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革新2011. 6. 22. 16:25

사람이 곧 혁신이다 (5)

공병학교의 좋은 성적 덕분이었는지 곧 작전참모 보좌관으로 명을 받았다. 3개의 중대 중 본부중대에 속했는데, 본부중대는 다시 S1~S4로 나뉘었다. 인사·정보·작전·군수 등 네 명의 참모가 모여 작전을 실행하는 시스템이다.

난 S3, 즉 교육·작전 파트였다. 참모가 되기 전에는 항상 (공병)라인만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라인을 움직이는 브레인이 바로 참모였다. 중소기업을 보면, 10명 이하 사업장이 전체 기업의 89% 정도다. 군대로 치면 1개 분대급이다.

소대면 40명인데, 이쯤이면 소대장이 대원들의 얼굴은 물론 특성까지 다 알 수 있다. 중대장만 돼도 120~150명인데, 여기까진 컨트롤이 된다. 대대로 올라가면 500명이 넘어간다. 중대장도 4명에, 소대장도 많아진다.

즉 최고경영자(대대장, 기업에선 CEO)가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징과 역량을 일일이 파악해 배치하는 게 힘들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참모를 두고 라인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전략을 짜고 관리하는 것이다.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300~1000명)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기업이 부지기수다. 오히려 외형이 커지면서 망하는 곳도 많다. 결국은 CEO의 리더십이 문제다. 라인만 거느리는 조직은 성공하기 힘들다. 참모를 활용해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좋은 계획·작전을 수립하게 하고, CEO 대신 관리하게 해야 한다. 중견기업으로 크지 못한 기업은 이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1997~2007년의 10년 사이,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곳은 119개다. 하지만 전체 중견기업 숫자는 오히려 110개가 줄었다. 그 사이 도태된 기업이 229개란 뜻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훌륭한 참모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CEO를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식대로만 경영한다. 그에 비하면 이병철 회장은 50년대에 이미 ‘비서실’이라는 참모 조직을 두었다. 그들이 전략을 짜고 세부 경영 계획을 수립했던 것이다.

엉터리 작전지도와 미군

‘참모’라는 조직조차 생소했던 때에 이병철(사진) 회장은 이미 ‘비서실’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큰 틀은 회장이 짜고, 비서실이 세부 경영 계획과 미래 전략을 짜는 문화가 일찍부터 삼성에 자리잡게 된 배경이다.

김신조 남침 이후 훈련도 강화됐지만 ‘장벽 공사’, 즉 진지 공사도 강화됐다. 지금도 북쪽으로 가는 도로에 문 모양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많이 서 있는데, 전쟁이 나면 도로를 막는 장애물이다.

능선을 따라 산 위에 벙커(방어진지)도 구축했다. 그때 마침 6·25전쟁의 영웅 한신 장군이 1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 한신 장군은 전설적인 전쟁 영웅으로, 군인 정신으로 똘똘 뭉친 분이었다.

이분이 어느 사단을 방문하자마자 “작전 계획을 설명하라”고 했던 모양이다. 담당 장교는 방어 작전도 차트를 걸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 작전도가 한심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산꼭대기 능선을 따라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철조망 아래 아군 쪽에 지뢰도 있었다. 한마디로 엉터리였다.

작전지도를 그린 건 작전참모가 아니었다. 참모는 하사관에게, 하사관은 병에게 일을 미뤘던 것이다. 심지어 작전 브리핑을 해 본 적도 없는 참모가 수두룩했다. 결국 한신 장군에게 혼쭐이 났다는 소문이 인근 부대에 좍 퍼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참모부에 들어가 확인해 보니, 우리 부대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결국 밤을 새워가며 다시 그릴 수밖에…. 평시와 전시에 느끼는 위기의식은 이처럼 천지 차이였다.

전시에는 그렇게 중요했던 작전 계획이 평시에는 그렇게 소홀히 다뤄졌던 것이다. 검열을 나온 사람이 “작전지도가 있느냐”고 물어보면 “있다”며 보여주기만 하면 그만인 시절이었다.

