구원이 없다는 수준으로 얘기했다. 그러다 바뀌었다.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전환점이었다. 천주교가 좀 더 합리적으로 반성하고, 성찰하고, 다른 종교의 면면을 공부해 보니 천주교와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았던 거다. 그 후에 입장이 바뀌었다.”

●어떻게 바뀌었나.

 “‘타 종교인의 구원 여부는 신이 결정할 문제다. 우리는 모른다’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65년 이전에는 개신교도 다른 종교와 구분 없이 남으로 봤다. 그런데 65년 이후에는 ‘갈라진 형제’라고 부른다.”



 “앞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대신하겠다. 내용이 겹친다.”



 “죽음 너머의 세계는 객관적 검증이 불가능하다. 이 물음에는 나의 주관적인 신념으로 답을 할 수밖에 없다. 이 한계를 미리 고백한다. 교황 요한 23세는 임종 때 이런 말을 남겼다. ‘이제 나의 여행 채비는 다 되었다.’ 우리는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표현한다. 왔던 곳으로 다시 갔다는 뜻이다. 육체는 흙에서 왔으니까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느님에게서 왔으니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강한 증거가 있나.

 “12사도의 죽음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자발적인 죽음을 택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고, 안드레아는 X자형 십자가에서 순교했다. 12사도가 모두 그랬다.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들은 죽음을 불사했을까. 답은 하나다. ‘영원한 생명은 있다.’ 이걸 증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12사도의 죽음이야말로 강력한 증거다.”



 “개그 프로를 보면 ‘이 더러운 세상’이란 유행어가 있었다. 불공정한 사회라는 거다. 악인이 버젓이 잘살고 있을 때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의심한다. 부조리 현장에서 신이 침묵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공정 사회를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탐욕이다. 한국이 불공정 사회라면 그걸 책임지고 개선해야 할 주체는 신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다. 앞서 말했듯이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까지 기회를 주는 거다. 죽기 전에 악인이 회개할 수도 있고, 새롭게 출발할 수도 있는 거다. 여기서 우리는 오히려 신의 자비를 본다. 벌은 사후 또는 종말 때 주어진다.”

‘한국 최고의 부자’가 부자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성경 속의 부자와 바늘구멍. 이 회장의 물음은 우리에게 ‘진정한 부자란 무엇인가’를 되묻는다.



 “그건 ‘나눔’을 강조한 예수님의 메시지다. 부자에도 여러 종류의 부자가 있다. 이웃과 잘 나누는 부자가 있다면 당연히 천국에 가지 않겠나. 주위를 보라.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 선택에 따라 선인이 되기도 하고, 악인이 되기도 한다. 100% 선인도 없고, 100% 악인도 없다. 부자도 늘 그런 선택 앞에 선다. 그 선택에 따라 부자는 선인이 될 수도 있고, 악인이 될 수도 있다.”



 “이 물음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탈리아에서 직접 살아보면 상당히 질서가 있다. 물론 마피아가 있지만, 그건 극소수의 범죄집단일 뿐이다. 이탈리아 국민의 평균적 윤리의식, 그들의 기준은 엄정한 편이다.”



 “이 질문에 100% 동의한다. 다를 바가 없다. 똑같다. 이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가 어우러질 때 조화로운 신앙이 가능하다. 이 셋 중 하나가 지나치게 발달하면 몽상가나 다혈질 행동파가 될 수도 있다. 주로 ‘오직’을 강조하는 사람이 광신도가 될 소지가 많다. 오직 믿음, 오직 실천, 오직 성장, 오직 복지, 오직 우(右), 오직 좌(左), 오직 사랑, 오직 정의도 다 위험한 것이다. 종교든, 이념이든 보편성을 잃을 때 미치게 되는 거다.”



 “공산주의는 천주교 신자가 택한 것이 아니다. 천주교에서 이탈한 무신론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거다. 공산권에서 종교는 탄압의 대상이었다.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협력 관계나 우호적 관계가 아니었다.”

1989년에 사회주의권 몰락이 시작됐다. 이병철 회장의 질문은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기 2년 전에 던진 것이다. 질문의 시점과 답변의 시점에 시대적 시차는 있다.



  “통계청 조사를 보면 종교인의 범죄 비율보다 비종교인의 범죄 비율이 더 높다. 그나마 종교인이 범죄 수치를 낮춘 거다. 그럼에도 이 질문이 시사하는 바를 깊이 수용할 필요가 있다. 종교인이 더 사회정화 기능을 하지 못하고, 더 성숙하게 살지 못하고, 좀 이기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형식만 그리스도인이지, 내용은 안 바뀐 경우도 많았다. 빛과 소금 역할, 부족했던 건 사실이다.”



 “교황의 무오류권(무류권)을 말한다. 가톨릭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오해가 있다. 무오류권은 교황좌에서 특별한 교리, 엄중한 진리의 문제에 관해 천명할 때 무오류권을 발동한다. 주로 기준이 애매할 때 이 기준을 따르라고 천명하는 것이다. 아주 드물게 발동된다. 그러나 무오류권이 발동된 사안도 시간이 지나면 수정될 수 있다. ‘타 종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도 무오류권이 발동된 사안인데, 결국 수정했다.”



 “신부는 예수님을 대리해 양떼를 돌보는 사람이다. 1965년(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만 양떼였다. 65년 이후에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양떼다. 수도원 소속인 수녀와 수사는 다 수도사다. 그들은 자신을 전적으로 투신해 영혼의 갈무리를 하는 사람이다. 신부와 수녀의 독신은 ‘나는 여기에만 헌신합니다’라는 서원이다. 기혼과 독신이 섞여 있다가 13세기부터 사제는 독신이 됐다. 수도사는 그 이전부터 독신수도 생활을 했다.”



 “이 문제는 역사성 안에서 봐야 한다. 우리나라에 노동 착취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전태일씨 등은 하루 15시간 이상 노동했으니까. 그런데 모든 기업주가 착취자라고 하면 곤란하다.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는 어디나 있다. 좋은 기업인도 있고, 나쁜 기업인도 있다. 그건 개별적 사안이다. 교회는 자본주의 체제를 부인하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이미 실패했다. 다만 교회가 자본주의 체제의 부작용이나 폐해에 관심을 갖는 건 맞다. 거기에 약자와 소외된 자가 있기 때문이다.”



  “종말이 언제일까. 내가 죽는 날이 종말이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오메가 포인트(종말의 시점)가 있을 거다. 지구의 수명이 다하는 날이 올 테니까. 성경에는 종말이 있다고 돼 있다. 그런데 이 종말을 보는 시각이 좀 다르다. 파국만은 아니다. 구원을 위한 최종 추수의 시간으로도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갈린다. 종말을 기대하는 사람과 두려움에 떠는 사람. 신앙인의 특권은 종말을 희망사건으로 본다는 것이다. 종교는 결국 종말 너머를 향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질문은 ‘마지막’에 관한 것이었다. 타계 한 달 전, 24개의 질문을 던진 이 회장에게 그 마지막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질문지는 우리에게 그걸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마지막’이라 부르는 곳, 종교에선 ‘또 하나의 시작’이라고 부르는 곳. 어쩌면 마지막과 시작이 하나일지 모르는 곳. 그곳을 묵상케 한다. 동시에 이 회장의 질문은 마지막을 향해 한발씩 나아가는 우리가 ‘오늘’을 어떻게 살 건가 하는 치열한 물음으로 되돌아온다.

이병철 회장

삼성 창업주인 이 회장은 1910년 경남 의령에서 출생, 87년 타계했다. 호는 호암(湖巖). 유교적 가풍의 집안에서 성장했고, 일본 와세다대에서 공부했다.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하고, 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하는 등 일제시대에 민족자본을 형성했다. 여기에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이란 호암의 지향이 깔려 있다. 평소 호암은 “내가 뽑은 인재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아름답고 고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인재제일(人材第一)’과 ‘사업보국’은 삼성그룹의 경영철학이 됐다. 초대 전경련 회장을 역임했다.

 호암은 타계 2년 전에 폐암 진단을 받았다. 진단 직후에 호암은 일본인 저널리스트 야마자키 가쓰히코와 만나 ‘좋은 죽음’이란 주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호암은 “인간인 이상 생로병사를 피할 수는 없겠지요. 불치병이라면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적어도 살아서 아등바등하는 흉한 꼴만은 남들에게 보여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라고 답했다. 그걸 듣고서 야마자키는 “사는 순간까지 삶만을 생각하며,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구도자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저서에 『우리가 잘사는 길』 『호암자전(湖巖自傳)』 등이 있고, 호암 평전으로 『크게 보고 멀리 보라』(야마자키 가쓰히코 지음)가 있다.

차동엽 신부

1958년생. 서울 관악산 기슭의 달동네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지게로 연탄과 쌀을 배달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난 때문에 공고에 진학했고,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 다시 가톨릭대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했다. 1991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세례명은 로베르토다.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수학하고,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성서신학으로 석사, 사목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인천 가톨릭대 교수이며, 성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에 “차 신부의 활동을 지지한다”고 말하곤 했다. 연구소 후원 계좌로 ‘추기경’이란 직함 없이 ‘김수환’이란 이름만 적어서 100만원을 입금한 적도 있었다. 이 사실은 뒤늦게 확인됐다.