한창 구제역 파동이 이는 것을 보며 당시의 모습이 떠올랐다. 예를 들어 방제 시스템이라고 하면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어야 한다. 삼성기술원에 있을 때도 화재 훈련을 했는데, 소화기 사용법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평상시를 위기 상황과 똑같이 만드는 건 결국 리더에게 달려 있다. 리더가 바닥의 상황을 확인하지 않으면 그런 엉터리 작전지도가 나오게 마련이다.

방어진지 구축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제일 먼저 사단장·연대장·대대장의 위치를 파악해 벙커 순서와 지점을 잡아야 했다. 아무 곳에나 벙커를 둘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부대는 미 1군단의 작전 지역에 속해 있었다.

당연히 미군 사단과 연동해 방어 라인을 구축해야 했다. 위관급 장교들과 하사관들이 보름간 밤을 새워 가며 구축 계획 초안을 만들었다. 반면 해당 미군 참모들은 매일 놀기만 하는 것이 아닌가.

진지 구축안 초안은 보좌관 심사를 거쳐 작전참모·참모장·연대장순으로 심사를 받았다. 그런데 올라갈 때마다 고치라는 것투성이였다. 초안을 만들어 놓고 늘 뜯어고쳐야 했다. 1단계에서 수정하면 2단계에서 원안대로 가고, 위로 가면 또 달라졌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도 제대로 된 완성본을 내놓지 못했다.

그런데 미국 아이들은 한 달쯤 신나게 놀더니, 사단장이 헬기를 타고 움직이는 동선을 보며 그제야 사단장·연대장의 거점을 파악했다. 하루면 다 끝날 일이었다. 연대장들은 대대장들을 데리고 다니며 일일이 거점을 확인해 줬다. 그렇게 1주일이 되니 모든 계획이 끝났다.

나머지 한 주는 문서화해 마무리했다. 수정 보완이 필요 없었다. 우리와 미군의 일하는 방법은 그렇게 차이가 컸다. 밤을 새워 24시간 일한 것과 미군이 8시간 일하고 커피 마시면서 일한 결과는 언제나 우리가 엉터리였다.

미군과 한국군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지휘관이 먼저 전략적 의사 결정을 해 주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조그만 다리를 놓아도 미군은 하사관 하나가 나와 지휘했다. 반면 한국군은 장교가 나와야 그나마 일이 진행됐다. 한국군 장교는 미군의 하사관 역할밖에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전문성과 리더십에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다.

삼성인력개발원의 중요한 과정 중 하나가 임원의 역할이 무엇인지 제대로 인식하고 수행할 수 있도록 공부하고 노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기업에서 제일 중요한 건 미래에 대비해 현재 상황을 인식하고 전략을 세우는 일이다. 사원 때 하던 일을 과장·부장이 되어서도, 심지어 임원이 되고나서도 하는 경우가 많다.

신뢰가 조직을 살린다

제대 말년에는 역시 김신조의 공(?)으로 3개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별다른 훈련도 없이 창고의 목재 위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사회 진출 계획을 이야기하며 소일하던 기간이었다. 새벽까지 이야기가 깊어지는 동안, 막사에 있던 병사들이 팬티 바람으로 뛰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려니’하고 넘기려고 했는데 밤늦도록 그런 상황이 계속됐다.

결국 얼차려 받는 병사를 불러 이유를 물었다. 답은 빤했다. “선임하사가 시켰다”는 것. 막사에 가보니 이미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었다. “술만 마시면 저러는데 미치겠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2년간 알고 지냈던 그 선임하사는 모범적인 간부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술에 취해 사병들을 괴롭힌다는 건 꿈에도 몰랐다. 병사들을 재우고 선임하사를 불러 거꾸로 혼을 냈다.