 차 신부의 대표 저서는 『무지개 원리』다. 지금껏 150만 부가 팔린 천주교계 최대 베스트셀러다. 이 밖에 『바보 Zone』 『뿌리 깊은 희망』 『행복선언』 등이 있다. 20대부터 간염과 간경화를 앓고 있지만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출처] 백성호 기자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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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未來2011. 11. 30. 12:00

인터뷰-콘래드 울프람 울프람연구소 전략·국제담당 이사


2009년 영국 출신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울프람이 만든 ‘울프람알파’는 여러 모로 독특한 검색엔진이다. 우선 구글이나 네이버 같은 전통적인 검색엔진과 달리 웹 페이지를 검색하지 않는다. 사용자가 질문을 던지면 체계적으로 구축한 방대한 정보를 기초로 연산을 통해 원하는 결과를 제시한다. 중요도순으로 정렬된 링크 페이지가 아니라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주는 것이다. 울프람알파에 검색엔진 대신 ‘지식 엔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애플이 음성인식 개인 비서 서비스 ‘시리(Siri)’를 공개하면서 울프람알파가 또 한 번 주목받고 있다. 시리가 사용자들의 질문 중 일부를 울프람알파를 통해 처리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20세 물리학 교수’로 명성을 떨치던 스티븐 울프람 박사가 1987년 울프람연구소를 세워 최고경영자(CEO)로 변신할 때부터 그를 눈여겨봤다. 

스티브 잡스는 울프람연구소의 첫 제품이자 수학과 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소프트웨어 중 하나가 된 ‘매스매티카’ 개발에도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콘래드 울프람(41) 울프람연구소 전략·국제담당 이사는 “시리에 울프람알파가 포함된 것은 스티브 잡스가 준 마지막 선물”이라고 말했다. 콘래드 울프람 이사는 스티븐 울프람 박사의 친동생으로 그 역시 케임브리지대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 ‘글로벌 인재 포럼’ 참석 차 방한한 그를 지난 11월 1일 광장동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만났다.

약력:1970년 영국 옥스퍼드 출생. 케임브리지대 펨브룩 칼리지 물리학 및 수학 석사. 1991년 울프람연구소 유럽 대표(현). 1996년 울프람연구소 전략·국제 담당 이사(현).


애플이 시리에 울프람알파를 넣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시리는 새롭고 혁신적인 인터페이스입니다. 음성인식 기능이 있어 질문을 타이핑할 필요가 없어요. 궁금한 것을 그냥 말하면 됩니다. 애플의 관심을 끈 것은 울프람알파가 매우 구체적인 답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죠. 연산을 통해 질문에 딱 맞는 정확한 답을 줍니다. 이게 음성인식 기능을 탑재한 모바일 플랫폼에 잘 맞아요. 알고 싶은 것을 물으면 거기에 맞는 답을 바로 얻을 수 있거든요. 검색은 다르죠. 검색은 다른 사람을 위한 답변에서 찾아요.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이 이전에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찾는 거죠. 

트래픽이 어느 정도나 됩니까.

아이폰4S가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엄청난 로드가 발생하고 있어요. 스티브 잡스가 준 큰 선물이죠. 스티브 잡스는 우리가 1988년 출시한 소프트웨어를 ‘매스매티카’로 이름 짓는데도 아이디어를 줬어요. 항상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죠. 울프람알파와 시리가 연결된 것이 그가 죽기 하루 전 공개됐습니다. 애플과 우리는 세계를 보는 방식에서 많은 것을 공유했어요. 훌륭한 디자인을 갈망하고 첫 번째 해법이 아니라 정확하고 옳은 해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어요. 제품을 쓰는 사용자들의 작업 흐름에도 크게 신경을 씁니다.

스티브 잡스가 울프람리서치에 투자했습니까.

우리는 비공개 기업입니다. 폐쇄적인 투자자 그룹을 갖고 있죠. 스티브 잡스가 직접 금전적인 투자를 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큰 도움을 줬어요. 뛰어난 아이디어나 열정 같은 것들이죠. 내 형인 스티븐 울프람이 블로그에 스티브 잡스를 추모하는 글을 쓰기도 했어요.

스티브 잡스에 대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습니까.

얼만 안 된 일이에요. 매스매티카를 애플의 iOS 플랫폼에 실으려고 준비하고 있었죠. 애플이 iOS에 충분히 개발돼 안정된 기술만 넣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했어요. 애플에서 ‘오케이’를 해야 하거든요. 그 일로 애플 실무자를 만나고 있는데 갑자기 스티브 잡스가 전화를 했어요. 전형적인 행동이죠. 그는 전화기를 들고 바로 전화를 걸어요. ‘우리는 절대적으로 iOS에 매스매티카가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그는 그것이 애플에, 그리고 교육의 미래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열정적으로 설명했어요. 스티브 잡스는 아이패드 같은 태블릿 PC가 사람들을 가르치는 교육에서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봤어요. 

울프람알파 개발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여했습니까.

현재 울프람연구소에 500여 명의 직원이 일합니다. 그 중 4분의 1 정도가 울프람알파팀이죠. 컴퓨터 프로그래머도 있고 여러 영역의 지식을 분류하고 수많은 정보 중 어떤 것을 보여줄지 결정하는 각 분야 전문가와 사서도 있어요. 인터페이스를 다듬거나 정보들을 연결하고 부드러운 작업 흐름을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거든요. 울프람알파는 우리가 25년 동안 축적해 온 기술 위에서 탄생한 겁니다. 울프람알파는 매스매티카의 응용 프로그램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매스매티카가 없으면 울프람알파를 만들 수 없어요. 우리가 지난 20~25년 동안 이룬 혁신이 없었다면 매스매티카도 존재할 수 없죠. 

기존 검색엔진과 어떻게 다릅니까.

예를 들어보죠. 영국과 덴마크의 인구밀도를 비교해 보려고 해요. 울프람알파에 질문을 입력하면 금방 일목요연하게 답이 나오죠. 덴마크의 인구밀도가 영국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죠. 구글로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해요. 한 나라의 인구밀도를 검색해 링크된 웹 페이지에서 수치를 확인하고 다른 나라도 똑같이 반복해 계산해야죠. 울프람알파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그냥 질문을 던지면 즉각 답이 나옵니다.

울프람알파는 어떻게 작동합니까.

웹 이전에는 기초 정보를 확보하는 것이 정말 어려웠어요. 하지만 웹 이후에는 오히려 너무 많은 정보가 골칫거리죠. 정보의 가치를 평가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것이 중요해졌어요. 우리는 세계 정보를 연산 가능한 형태로 체계화하는 것에서 기회를 발견했어요.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거죠. 

세계의 모든 정보를 연산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장기적인 프로젝트지만 궁극적으로는 가능하다고 확신해요. 오늘날 정부나 기업, 개인이 모두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갖고 있어요. 연산 가능한 정보의 가치는 갈수록 올라가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갈수록 가치가 떨어질 겁니다. 울프람알파는 다양한 영역의 정보를 끊임없이 체계화하고 있어요. 지리 정보에서 음식·과학·경제까지 거의 매일 새로운 영역이 추가 됩니다.

울프람알파가 구글을 넘어설 수 있다고 보십니까.

‘검색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콘퍼런스에 패널로 참석하곤 합니다. 나는 이게 잘못된 제목이라고 생각해요. 문제는 검색의 미래가 아니라 답변의 미래거든요. 사람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답변 아닙니까. 검색은 이를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죠.
 
구글을 비롯한 검색엔진들이 그동안 많은 발전을 통해 정보에 접근하는 길을 넓혀줬어요. 하지만 그건 하나의 프로세스일 뿐이죠. 울프람알파는 전혀 다른 프로세스를 제시합니다. 둘은 각자 장점이 있어요. 상호 보완적이죠. 둘을 결합할 때 더 좋은 답을 얻을 수 있어요. 





장승규 기자 sjkang@hankyung.com·이진원 기자 zinone@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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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未來2011. 11. 24. 12:34

[직지代母·외규장각 도서 반환 주역 故 박병선 박사 (1928~2011)]
활자 역사 뒤집은 직지의 발견 - 44년전 프랑스에서 찾은 책
'1377년 금속으로 찍은 활자본' 맨 뒷장 글귀 보고 전율
금속활자 입증위해 활자 굽다 세 번이나 집에 불낼 뻔…
도서관 창고에 묻힐 뻔한 의궤 - 베르사유궁에서 찾아내 약탈 145년 만에 고국에 안겨

1967년 어느 날 프랑스 국립도서관. 검은 머리칼을 짧게 친 39세의 한국 여성이 먼지 쌓인 책 한 권을 찾아냈다. 직지심체요절. 그때까지 중국 책으로만 알려져 있던 책의 맨 뒤에서 '1377년 금속으로 찍은 활자본'이라는 내용을 접한 순간 그녀의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이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5년 뒤 그녀는 파리에서 열린 '책의 해 기념 고서(古書) 전시회'에서 "직지는 1377년 금속으로 찍은 세계 최고(最古) 활자본"이라고 공개해 전 세계 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항의가 빗발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독일 구텐베르크가 1455년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는데 그것보다 78년이나 앞서 한국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만들었다고?"