중간 간부(소대장)가 말단 사원(사병)을 현장에서 챙기지 못하는 경우의 전형이다. 아무리 위에서 교화하고 관리하더라도 중간에서 사고를 치면 밑바닥에선 엄청난 고난을 당하게 된다. 중간 관리자들을 제대로 교육하는 것은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1987년 무렵부터 노사분규가 극심해졌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는 더욱 격화됐다. 삼성전기도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분규를 우려한 간부들은 사원들이 모이는 것 자체를 금지했다. 모이면 큰 소동이 일어날 것이란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그래서 다들 식사 시간을 제일 무서워했다. 난 반대로 한 달에 한두 번 영화 상영을 지시했다. 당연히 반대 목소리가 커졌다.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린 사원들이 서로 신뢰하고, 그 풍토를 확인하는 일을 지금까지 해 왔다. 영화 상영을 중단하면 사원들이 우릴 못 믿는다고 할 것 아니냐.”

결국 삼성전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사원들을 믿고 의지하자 오히려 그들이 앞장서 수상한 외부인들을 신고하기에 이르렀다. 서로 신뢰하고 인정해 주니 스스로 앞장서 관리하게 된 것이다. ‘인간 존중’이란 이런 것이다.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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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1. 6. 16. 13:04

사람이 곧 혁신이다 (4)

내가 삼성에 입사한 건 1967년 1월 12일이었다. 두 달 정도 신입 사원 교육을 받았는데 제일모직 공장에서 2주를 지냈고, 제일제당과 한국비료 등도 신입 사원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공장이었다. 내 입사 기수인 공채 8기 전에는 군필자만 뽑았다고 한다. 하지만 8기부터 처음으로 육군 학군장교(ROTC) 후보생들을 입대 직전에 채용하는 제도가 생겼다.

당시의 연수 내용은 기업별 각 공정의 내용, 공장의 파트별 작업 등이었다. ‘모직’과 ‘제당’이라는 두 개 회사에서 전체 프로세스를 한 번씩 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상당히 좋은 교육 체계였다.

요즘은 공장 돌아보는 걸 견학하듯 한다. 공장에서 무언가 배운다는 생각을 통 안 한다. 즉 현장을 모른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현장의 바닥부터 이해시키는 게 연수의 시작이었다. 지금 삼성에선 한 달간 집체 교육을 받는데, 옛날처럼 짜임새 있게 일일이 공정 교육을 받는 건 아니다. 부족하지 않나 싶다.

선배들도 후배들을 열정으로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저녁에는 연수생들이 여관에 모여 지냈기 때문에 한 방에서 뒹굴면서 자연스럽게 동료애도 커졌다. 요즘은 호텔식 시스템이어서 밤새워 소주잔을 기울이는 옛날 같은 낭만은 없다고 한다.
 
연수 기간 동안 쌓은 선후배 간 상호 네트워크는 실제 업무 현장에서 시너지 효과를 창출했다. 지금은 효율과 시간에만 쫓긴다. 빨리빨리도 좋지만 시행착오가 잦아지면 오히려 손해일 수도 있다.

기계과 출신이 공병대 간 까닭은

기계과 출신으로 병기과가 아니라 공병대로 배정받은 건 내가 유일했다. 학군단 간부의 물품 납품 청탁을 거절한 대가였다. 하지만 지나고 나니 내 인생에서 군 경험만큼 좋은 학습 기회도 없었던 듯하다.

바로 ‘참모’의 역할을 처음 경험했기 때문이다. 병기는 관리 행정이지만 공병은 전투 병과다. 1개 사단 안에 공병 대대가 있는데, 대대장의 역할이 바로 사단장의 참모다. 공병 중대는 공사를 진행하면서 전투 라인과 참모 역할을 함께하는 역할이다. 대대 안에도 참모 부대가 따로 있다.

난 대대 참모부에서 작전장교 보좌관으로 일했다. 사단 작전참모부와도 긴밀히 협력했고 작전 수립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제대 후 기업에서 기획통·전략통으로 자리한 시발점이었다. 세상에 좋지 않은 경험은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경험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다.

3월 2일 김해에 있는 공병학교로 갔다. 그곳엔 불도저·발전기·폭파기 등 건설 장비들이 갖춰져 있었다. 장비를 접한 난 기술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고 싶었다. 선배에게 방법을 물으니 “간단하다. 졸업 시 1~3등 안에 들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쉽지 않지만 해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공부했고 입학 시 1등을 해 참모총장상을 받았다.

한껏 들떠 있던 내게 “큰일 났다”는 선배의 말이 들려왔다. 1968년 김신조 일당이 남침하기 전만 해도 우수한 병사들을 원하는 곳(주로 후방)에 배치했는데, 이후 방침이 바뀌어 전방에 보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계획이 완전히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

배치 받은 자대는 의정부(그나마 후방이었다)에 있는 사단 공병대였다. 공병은 공병단(공병 전문부대)과 사단 안에 있는 공병대대로 나뉜다. 내가 배치된 사단 공병대대는 의정부에서 자동차로 10분 이내로,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공병부대였다.

자대 배치 후 처음 한 일은 뜻밖에도 태권도 도복 수령이었다. 사단장교 교육 기간 내내 새벽같이 일어나 연병장에서 태권도 훈련을 했다. 26사단 불무리부대는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전방 부대여서 외국에서 내빈들이 전방 방문을 원할 때 꼭 들르던 부대였다. 의전 사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왜 우리 부대가 백골, 맹호 같은 부대보다 사기가 떨어지나. 그런 부대에 뛰어난 인재들만 모이는 것도 아니잖은가. 훈련소에서 무작위로 차출된 병사가 그 부대만 가면 백골이 되고 맹호가 된다. 26사단을 가장 용맹한 부대로 만들겠다. 그러려면 조직 문화를 바꿔야 한다.” 새로 부임한 사단장의 일성이었다. 강한 부대를 만들기 위해 생각해 냈던 게 바로 태권도였다.

한국의 자랑인 태권도 시범을 보이겠다는 계획을 상급 부대에 올려 재가를 받자마자 전군의 입대자 중에서 유단자만 뽑아 태권부대가 꾸려졌다. 사령부 안을 그들이 활보하고 다녔고 아침저녁으로 무조건 태권도 단련이 이어졌다.

당시 26사단은 형편없는 사기로 유명했다. 휴가 가기 전 으레 들르곤 했던 의정부에선 매일 다른 부대 장병들에게 얻어맞은 26사단 부대원을 볼 수 있었다. 태권부대의 진가는 이 대목에서 나타났다. 이들이 주말만 되면 ‘5분 대기조’가 돼 싸움이 생기면 즉시 출동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자 ‘26사단을 건드리면 혼난다’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 기를 펴고 다닐 수 있었다.

백골부대·맹호부대나 26사단 장병들이 출생부터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똑같은 군인들인데, 전투력 충만한 일류 부대와 사기 저하 오합지졸로 갈리게 된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리더십’에 달려 있었다. 물론 26사단이 단번에 백골부대가 된 건 아니었다. 조직 문화를 바꾸는 건 오랜 시간과 계기가 합쳐지지 않으면 힘들다. 즉 천시·지리·인화의 세 가지가 다 맞아야 한다.

김신조 일당의 남침은 실질적인 부대 지휘를 해 본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68년 1월 21일은 입대한 지 1년쯤 지난 후였다. 김신조는 마침 의정부 일대로 넘어왔고, 난 서울로 진입하는 송추 도로를 막는 부대에 차출됐다.

김신조 일당은 무장 상태로 산길 12km를 주파했다. 그에 비해 우리 군은 평지를 속보로 걸어도 4km에 불과했다. 무장공비가 나타났다는 정보 보고를 듣고 송추 도로를 막았다. 남하할 시간을 계산해 북쪽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6km로 계산해서였다. 저녁이 되자 ‘이미 청와대 근처’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철저한 훈련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것이었다.

용사와 오합지졸의 차이

결국 뿔뿔이 흩어진 공비들은 북쪽으로 도망쳤다. 남침 시 하나의 루트만 가르치기 때문에,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길도 내려온 길 뿐이었다. 당연히 그 골목을 지키는 게 우리의 임무였다.

하지만 엄동설한이라 대부분의 진지에서 불을 지피고 말았다. 공비들은 바로 그 불을 보고 초소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들은 화장품이나 비누도 안 써 냄새만으로도 사람이 있는 곳을 알아 용케 도망 다닐 수 있었다.