 왼쪽은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받았음을 특종 보도한 조선일보 1972년 5월 28일자 신문. 오른쪽 사진은 그해 한국을 찾은 박병선 박사가 서울 인사동 통문관에서 국내 서지학자들과 함께 직지심체요절 영인본(影印本)을 확인하는 모습이다.
소란의 주인공은 당시 프랑스 국립도서관 임시 직원이던 재불(在佛) 서지학자 박병선(朴炳善). 박씨는 이 전시회와 유럽 내 '동양학자대회'에서 직지심체요절이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 78년 앞선 최고 활자본임을 입증해 국제적 공인을 받았다.〈본지 1972년 5월 28일자 1면 특종 보도〉

가난한 유학생에서 직지 대모로

23일 별세한 '직지(直指) 대모' 박병선 박사는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1955년 홀로 프랑스로 유학 갔다. 한국에서 유학 비자를 받은 여성 1호였다. 소르본대학과 프랑스고등교육원에서 각각 역사학과 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67년부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했다. 학창 시절 스승인 이병도(1896~1989) 교수가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고서들을 약탈해 갔다는 얘기가 있는데 확인이 안 된다. 유학 가면 한 번 찾아보라"고 한 이야기를 가슴에 새긴 박 박사는 10여년간 도서관·박물관 등을 뒤지고 다녔다.

그렇지만 외규장각 도서의 행방은 묘연했다. 그러다 먼저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한 것. 그녀는 고활자본을 해독하기 위해 백지상태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거의 매일 밤을 새워 아침에 도서관에 출근하면 동료들이 '눈이 왜 빨개? 너 어제 울었니'라고 묻기 일쑤였다.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활자를 직접 만들어 찍어보다 세 번이나 집에 불을 낼 뻔했다.

 지난 2008년 ‘조선조의 의궤’개정판을 내려고 한국을 찾은 박병선 박사는 “자료를 찾으려고 몇 년을 두고 뒤지다가 마침내 찾아내는 기쁨이 어떤 건지 아세요? 길거리를 가다가도 그걸 생각하면 벙글벙글 웃음이 나옵니다”하며 웃었다.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감자로도 만들고, 지우개로도 만들고…. 그러다 인쇄소에 가면 예전에 금속으로 만들었던 활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인쇄소에 부탁한 금속활자를 직접 잉크에 찍어봤더니 책에 찍힌 활자 형태와 같은 것을 보고 이것이 금속활자라는 확증을 한 것이죠."

의궤와의 운명적 만남

본격적으로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다니던 1975년 베르사유궁에 파손된 책을 보관하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더니 사서가 푸른 천을 씌운 큰 책을 한 권 들고 나왔다. 책을 펼치니 조선 왕실 기록물인 '의궤(儀軌)'였다. 1866년 프랑스 군대에 약탈당한 후 도서관 창고에서 '파지(破紙)'로 분류돼 있던 외규장각 도서를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한국 여자'가 외규장각 문제를 제기하자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반응은 차가웠다. 국립도서관의 비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1979년 사표를 강요받았다. 사실상 해고였다. 한국 정부도 그녀를 못 본 척했다. 해고된 뒤에도 박씨는 '개인' 자격으로 10여년을 도서관에 매일 출근하며 외규장각 도서 내용 파악에 매달렸다. "점심 시간에 자리를 비우면 책을 일찍 반환하라고 할까봐 밥도 안 먹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직원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외규장각 도서를 펼쳐 놓고 있는 그녀를 '파란 책에 파묻힌 여자'라고 불렀다. 외규장각 도서 표지가 파란색이었기 때문이다.

올해 6월. 박씨는 마침내 외규장각 도서 297권이 145년 만에 모두 고국으로 귀환하는 것을 지켜봤다. 외규장각 도서 귀환 환영식에 참석차 귀국한 그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이럴 때 쓰는 말일 것 같다"며 감격하면서도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의궤가 한국에 영원히 남도록, 다시는 프랑스에 가지 않도록 여러분 모두가 노력해주길 바랍니다."

일 많아 바쁘다고 했는데

박씨는 생전 인터뷰에서 "긴 시간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한국 정부와 학자들의 냉대였다"고 했다. "동양학자대회 때 직지를 발표하고 나니 어떤 한국 학자는 '네가 왜 서지학에 손을 대느냐. 한국 서지학자들도 못했는데 네가 어떻게 자신만만하게 그런 소릴 할 수 있느냐'고 따졌다. 외규장각 도서문제를 제기했을 때는 한국 외무부에서 왜 이런 것을 자꾸 끄집어내서 자기네들 골치 아프게 하느냐며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고 했었다.

그녀가 고국의 따뜻함을 느낀 것은 역설적으로 병마(病魔) 때문이었다. 지난 2009년 귀국했던 그녀는 뜻밖의 직장암 선고를 받았다. 가족도 돈도 없이 막막했던 그녀의 사연이 알려지자 곳곳에서 성원이 답지했다. 덕택에 지난해 수술도 무사히 마쳤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연구할 게 많아 프랑스로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오로지 우리 고문서 찾기와 의미 밝히기에만 매달렸던 그녀였다. 일제 강점기 때 프랑스 주재 일본 영사관에서 본국에 보낸 외교문서를 해독해 독립운동사의 사각지대를 메우겠다며 연구 의욕을 보였지만 그 꿈은 후학들에게 숙제로 남겨졌다.

[출처]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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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未來2011. 10. 15. 11:30
 김윤덕 기획취재부 차장

바람의 딸, 이번엔 유엔으로 행군하다 
한비야, 600만달러 '긴급기금' 다루는 유엔 자문위원으로… 그녀가 말하는 '뜨거운 도전'
"청춘들이여 이유없는 아픔은 없다 _ 지금 오르막을 오르니까 종아리가 당기는 거다"

한비야(53)가 11월, 유엔(UN)으로 가는 '기차'를 탄다.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9년을 마감하고 '환승역'에 머문 지 2년 만이다. 유엔 중앙긴급대응기금(CERF:Central Emergency Response Fund) 자문위원이 그가 할 일. 매년 600만달러에 달하는 유엔 긴급기금이 효율적으로 배분되고 쓰이는지 평가하고 보고하는 일이다. 유엔행이 결정되고 나서야 한비야를 만날 수 있었다. 월드비전을 그만둔 이후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해온 그였다. 흥미로운 건, 2년의 공백 중에도 한비야는 여전히 20대가 닮고 싶은 여성의 상위순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말의 속도가 더욱 빨라진 걸 보니, 유엔이 한비야를 다시 흥분시키고 있는 게 분명했다. "NGO 출신으로, 그것도 여성이 유엔 자문위원 18명 중 1명이 되는 일이 흔하지 않잖아요? 아, 내 앞에 또 어떤 일이 펼쳐질지 진짜 기대돼요." 유엔은 이른바 '한비야 키즈'들이 대거 진출해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세계 곳곳의 구호현장 체험을 엮은 그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를 읽고 자란 'G세대', 즉 글로벌 세대들이 그들의 '교주'이고 멘토였던 한비야를 맞이하는 셈이다.

한비야를 서울 불광동 집에서 만났다. 산을 좋아하는 그녀가 "북한산 밑에 있는 집"이라며 뻑적지근하게 자랑하던 작은 아파트였다. 오지여행가에서 긴급구호활동가로, 다시 유엔맨으로 변신하게 된 소감을 묻자,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말했다. "나도 내가 앞으로 커서 뭐가 될지 정말 궁금해요.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지금부터 시작 아닐까요? 하하!" 한비야는 여전히 뜨겁고, 발랄하고, 수다스러웠다.

'안티 한비야'

―아무리 유엔이라도 '자문위원'이란 직함이 '열혈' 한비야에겐 좀 한가한 자리 아닌가 싶다.

"한국에서 자문, 어드바이저의 위상이 어떤 건지는 몰라도 나는 정말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한다. 사무총장 직속으로, 우리가 평가하고 보고한 서류들이 곧장 사무총장에게 전달된다. 뭣보다 각국 외교부 관료들이 차지하던 자리에 나 같은 NGO 현장 경험자를 뽑은 게 이례적이다. 관료적인 데다 뭘 해도 대륙별 안배가 제일 중요한 유엔이 변화하고 있다는 징후다. 나는 형식적인 자리, 일 안 하는 자리엔 안 간다."

―NGO 출신이 유엔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나.

"구호현장에 있을 때 유엔에 불만이 많았다. 권위적이라고, 1시간 일하고 10시간 보고서 쓴다고. NGO 입장에서 보면 유엔 사람들 하는 일이 시간 낭비고 거들먹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유엔이란 조직의 비효율적인 부분을 찾아내고 개혁해볼 생각이다."

―유엔이 한비야의 인생 계획에 들어 있었던 건가.

"물론이다. NGO는 밑바닥 현장에서부터 그림을 그려나가는 일이고, 유엔은 스카이라운지에서 큰 그림을 보며 내려오는 일이다. 자문위원이 아니라도, WFP(유엔세계식량계획) 동아프리카 현장본부장에 지원서를 내려고 했다. 3년간의 자문위원 임기가 끝나면 유엔기구나 다른 기구를 통해 현장으로 갈 계획이다. 이번 일로 우리나라의 위상이 무척 높아졌다는 걸 실감했다. 실제로 구호개발 분야에서 대한민국은 희망의 상징이다. 전쟁 난 나라에 가면 내가 엄청 환대받는다. 대한민국에서 왔기 때문이다. 전쟁을 겪은 나라가 원조국이 되어 도와주러 왔으니 그들에겐 우리가 희망인 거다."