어쩌다 공비를 발견한다고 해도 허공에 총을 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훈련이 안 돼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공비들은 총탄으로 논둑 위에 먼지가 튈 정도로 정확하게 쐈다. 뛰다가 돌아서서 쏘는데도 가히 서부활극에 나오는 명사수 수준이었다.

평상시 훈련된 부대와 그렇지 않은 부대는 나라의 흥망을 좌우한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품질·생산 관리가 평시엔 문제없어 보여도, 잘못된 부품 하나나 사소한 실수로 불량품이 쏟아질 수 있다.

항상 실전과 똑같은 훈련으로 체득시켜 습관이 돼야 한다. 군에선 작전장교 같은 지휘관들이 평상시 평화 속에 있다가도 전시가 되면 자신이 할 일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몸으로 체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기가 닥쳤을 때 혼란에 빠지게 마련이다.

기업의 혁신을 이끌면서 정확한 수치를 요구하는 것과 아닌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생각 자체를 다르게 한다.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예가 있다. 라디오카세트 제조부문에서 적자가 나자 ‘원가절감’ 방안을 요구했다.

모두 3%도 어렵다고 말했다. 고노스케는 작은 부품 하나하나를 들면서 꼭 필요한 것인지 캐물었다. 다 합해 보니 원가의 30%에 이르렀다. 기존의 것을 아예 포기하고 원점에서 시작하니 가능했던 것이다. 인재는 그렇게 단련시켜야 한다.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Posted by 프로처럼
공부/革新2011. 6. 16. 13:04

사람이 곧 혁신이다 (3)

초등학교 때부터 기초가 부족해 남들보다 고생했지만, 이런 사정은 고교 시절까지 계속 이어졌다. 당시 경기고등학교는 전국의 수재들이 모인 곳이었다. 역시나 바닥에서 출발해 3학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반에서 1, 2등을 다툴 수 있게 됐다.

당시만 해도 성적순으로 학교와 과를 정하고 원서를 써주던 시절이었다. 가장 우수한 성적은 화공과로 몰렸다. 다음이 기계과 그리고 전기과순이었다. 내 성적은 기계과 순번이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성적순으로 택한 전공은 아니었다.

돌이켜 보건대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아버지는 “기계는 모든 기술의 기본이고 중심이다. 기계 공부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화공과에 갔던 친구들은 미국 유학을 가선 경제학 같은 분야로 전공을 바꾼 친구가 많았다. 선진국에선 화공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던 것이다. 시대가 돌아 지금은 재료·화공 분야가 다시 각광받고 있다. 기계는 그때나 지금이나 늘 한결같다. 산업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고교 시절까지 등수 따라잡기로 세월을 보낸 반작용이었는지, 대학에 가선 노는 일에만 열심이었다. 신입생 때부터 사람을 끌어모으는 일을 벌이는 데 앞장섰다. 과대표를 맡아 가장 처음 거둔 성과는 만년 꼴찌였던 과 대항 줄다리기 대회의 우승이었다.

50명 정원의 기계과가 20명의 조선항공과에 매번 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1학년이 한 번 분위기를 만들어 도전해 보기로 했다. ‘무거운 사람이 앞에 설 것인가’, ‘당기는 각도를 몇 도로 해야 유리한가’ 등 연구를 거듭했다. 결국 우승을 차지해 과 전체 단합의 계기가 됐다.

공부는 뒷전이었던 대학 생활

단합된 힘은 서울대 공과대학 최초로 6·3운동에 참가하는 저력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당시 서울대 공대는 태릉 쪽에 있어 시내와 멀었고 조직화도 쉽지 않았다. 앞장섰던 기계과는 태릉 초입 철길도 건너지 못하고 경찰에 막혀버렸다.

결국 철길을 따라 상계역으로 가 기차를 타고 고려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고려대 학생들의 열정과 조직화를 본 나는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조직과 체계적인 운동 그리고 거기서 나온 파워가 이처럼 대단하구나’ 하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3학년 2학기에는 기숙사 자치회장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자치회라는 게 먹는 것 감시하는 역할 정도가 전부였다. 회장에 당선된 후 친구들과 모여 ‘뭐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며 논의를 시작했다. 학생들의 가장 큰 불만이 식사 문제였는데, 고심 끝에 탄생한 것이 ‘조삼모사’ 식단이었다.