반기문 사무총장의 입김이 작용했을까.

"유엔이 사람을 그런 식으로 뽑지 않는다. 반 총장님이 내 책의 왕팬인 건 맞다.(웃음) 외교부 장관 하실 때 인도네시아 쓰나미 현장에 함께 간 적이 있다. 장관의 비행기에 NGO 일꾼들을 다 태우고 가시더라. 의전상 그런 일은 없지 않나. 실용적이고 매우 합리적으로 일하시는 분이다."

―2009년 '월드비전'을 그만두고, 미국 터프츠대학 플레처스쿨로 유학을 떠났다.

"현장은 본부가 보내온 설계도대로 움직인다. 그런데 현장에서 실현하기 어려운 정책들이 곧잘 내려와 당황할 때가 많다. 징징대기만 할 게 아니라 내가 직접 구호이론을 공부해서 현장에 맞는 정책을 직접 설계해보고 싶었다. 마침 '인도적 지원에 관한 석사과정' 프로그램이 있어 지원했다."

―쉰한 살에 다시 학생이 된 셈이다.

"하늘이 노래지더라.(웃음) 밤새우는 게 다반사고, 매일같이 페이퍼 쓰고 토론 수업 준비하느라 진이 빠졌다. 공부는 정말 재미있었다. 공부에 때가 있다고들 하는데, 공부하고 싶을 때가 공부해야 할 때다."

―9년간 몸담은 월드비전을 그만두었을 때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한비야가 월드비전을 찼다에서 시작해 한비야가 지구를 세 바퀴 반 돈 게 진짜냐, 그때 멘 배낭 무게가 진짜 40㎏이냐, 아프간에서 구호활동한 게 사실이냐까지 다양하더라.(웃음) 자기검열이랄까. 모두 나를 단단하게 해준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월드비전은 햇병아리였던 내게 독수리의 날개를 달아준 고마운 단체다. 아무것도 검증되지 않은 오지 여행가를 가능성 하나만 믿고 긴급구호의 세계로 이끌어준 월드비전을 지금도 사랑한다."

 한비야가 다시 길을 떠난다. 이번엔 유엔이다. 쉰세 살의 그녀는“신이 내게 준 선물 중에 아직 풀어보지 않은 것이 많다. 그래서 흥분된다”고 말했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튀어봐야 지구

'바람의 딸'이란 애칭처럼 한비야는 태생이 유목민이다. 서른다섯 살, 부장 승진을 코앞에 두고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7년간 세계 오지를 떠돈 뒤 2001년부터는 월드비전의 긴급구호팀장으로 전 세계 분쟁지역을 찾아다녔다. 사이사이 '환승역'에 있을 때에는 중국 유학, 미국 유학을 단행했다. 서울 들어와 있는 날에도 집에 붙어 있지 않는다. 백두대간을 종주하거나, 하다못해 북한산이라도 다녀온다. 삶이 역마살 그 자체다.

―역마살이 당신을 국제구호활동가로 만들었다.

"가슴 뜨거운 일이었다. 불 같은 내 성향과 잘 맞았다. 혼자 하는 일 아니고 여럿이 동참해서 하는 일이라 더욱 즐거웠다."

―뭐든지 뜨거운 걸 좋아하나 보다.

"미지근한 일엔 매력을 못 느낀다. 100℃로 끓어오르며 하는 일, 내 능력의 최대치를 쏟아붓는 일이 좋다."

―한비야의 등장으로 나눔, 기부, 자선이 시대의 트렌드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와 궁합이 잘 맞았다. 세계 경제 10위권에 오른 한국이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된 시기였다. 내가 들어선 시기에는 이미 우리 국민이 도와줄 준비가 돼 있었다. 그 안에 있는 숯불에 나는 바람만 살살 지펴주었을 뿐이다." 

―자선이 패션(fashion)이 되어가는 느낌도 없지 않다. 돈 잘 버는 연예인들이 자선하지 않으면 지탄받는 분위기다.

"자선은 강요해선 안 된다. 사람마다 타이밍이 있는 거다. 한 달에 5000원이든, 만원이든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해야지. 한 번에 10만원 내는 것보다 매달 5000원씩 내는 게 현장에는 훨씬 도움이 된다."

― 연예인이 구호현장에 뜨거운 물이 안 나와 샤워할 수 없다고 불평한 사실이 보도돼 물의를 빚었다.

"구호현장에 처음 왔거나, 평소에 그런 현장을 갈구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비난할 일은 아니다."

―구호활동은 매우 거칠고 위험한 일이다.

"위험천만한 일들이 많지만, 난 이상하게도 구호현장에 있을 때 가슴이 뛰고 에너지가 넘친다. 나는 현장에 있을 때 가장 예쁘다. 하하!"

―끔찍한 일들을 많이 목격하지 않나.

"밥이 없어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던 아기들 모습은 지금도 선연하다. 쓰나미 현장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구의 시체와 만났다. 하루아침에 8만명이 목숨을 잃은 파키스탄 대지진 현장에 다녀와서는 얼굴 왼쪽에 마비현상이 와서 두 달간 병가를 냈다. 악몽도 꾼다. 무너진 건물 밑에 내가 들어가 있다. 밖에 사람 기척이 있어 소리를 지르는데 누가 내 다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구호팀원들은 사후 반드시 심리치료를 하게 돼 있지만, 돌아와 보고서 쓰고 모금활동 해야 하니 한가하게 병원 갈 시간이 없다."

―언제나 씩씩할 것만 같은 한비야도 악몽을 꾸는가.

"나도 왕창 얻어맞고 링 위에 쓰러져 있는 권투선수가 된 기분일 때가 있다.(웃음) 그래도 '긴급구호' 하면, 우리의 손길이 닿아서 살아 웃게 된 아이들, 맨 처음 간 아프간에서 내 손으로 영양죽을 먹여 살려낸 아기의 얼굴이 떠오른다. 구호활동을 하다 보면 '우리'의 범위가 대한민국,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된다. 튀어봐야 지구더라."

나도 루저(loser)였다

'따지고 보면 늦깎이라는 말은 없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뒤졌다고 생각되는 것은 우리의 속도와 시간표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고, 내공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직 우리 차례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철에 피는 꽃을 보라. 개나리는 봄에 피고 국화는 가을에 피지 않는가.'〈'중국견문록' 중에서〉

중국엔 두 번이나 가서 공부했다.

"세계일주 마지막 여행국이 중국이었다. 중국을 좀 더 알고 싶더라. 오십이 되기 전에 마스터하려고 했던 5개 국어 중 마지막 언어가 중국어이기도 했다. 마흔 살에 중국어 배워 어디에 쓸 거냐는 사람도 있었지만 여든까지 앞으로 40년 동안은 쓸 수 있으니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웃음)"

―1999년 중국서 공부하고 돌아와 펴낸 '중국견문록'은 유학생들 필독서라더라.

"중국이란 나라에 대해 정보가 별로 없을 때다. 거기에 뛰어든 한비야가 어떻게 공부했고, 어떻게 낯선 문화를 즐기며 삽질하고 살았는지 솔직하게 썼더니 위안받고 용기를 얻더라."

―10년 뒤 다시 갔다.

"중국어를 우리말처럼 잘하고 싶었다. 중국은 구호개발 분야의 떠오르는 후원국이라 매우 중요한 나라다. 중국과 서방세계의 완충역할을 한국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도 한비야를 아는 사람들이 많다더라.

"작년에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가 중국어판으로 나왔다. 나를 '뻬이예제(비야언니)'라고 부르며, 네댓 시간을 기다려 사인을 받고 간다. 나한테 돈 주는 사람도 있다. 구호현장에 갖다주라면서.(웃음)"

―자전에세이 '그건, 사랑이었네'를 보니 대학입시에 떨어져 6년간 백수생활한 대목이 인상적이더라. 한비야 인생에 실패는 없는 줄 알았다.

"20대 초반, 내게만 모든 문이 닫혀 있는 것 같은 시절이 있었다. 학원비·생활비를 스스로 벌어야 해서 네 개의 아르바이트를 했고,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자는 건 사치였다. 밤을 꼬박 새워 공부하고 일하러 나가면 쏟아지는 졸음을 쫓느라 눈 밑에 물파스를 수없이 발랐다."

―'비틀거리지 않는 젊음은 젊음도 아니다'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더라. '방향이 정해졌다면 가는 길은 아무리 흔들려도 상관없다'고도 했더라. 그런데 자신이 가야 할 길은 어떻게 찾나.

"내 경우, 책이었다. 책을 통해 온갖 인생을 겪어보면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았던 것 같다. 용기란,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분명히 알 때 샘솟는다. 산에 '그냥' 가고 싶은 사람은 그날 비가 오면 산에 가지 않는다. 하지만 산을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은 비가 와도 간다. 진심으로 그 일이 하고 싶은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10대에 책에 재미 붙이는 게 어디 쉬운가.

"고등학교 때 친구와 '1년에 100권 읽기' 내기를 한 적이 있다. 순전히 100권을 채우려고 닥치는 대로 읽다 보니 저절로 재미가 붙더라. 인류의 보고(寶庫)라는 거대한 호수에 빨대를 꽂고 세상의 지혜와 지식, 이야기를 빨아올리는 즐거움이 너무나 컸다. 그래서 10대들 만나면 살살 꼬드긴다. 그들이 좋아할 만한 책을 안겨주고 읽게 한다. '책 권하는 본부'가 생기면 자원해서 본부장 하고 싶다.(웃음)"

이기는 경기보다 멋진 경기

―갈 길을 찾았어도 목적지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노력해야지. 단, 조급해할 이유는 없다. 서울서 부산 가는 방법은 수십 가지다. 언제까지 공부하고 취직해서 결혼해야지 하는 정형화된 인생 시간표에 주눅들 필요 없다. 나야말로 완전 늦깎이 아닌가. 대학은 물론 직장은 남들보다 10년 늦게 갔고, 마흔 살에 구호활동 초보자로 들어갔다."

―절망하는 20대가 많다.

"지금 오르막을 오르니까 침이 마르고 종아리가 당기는 것은 당연하다. 마침내 오르고 나면 시야가 탁 트인다. 인생의 어떤 순간도 쓸데없는 순간은 없다. 씁쓸함, 당혹감, 열등감들이 나중에 다 에너지가 된다. 나는 우리 젊은이들이 숫자로 매겨지는 등수에 자신을 평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생은 상대평가에 의한 선발고사가 아니라 절대평가에 의한 자격고사다."

―'지도밖으로 행군하라'가 곧 100만부를 돌파한다.

"구호현장에서의 경험은 하느님이 나만 좋으라고 그런 기회를 준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긴급구호현장에 들어간 2001년부터 매해 엄청난 재난이 일어났고, 그곳에서 벌어진 감동의 드라마들을 타인과 나누고 싶었다. 책을 내고 나면 하느님께 기도한다. '잘 팔리게 해달라'가 아니라 '세상에 선한 영향을 미치게 해달라'고."

―베스트셀러가 여러 권이라 인세가 엄청나겠다.

"미국 유학은 독자들이 보내준 거나 마찬가지다.(웃음) 책을 낼 때마다 목표를 세운다. '바람의 딸' 인세로는 장학금을 만들었고, '그건, 사랑이었네'의 인세는 '세계시민학교'를 세우는 종자돈으로 썼다."

―성공한 삶이다.

"이기는 경기가 아니라 멋진 경기를 하는 게 내 목표다. 내가 성공한 사람으로 꼽힌다면, 그 이유는 이제까지 사람들이 성공의 잣대로 삼았던 기준이 다양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사는 삶, 자기도 즐겁고 남에게도 도움이 되는 삶이 새로운 기준으로 떠오른 거지. 나는 잘난 여자가 아니다. 한발한발의 힘,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을 믿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말이 빠르니까 뭐든 덜렁대며 빨리빨리 사는 줄 아는데, 글도 천천히 쓰고, 일도 천천히 밤을 새워서 한다. 다행히도 내겐 몰입의 유전자가 있다."

―몰입이 성공의 비결이란 뜻인가.

"나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잠은 안 자도 되고, 라면만 먹고 살아도 된다.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한 곳으로 몰아주는 거다. 인생에 아궁이가 다섯 개라고 치자. 장작을 다섯 아궁이에 골고루 나누어 때면 죽도 밥도 안 된다. 한 아궁이에 모두 몰아줘야 가마솥에 물이 끓지 않겠나."

―여자는 결혼하면 한 아궁이에 몰입해서 장작을 땔 수 없다.

"하하! 결혼도 못한 주제에 이런 일도 못하면 안 되니까 몰입하는 거다. 맞다. 남편이란 아궁이, 자식이란 아궁이가 없으니 세계일주도 하고 긴급구호도 했다. 그렇다고 내가 결혼을 포기한 건 아니다. 다정한 남자, 산에 가는 남자, 내가 할 줄 아는 언어 중에 하나만 할 줄 아는 남자면 된다. 나이 불문, 국적불문이다."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시절, 아프리카 남동부 나라 말라위에서 구호 활동을 하는 한비야. 그는 구호 현장에서 만난 아이 중 4명을‘엄마’로서 후원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맏딸에게선 6개월에 한 번씩 편지가 와요. 새로 얻은 네팔의 막내아들은 정말 사랑스럽죠.”/ 푸른숲 제공
꾸준히, 그리고 마침내

'사십대 중반의 케냐인 안과의사에게 물었다. 당신은 아주 유명한 의사이면서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런 험한 곳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러자 이 친구, 어금니가 모두 보일 정도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과 재능을 돈 버는 데만 쓰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무엇보다 이 일이 내 가슴을 몹시 뛰게 하지요.'〈'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중에서〉

―주말마다 백두대간을 종주한다고 들었다.

"지난해 추석에 시작해 지금 오대산까지 갔다. 하루 12시간씩 걷는다. 내 인생을 키운 건 8할이 산이다. 산은 내게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준다. 산은 한발한발 올라가는 것이다. 매일 꾸준히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산은 가르쳐준다. 힘들다힘들다 하면서 오르막을 오르지만 그때 폐활량이 커지고 마침내 시야가 넓어진다."

―산악회 같은 팀을 따라가는 건가.

"대개는 혼자서 간다. 야영을 해야 할 때만 서너 명 그룹을 이뤄서 가고."

―혼자 가면 무섭지 않나.

"만의 하나 사고가 나는 거다. 나머지 9999는 안전한 거지.(웃음) 길눈이 어두워 길을 잃을까 봐 걱정할 뿐이다. 어제도 늦게까지 산행하면서 뱀을 여러 마리 봤는데 머리가 쭈뼛 서긴 하더라."

―산을 가르쳐준 분이 아버지라고 썼다.

"내게 아버지와 산은 동급이다. 중학교 때 돌아가셨으니 아버지와 산 기간이 15년이지만 그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고 그 생각과 가치, 재능을 물려받았다. 세계지도를 사주시며 세계를 무대로 살아보라고 한 분도 아버지였다. 아버지 서가에 일본책이 많았는데 다른 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아버지가 참 멋져보였다. 언어에 대한 관심이 그때 생겼다."

―'바람의 딸'이 되고 싶어하는 여성들이 많다. 여행하고 책을 쓰지만, 한비야만큼 성공한 사람은 아직 못 봤다.

"자기가 오래전부터 하고 싶은 일을 결행한 것 자체로 성공 아닌가. 중요한 건 그 일을 목숨 걸고 하느냐는 것이다. 단지 패션을 따라가거나 흉내내는데 그치면 안 된다. 그리고 나를 운이 엄청 좋은 사람이거나 뭘 해도 잘되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들 다 하는 연애가 나는 안된다. 우리 집? 완전 난장판이다. 마루에 등산장비가 널려 있다. 1번을 잘하면, 못하는 2번이 있는 거다. 무수히 안 됐던 일들이 내게도 많았다."

―유엔에 가면 '비야쌤', '비야언니'라고 부르며 따르던 '한비야 키즈'들을 만나겠다.

"10대부터 내 책을 읽고, 무언가를 결심한 뒤 숱하게 이메일을 보내던 친구들이다. 워싱턴·뉴욕·베이징에서도 그들을 만났다. 내 경험을 딛고 더 높은 곳에 올라가 시야를 바라보겠지. 나와 사회적 유전자를 나눈 동지들이다. 내년 1월부터는 월드비전 있을 때 세운 '세계시민학교'의 교장으로도 활동할 거다. 머릿속에 세계지도를 갖고 사는 아이들, 세상 사람들을 공동운명체이자 친구라고 여기며 세계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려 노력하는 세계시민들을 키워보고 싶다."

―유명세에 비하면 광고는 거의 안 찍더라.

"세계시민학교 세우려고 대기업 광고에 딱 한 번 출연했다. 지금도 라면 광고에서 자동차 광고까지 섭외가 들어오는데 모두 거절한다. 뭔가를 결정할 때 나를 지켜보고 있을 아이들을 언제나 생각한다."

안철수 돌풍도 불던데, '국민언니' 한비야 돌풍을 일으켜볼 생각은 없나.

"농담이지? 내가 제일 못하는 게 조직을 만드는 거다. 제일 잘하는 것만 하고 살기에도 시간이 없다."

―유엔까지 진출했으니 이 길로 죽 가면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오르겠다.

"설마! 나는 아이들보다 딱 반발짝 앞서가는 언니, 누나로 충분하다."

―벌써 쉰세 살이다.

"산을 올라갈 때 보이지 않던 꽃이 내려오는 길에 보이는 것처럼 50대에도 분명 하느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 있다고 믿는다. 내 인생의 정점은 죽는 순간이 될 거다. 묘비명에 '몽땅 쓰고 가다'로 적고 싶다. 신이 내게 준 재능과 체력과 에너지를 몽땅 쓰고 가고 싶다."

[출처]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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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未來2011. 7. 12. 09:42
노나카 이쿠지로 日 히토쓰바시大 명예교수
도쿄=이지훈 경제부장 jhl@chosun.com

그대, 아직도 '보이지 않는 손'을 믿는가

"일본한국에 비해 속도가 느립니다. 하지만 혁신을 매일 매일 축적해 매우 질 높은 기술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품이나 소재 같은 게 매우 강합니다. 그것은 지속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니까요."

3·11 대지진 이후 일본이 세 번째의 '잃어버린 10년'을 맞는 게 아니냐는 비관론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피터 드러커'로 불리는 경영 석학 노나카 이쿠지로(野中郁次郞·76) 히토쓰바시(一橋)대 명예교수는 일본의 숨은 힘을 은근히 자랑했다. 그를 만나니 영화 스타워즈의 요다가 떠올랐다.

노나카 교수는 일본과 한국이 서로 다른 점이 뭐냐는 질문에 "일본이 초식계(草食系)라면 한국은 육식계(肉食系)라고 말할 수 있죠"라고 대답했다. "일본은 육식계는 아니지만, 끈질긴 측면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탁월성을 추구하는 쇼쿠닌(職人·전문기술자)의 도(道), 그런 강한 점이 있는 것 같아요.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의 프로세스이기 때문에 좀처럼 흉내를 낼 수도 없습니다."

한국의 기업에 대한 의견을 묻자 그는 삼성 이야기를 꺼냈다. "삼성은 철저하게 일본에서 배웠습니다. 동시에 철저하게 분석했습니다. 삼성은 글로벌화와 스피드에서 일본을 넘어섰습니다. 지역전문가 제도까지 두면서 정말로 현장에 밀착했지요. 일본은 글로벌과 현장의 지(知)에서 삼성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노학자는 한국과 삼성의 약점을 점잖게 지적했다. "삼성의 '빨리빨리' 문화는 속도가 빠르면서 동시에 매우 엄격합니다. 항상 '푸시(push)' '푸시' 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지속가능성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계속 긴장만 하면 피로가 오게 마련이니까요." 그는 삼성에 소재와 부품, 상품을 모두 아우르는 지(知)의 종합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단순히 모듈(module)을 조합해 내는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스피드 코리아의 한계

삼성은 최초이자 최고다 철저히 日을 모방하면서 상대를 넘어서려는 노력
그러나 그들도 사람인데 얼마나 버틸지는 의문


노나카 교수는 이 대목에서 자신의 전매특허가 된 조어(造語)인 '암묵지(暗默知·표현하기 힘든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지식)'라는 표현을 꺼냈다. "암묵지의 축적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이 걸립니다. 아무래도 인간이니까요. 스피드와 중장기적인 지속력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합니다."

―최근 일본 경제가 부진한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디지털화와 모듈화입니다. 이것이 진전되면서 고도의 암묵지가 없어도 물건을 만들 수 있게 됐죠. 이와 함께 중국, 한국, 대만 기업이 성장했습니다. 둘째, 스피드와 글로벌화입니다. 일본은 글로벌화에 늦었습니다. 글로벌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일본이 높은 품질을 자랑하는) 고도의 상품은 필요없습니다. 세계 모두가 그런 상품을 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쇼쿠닌의 관점에서 일본의 기준을 세계에 고집했죠." '기술 오타쿠'를 지나치게 추구하는 바람에 세계 시장과 눈높이가 맞지 않게 되고 고립됐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이 철저하게 일본을 모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철저하게 분석하며 디지털화·모듈화했다고 말했다. 일본의 기술을 완전히 따라잡은 것은 아니지만 (일본에 이어) 세계 2위라도 미국·유럽보다는 수준이 높았기에 세계 시장에 통할 수 있었고, 스피드와 글로벌화에서도 일본을 넘어섰다고 그는 설명했다.

노나카 교수는 일본이 글로벌화에 늦었던 이유로 오만(傲慢)과 과거의 성공 체험을 꼽았다. "성공이 실패의 원인이 된 셈이죠. 일본에선 내수시장에서 그럭저럭 먹고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기업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로 나갈 수밖에 없죠."

하지만 그는 일본의 실패 경험을 반성하면서도 일본의 부진을 가져온 바로 그 쇼쿠닌, 아날로그, 초식계 문화가 언젠가 다시 일본의 부흥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창업자를 중심으로 톱-다운(top-down)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속도가 매우 빨랐던 반면 일본은 바텀업(bottom-up)구조라 속도가 느렸다. 그러나 그는 "혁신이라고 하는 것은 톱다운보다는 바텀업이 아닐까요"라고 반문했다.

그는 일본에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리더라고 말했다. "지금 일본에는 중장기 경영의 지(知)가 많이 있습니다. 다양한 회사와 다양한 지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종합할 수 있는 리더 혹은 프로듀서, 프로젝트 리더를 얼마나 빨리 조직적으로 육성하느냐에 일본의 장래가 달려 있습니다." 노나카 교수는 메이지유신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나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 혼다자동차 창업자처럼 지(知)를 종합할 수 있는 리더가 없다는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일본이 그 동안의 '모노즈쿠리(장인정신을 발휘해 최고의 물건을 만드는 것)'에서 '고토즈쿠리(애플과 같이 디자인·소프트웨어·서비스를 종합해 소비자에게 높은 가치의 체험을 주는 것)'으로 옮겨가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고 말했다.


◆"경영이란 공동선을 위해 탁월성을 무한히 추구하는 과정"

노나카 이쿠지로 교수가 일본식 경영의 부활을 믿는 또 하나의 이유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식 경영의 신화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미국식 경영은 역시 이익을 어떻게 극대화 하느냐 하는 경제학적인 사고에 매우 가깝습니다. 무한경쟁이라고 하는 이상향이 있고, 거기서는 누구도 초과 이익을 얻기 힘들기 때문에 일부러 균형을 깨는 불완전 상태를 만들어 이익을 얻는다는 생각입니다. 마이클 포터의 경쟁전략이라고 하는 게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엔론에서 서브프라임까지 차례 차례 이런 생각이 파탄을 맞고 있습니다."


美德의 경영

미덕은 돈이 아닌 ‘가치’… 각 직원들의 꿈이 세상의 꿈이 되는 과정
기업의 이윤과 共同善이 일치될 때 비로소 新天地가 열려


노나카 교수의 경영 이론의 핵심은 그의 책 제목이기도 한 '미덕(美德)의 경영'이다. 단순히 이윤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이익이나 가치와 합치하는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기업 경영을 뜻한다.

"돈은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입니다. 금전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가치가 될 수 없습니다. 공동체 속에서 탁월성(卓越性·excellence)을 무한히 추구하면서 자신을 완성시키는 과정, 그것이 경영입니다."

그는 "경영이라고 하는 것은 비전(vision)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전이란 것은 좀 더 큰 사회적 관계라고 할까요. 공동선(共同善·common good)을 실현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개별 기업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과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비전을 추구하는 결과로 공동선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결과적으로 이익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는 공동선을 추구하다 보면 이익으로 연결되는 이유 중 하나로 사회와의 관계성이 깊어지면서 혁신의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을 들었다.

"개별 기업의 이익을 추구하는 차원이 아니라 사회를 위한다는 차원이 되면 사회와의 관계성이 매우 넓어지게 됩니다. 최근 이러한 것을 '에코시스템(eco system·생태계)'이라고도 표현하죠. 그 관계성이 넓어짐에 따라 대중의 지식이 공유하고 융합돼 혁신의 가능성이 매우 커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보다 큰 이익을 창출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죠. 세상을 위해 일한다는 명분이 있으면 직원들도 더욱 열심히 일하겠다는 동기부여가 되고요."

그는 GE의 예를 들었다. "GE에서는 에코매지네이션(ecomagination·환경친화적 상상력)이라는 말을 씁니다. 에콜로지(생태계)와 이매지네이션(상상력)을 결합한 용어입니다. 이런 미래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담은 표현입니다. 이런 목표를 보면 직원들이 절로 동기부여가 되고, 큰 목표를 향해서 나서게 되면서 관계성이 커져 혁신(革新)의 가능성도 높아지는 것이죠."

자료: 노나카 이쿠지로 '지식경영' / 그래픽=정인성 기자

◆돈은 언제나 수단일 뿐

"마이클 샌델, 아시죠? '정의(正義)란 무엇인가'를 쓴 하버드대 교수." 노나카 교수는 샌델 교수의 이야기로 옮아갔다.

"샌델 교수는 기본적으로 공동체주의자예요. 우리는 사회의 공동선에 영향을 받았고, 끊임없이 공동선을 증진해야 한다는 겁니다. 철학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계보를 잇고 있는 건데요…."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 철학까지 번져갔다.

―미덕이란 무엇인가요.

"철학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프로네시스(phronesis)입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공익을 위해 최선의 행동을 선택하고 실행하는 능력입니다. 요즘 영어로 하면 실천적 지혜(practical wisdom), 신중하게 실천하는 것(prudence)이 됩니다. 일본어로 한다면 현려(賢慮), 그러니까 현자(賢者)의 사려분별을 뜻합니다. 공동체의 선(善), 공동선(共同善)이라고 말할 수 있죠."

―미덕의 특징은.

"미덕은 가치입니다. 가치는 절대로 수단이 아닙니다. 가치는 그것 자체를 추구하는 것에 절대적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행복이나 자기실현이 그렇죠. 반대로 돈은 언제나 수단일 뿐입니다. 절대로 가치가 아닙니다."

―기업의 이윤과 공동선은 모순되지 않나요.

"아니요. 기업 이윤과 공동선은 공존할 수 있습니다. 대립과 모순이 생길 경우 높은 차원에서 대립을 융합하고, 모순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신천지(新天地)가 열립니다. 이와 같은 변증법을 거치면서 기업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일치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어떤 미래를 만들겠다고 하는 비전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는 "미덕의 경영이란 기업이 번 돈으로 사회에 공헌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기업의 비전 그 자체가 사회적 공동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고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노나카 교수는 미덕의 경영 뿌리를 일본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미덕의 경영은 공동선을 향하여 탁월성을 무한히 높여가는 과정이라고 했죠. 메이지유신 당시의 하급 무사들이 그랬습니다. 결코 지위가 높지 않은 중간관리자(middle manager)인 그들은 공동선을 위한 무한한 자기희생의 무사도(武士道)를 발휘했어요. 사카모토 료마가 대표적입니다."


◆흔들리는 미국 경제, 하지만 애플과 잡스를 보라

노나카 교수는 미국식 경영이 기업을 '돈 버는 기계(money making machine)'로 취급했기 때문에 세상도, 사람들도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神話는 깨졌다

각자 이익 위해 달리면 모두 득 본다는 가설
서브프라임 사태를 보라 ‘자유시장주의’는 거짓말

그러나 美엔 애플도 있다… 기술과 예술이 만날 때 삶이 얼마나 달라지는가


―미국 경제가 이렇게 된 이유는 뭔가요.

"미국은 원래 청교도정신이 강했습니다. 특히 동부를 중심으로 퓨리터니즘(puritanism)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쇼쿠닌(職人)처럼 투철한 장인정신을 가진 전문 기술자도 많았죠. 그래서 물건을 남달리 잘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경제의 축이 제조업에서 금융업으로 옮겨가면서 암묵지를 잃어버리게 됐습니다. 뛰어난 요리사의 손맛과 같이 스스로 배우기도 어렵고, 남에게 전하기도 어려운 암묵지는 기업 경영에서 완전히 배제됐습니다. 금융공학과 같이 IT 기술로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지식에만 몰두했어요. 그러다가 위기를 맞게 된 거죠."

노나카 교수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면 보이지 않는 신(神)의 손에 의해 사회의 이익으로 연결된다는 가설이 무너져내렸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는 미국에 애플과 같은 기업과 스티브 잡스와 같은 기업가가 있기에 아직 희망이 있다고 했다.

"애플은 스티브 잡스가 말했듯 기술과 인문학의 접점에 서 있는 회사입니다. 좋은 제품을 통해 좋은 문화를 온 세상에 퍼뜨립니다. 좋은 문화를 온 세상에 퍼뜨리기 위해 좋은 제품을 만듭니다. 그게 애플의 비전이자 그들이 추구하는 공동선입니다. 기술과 예술이 함께 있죠. 애플은 아주 세밀한 것까지 알고 있는 쇼쿠닌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디자인을 보세요. 아름다움이 들어있습니다."

그는 신이 난듯 말을 계속 이어갔다.

"아이팟(i-Pod)을 보세요. 액정, CPU(중앙처리장치), 소프트웨어라는 물건의 집합체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걸로 놀게 하고, 일하게 합니다. 유니크한 경험이라는 가치를 물건 속에 담았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어요. 돈 버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캘리그라피(calligraphy·서체)에 관심을 뒀었죠. 이때 배운 서체를 애플의 폰트(font) 개발에 활용했습니다. 아날로그 지식이 디지털 지식과 결합한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야말로 실천적 지혜를 가진 리더입니다. 스티브 잡스와 혼다 소이치로는 정말 닮은 점이 많습니다."

76세의 석학은 어떤 꿈을 갖고 있을까. 그에게 던진 마지막 질문이었다.

"슘페터는 유명한 혁신이론을 만들었습니다. 슘페터를 넘어서는 이론을 만들고 싶습니다."


노나카 교수는…
동양인 유일 세계적 '비즈니스 구루 20'


‘일본의 피터 드러커’로 불리는 지식 경영의 대가. 도쿄 출신으로 와세다대(정경학부)를 졸업하고 UC버클리에서 경영학 박사를 취득했다. 1996년 발간한 저서 ‘지식창조기업’은 전미(全美) 최고저술상을 수상했다. ‘1위의 패러다임(2004년)’이라는 책이 한국에 소개된 후 국내 기업 임직원들이 책에 나온 기업을 찾아가 벤치마킹하는 열풍이 불었다. 2008년에는 월스트리트저널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즈니스 구루(guru·사상적 지도자) 20명’에 그를 선정했다. 동양인으로는 유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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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未來2011. 7. 12. 09:32
스톡홀름(스웨덴)=금원섭 기자 capedm@chosun.com

매장 점원도 임원 승진시키고···망하는 기업은 절대 안살린다
훗날 호랑이가 될지라도… 내 자리 대신할 'Next Me' 키워라
칼-요한 페르손 CEO가 들려주는 '스웨덴의 별' H&M의 경영 이야기

6월 23일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 1년 중 해가 가장 긴 하지(夏至)를 기념하는 축제기간이 시작됐다. 북유럽의 태양은 하루 20시간씩 빛났다. 거리마다 사람들이 넘쳐났다. 상점들은 폐점 시간을 넘기며 물건을 팔았다. 늦은 저녁 레스토랑에선 "1시간 30분 기다려야 자리가 난다"고 했다.

작년 스웨덴의 경제성장률은 5.4%. 독일(3.6%)을 압도하는 EU(유럽 27개국) 최고의 성장률이다. 올 1분기에도 6.4%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6월 11일 자에서 이런 스웨덴을 '북극성(North Star)'이라고 표현했다.

스웨덴은 무상 교육과 평생 소득을 보장하는 고(高)복지사회다. 하지만 이 나라야말로 밀턴 프리드먼류(類)의 시장주의를 미국보다 더 철저하게 적용해온 국가다. 기업에 해고의 자유를 보장하고, 유럽 최저 수준의 법인세(26.3%)를 적용한다. 고용 보장을 앞세워 나랏돈으로 기업을 구제하는 정책도 배제한다. 스웨덴을 대표하던 볼보와 사브의 승용차 부문은 그렇게 해외에 팔려나갔다.

스웨덴은 어떻게 강한 성장 동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스웨덴 스톡홀름 증권시장에서 볼보를 대체한 성장 동력을 발견할 수 있다. 2005년 볼보, 2007년 에릭슨을 뛰어넘어 스톡홀름 증시의 시가총액 1위(570억달러)에 올라선 패션기업 H&M(Hennes & Mauritz). 지난 5년간 연평균 매출액(154억달러)에서 세계 패스트패션업계 1위. 연평균 영업이익률(23.3%)은 세계 최강으로 꼽히는 애플(21.7%)을 넘어섰다.

H&M의 경영 철학은 '경쟁과 공존'으로 요약된다. 완벽한 평등 문화와 완벽한 경쟁 문화, 이런 풍토 위에서 장기 고용을 약속하는 공존 문화는 시장과 복지라는 두 바퀴로 질주해온 스웨덴의 국가 철학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래서 H&M을 읽으면 스웨덴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다. 창업 가문의 3세인 칼-요한 페르손(Karl-Johan Persson·36) CEO를 만나 '스웨덴의 별' H&M의 경영 이야기를 들었다.

스웨덴 모델을 이야기할 때 어떤 사람은 복지와 평등을, 어떤 사람은 시장과 경쟁을 강조한다. 하지만 스웨덴에서 복지와 시장, 평등과 경쟁은 같은 선상에 있다. 복지는 기업(시장)의 성장 위에서만 가능하고, 경쟁은 인간이 평등한 지표에 올라섰을 때 모두가 동의하는 화려한 성과를 이끌어낸다. 스웨덴은 평등과 경쟁의 연금술에 능숙한 나라다. 볼보와 에릭슨을 제치고 스웨덴 최고 기업으로 부상한 H&M은 이런 스웨덴의 DNA를 기업 내부에 가장 성공적으로 구현한 기업이다.

H&M은 2007년 호주 출신 팝스타 카일리 미노그를 비치웨어 모델로 세웠다. / AP
완전한 평등

스톡홀름 H&M 본사 3층의 화이트룸(White room). 'H&M의 심장' '영감의 도서관(library of inspiration)'으로 불리는 디자인팀의 창작 공간이다. 15개 국적의 디자이너 140명이 세계 40개국 2200개 점포에 뿌려지는 패션 아이템을 쏟아낸다. 이곳의 책임자는 앤-소피 요한손. 1987년 매장 파트타임 여성 판매원으로 입사해 H&M의 디자인 담당 글로벌 임원으로 성장했다.

입사 전 그는 패션을 공부한 일이 없다. 판매원으로 일하던 1990년 당시 디자인 책임자였던 마가레타 반 덴 보쉬에게 자신의 디자인 포트폴리오를 제시하고 디자인실에 발탁됐다. 반 덴 보쉬는 요한손을 후계자로 키웠고, 2008년 디자인 책임자 자리를 요한손에게 물려줬다. 반 덴 보쉬는 지금은 크리에이티브 어드바이저로 일한다. 요한손은 H&M을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큰소리로 말할 수 있는 완전한 수평 조직"이라고 말했다.

H&M은 독특한 근무 원칙을 갖고 있다. CEO 이하 본사 간부와 스태프는 한 해 두 번 이상 점포에서 판매 업무를 해야 한다. 파트타임 직원들이 간부에게 자신을 선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회사 입장에서도 현장의 인재를 발탁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한다. 요한손도 이렇게 기회를 잡은 사람이다. 지금은 수많은 파트타임 직원들이 '나도 당신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그에게 디자인 포트폴리오를 보여준다.

직원들은 그를 '앤-소피(이름)'라고 부른다. 그도 직원의 이름을 부른다. 직책, 나이는 상관없다. 상하(上下)의 언어가 다른 한국과 일본의 직원들도 예외가 없다. '혜정' '미에코' 하는 식으로 이름만 부른다. 심리적 장벽을 제거해 완전한 수평 조직을 만드는 창업 이래의 기업 문화다. 요한손은 "그래야 기탄없이 말할 수 있고, 그래야 내부에서 내 자리를 물려줄 인재를 발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완전한 경쟁

"할아버지(창업자 얼링 페르손)는 인재를 발굴하는 능력이 뛰어났어요.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지켜보다가 '당신은 이런 일을 해보면 좋겠다'고 말했지요. 그러면 사람들은 '경험이 없어 그런 일을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고 말해요. 그때 할아버지는 '경력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당신은 금방 배울 거야'라고 말하고, 보직을 맡겼어요. 이게 우리의 중요한 전통이지요."

3대 CEO 칼-요한 페르손을 만난 곳도 H&M의 심장부 화이트룸이었다. 그는 비서도, 홍보 담당자도 동행하지 않고 홀로 나타났다. 180㎝를 훌쩍 넘는 키, 하얀 얼굴에 푸른 눈동자. 몸에 딱 붙는 청색 면바지에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우리가 만든 옷"이라고 했다. 신발은 발목까지 올라오는 갈색 스니커즈. 왼손에는 아이폰과 검은색 가죽지갑을 움켜쥐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본 '사람의 올바른 자세'란 무엇일까? 여기서 H&M의 다소 복잡한 경쟁 철학이 나온다.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발탁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홀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팀이 그를 키우는 것이다. CEO에서 점장(店長), 관리 부문 매니저까지 책임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중요한 의무가 있다.

'넥스트 미(Next Me)'. 내가 없어도 내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후계자 2~3명을 육성하는 것이다. 훗날 내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호랑이'라도 옆자리에 두고 키워야 한다. 자신의 자리를 두고 부하와 경쟁하는 구도를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후계자로 발탁된 부하는 상사의 수준에 오르기 위해, 즉 언제든지 상사가 다른 보직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페르손 CEO는 이것을 "팀플레이, 팀워크"라고 했고 "할아버지가 본 직원의 올바른 자세"라고 했다. 스웨덴의 평등은 이런 것이다.

"점장의 임무 중 하나는 자신의 다음 보직을 생각하고 자신의 일 일부를 의식적으로 후계자에게 맡기는 겁니다. 그리고 6개월에 한 번씩 전 직원들을 개별 면담해 그들의 희망을 듣는 것이지요. 이런 품성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일도 대부분 해낼 수 있어요. 빨리 배우고 자신을 계발해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새로운 일이라도 직급에 관계없이 걸맞은 인재를 우리 내부에서 뽑을 수 있지요."

그 역시 여름마다 이틀씩 매장에서 판매업무를 한다. 그때 희망을 가진 직원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매달 한 번씩 해외 지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의 아이디어를 듣는다. 경영의 후계자를 고르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는 '내부 발탁'을 고집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그래야 직원들에게 '회사가 당신을 믿는다'는 의식을 심을 수 있지요."

블룸버그
점장이 6개월마다 전 직원 면담
직급 관계없이 내부서 인재 뽑아
정규·비정규직·나이·연봉 불문
5년 이상 근무하면 장려금 적립
완전한 공존… 최강 기업으로 우뚝


완전한 공존

인터뷰를 위해 방문한 H&M 본사에서 만난 유일한 남성은 페르손 CEO였다. 디자인 담당 글로벌 임원인 앤-소피 요한손, 언론 담당 직원인 카밀라 에밀손 포크 그리고 화이트 룸에서 만난 디자이너들 모두가 여성이었다.

실제로 H&M의 직원 중 79%가 여성이다. 관리직도 71%에 달한다. 고위직으로 올라가도 여성비율이 거의 줄지 않는 것이다. 글로벌 임원 중에도 인사 담당 산나 린드버그, 커뮤니케이션 담당 크리스티나 스텐빈켈, 일본 지사장 크리스틴 에드먼 등 여성이 많다.

페르손 CEO는 "우리 회사가 여성들이 특별히 관심을 갖는 산업에 속하는 탓도 있지만 매장에 훌륭한 여성 인재가 많기 때문에 관리직에도 그만큼 여성이 많다. 우리는 성별(性別)을 보지 않고 능력과 태도를 본다"고 말했다.

이 회사의 여성 중시는 스웨덴의 국가 철학이 반영돼 있다. 여성이 경제 활동에 동등하게 참여해야 국가 역량도 강화된다는 생각이 스웨덴의 남녀 평등정책의 바탕에 깔려 있다. 이를 위해 출산과 육아를 남녀가 분담할 수 있도록 해주는 복지제도가 마련돼 있다. 여성도 남성과 함께 평등한 경쟁의 장으로 들어가 공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투자유치(IR) 담당 글로벌 임원 닐스 빈게. H&M을 그만두고 3년 동안 다른 기업에서 일하다가 회사의 요청을 받고 복귀한 사람이다. H&M은 회사 내부에서 적합한 인재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 헤드헌트업체를 통해 새로운 사람을 채용하지 않는다. 전직 사원 중에서 우선적으로 스카우트하는 원칙에 따른다. 공존의 기회를 현직 사원들뿐 아니라 전직 사원들에게까지 넓힌 것이다.

H&M에서 공존은 팀, 팀워크라는 용어로 표현된다. 페르손 CEO는 "나는 '나의 팀(my team)'과 함께 일한다. 그 팀에는 본사의 글로벌 임원, 해외 지사장 그리고 모든 직원이 포함된다. '우리의 팀워크'가 매일 매일 H&M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H&M은 올해부터 5년 이상 근무한 모든 직원을 대상으로 장려금을 적립해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목표는 장기 고용이다. 10년 이상 근무하면 그동안 적립된 장려금을 일시에 지급받을 수도 있고, 계속 적립해 뒀다가 62세 이후에 지급받을 수도 있다. 정규직·비정규직, 직급, 나이, 연봉 액수를 묻지 않고 근속기간에 따라 고르게 혜택을 받는다. 페르손 CEO는 이렇게 말했다.

"서로 다른 방법으로 H&M에 기여한 사람들이 있고 우리는 그들에게 조금 더 돌려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H&M의 수익 일부가 직원들에게 돌려진다. 5년 이상 H&M에서 일을 하면 수익 일부를 받을 수 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직급이 무엇이든, 경력이나 소속 국가가 어디이든 같은 것이다. 이것이 H&M 방식이다."


H&M은 어떤 회사
명품 디자인 低價에 제공… 세계 40개국에 매장 2200개


H&M은 1947년 얼링 페르손(Erling Persson)이 창업한 스웨덴의 패스트패션(fast-fashion) 기업이다. 계절별로 상품을 기획하는 일반 의류업체와 달리 최신 트렌드를 재빨리 포착해 패스트푸드처럼 빠르게 생산해낸다는 뜻에서 패스트패션이라고 불린다. 패스트패션 기업들은 직접 생산한 의류를 자체 유통망을 통해 판매하기 때문에 '제조·직매형 의류 전문점(SPA)'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스웨덴의 H&M, 스페인의 자라(ZARA), 미국의 갭(GAP), 일본의 유니클로(UNIQLO) 등이 대표적이다.

H&M은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본사에서 상품 기획, 디자인, 마케팅, 배송, 판매를 일괄 관리한다. 세계 40개국에 2200개 매장을 열고 남성복, 여성복, 아동복을 팔고 있다. 매출의 90% 이상을 스웨덴 이외의 나라에서 거둔다. 주요 매출은 독일, 프랑스, 미국,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와 같은 선진국에서 나온다.

H&은 '패션과 품질을 가장 좋은 가격에(fashion and quality at the best price)'라는 기업 이념을 가지고 있다.

비용 절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자체 공장은 갖지 않는다. 중국, 터키 등에 있는 700개 의류 제조업체와 직거래를 통해 싼값에 옷을 만든다. CEO라도 긴급 업무가 아니라면 해외 출장 때 비즈니스 클래스가 아니라 이코노미 클래스를 이용한다. 임원급이라도 비서가 없는 경우가 많다.

매장은 세계 거대 도시 한복판의 1급지에 둔다. 미국 뉴욕 5번가,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일본 도쿄 긴자, 한국 서울 명동에 있는 매장 자체가 대형 광고판과 같은 역할을 해낸다.

H&M은 세계 패스트패션업계 최초로 유명 디자이너, 연예인과 한시적 협업을 통해 특별기획 상품을 생산·판매하는 '콜래보레이션(collaboration)' 전략으로 경쟁력을 강화했다. 명품 디자인을 저가에 제공하기 때문에 소비자의 호응이 컸다. 2004년 칼 라커펠트와의 협업으로 H&M의 매출이 24%나 뛰었다. 이후 마돈나(2007년), 지미추(2009년)를 거쳐 올해는 베르사체와 협업할 예정이다.

현재는 창업자의 아들인 스테판 페르손이 회장, 손자인 칼-요한 페르손이 CEO를 각각 맡고 있다. 한국 시장에는 2010년 진출했고 서울 명동, 인천, 천안 등에 매장 4곳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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