예를 들어 밥 한 끼가 100원이면, 이를 90원짜리로 바꾸는 식이다. 남는 10원을 한 달간 모으면 하루는 280원짜리 밥을 먹을 수 있다. 10원만큼 떨어진 질은 느끼기 힘들지만, 통닭이나 햄버그스테이크 같은 메뉴는 열광적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학교에서 가서 ‘우린 이런 게 나온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똑같은 재원이라도 생각을 조금만 바꿔 운용하면 조직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계기였다.

식사하는 동안 음악을 듣자는 건의 사항도 나왔는데, 문제는 식당에 앰프가 없다는 것이었다. 자치위원 중 음악 고수가 있어 앰프를 설치하기로 했는데, 세운상가에 가서 알아보니 자치회 예산으론 턱없이 부족한 고가였다. 그렇다고 예산이 따로 나올 리도 만무했다.

알아보니 1년 중 가장 큰 예산 항목이 김장이었다. 김장 비용을 대폭 줄이면 앰프를 살 수 있겠다 싶었다. 조사해 보니 배추와 고춧가루가 제일 비싼 재료였다. 청량리에 배추 시장이 서는데, 전국에서 온 배추가 새벽 통행금지 해제에 맞춰 바로 도착했다.

‘통금 시간에 맞춰 가서 재수가 좋으면 싸게 살 수 있겠구나!’ 전날부터 인근 여관에 방을 얻어 새벽 장에 나섰다. 그해 마침 배추 농사도 풍년이었다. 장에 도착해 보니 하역 작업에 많은 비용이 들었다. ‘그렇다면 차에서 내리기 전에 사면 되지 않겠나.’ 배추를 실은 차를 바로 학교에 몰고 왔다. 원래 예산의 3분의 1로 해결할 수 있었다.

다음은 고춧가루. 강원도에서 온 열차가 서는 성동역 인근에 고추를 이고 온 아주머니들이 몰려들었다. 우린 열차 입장권을 끊어 역 안에서 바로 구입했다. 말하자면 직거래다. 리어카에 고춧가루를 싣고 경동시장의 공장을 찾으니 대뜸 “이렇게 좋은 고추를 빻으러 왔느냐”는 말이 튀어나왔다.

당시 대다수 음식점에서 말라비틀어진 고추나 그도 아니면 고추씨를 갈아 염색한 가짜 고춧가루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통고추가 제일 비싸고 실고추, 고춧가루로 갈수록 가격이 싸지는 의문이 비로소 풀리는 순간이었다.

가공한 것이 오히려 더 쌌던 것이다. 결국 최고 품질의 배추와 고춧가루를 사고도 비용을 줄여 대망의 앰프를 설치할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그 후로 어딜 가든 한동안 음식점에서 나오는 고춧가루는 먹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스스로가 대견해지는 값진 체험이다.

4학년이 되니 기업체 실습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나간 곳은 ‘한영모터공업’이란 곳으로 지금 효성모터의 전신이다. 우리 같은 학생들이 도움이 됐을 리 만무하지만 월급도 받았다. 한 학기 동안 이뤄진 실습 기간 동안 참으로 많은 걸 배웠다. 요즘은 이런 제도가 많이 사라져 무척 아쉬울 뿐이다.

당시 한영모터공업은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와 기술 제휴해 최신 기술을 들여왔다. 그런데 많은 수치제어(코드를 입력하면 자동으로 기계가 돌아가는 방식) 기계들을 모두 수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숙련된 기술자들이었지만 자동화에 대한 두려움, 교육·훈련 부족 때문에 ‘수동이 편하다’며 그렇게 쓰고 있었던 것이다.

삼성 입사 시험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

그때 공장을 책임졌던 김정배 부장은 삼성SDI에서 바로 나의 전임 사장이셨던 분이다. 실습 기간 동안 이분께 보고를 올리고 지도도 받았다. 6개월의 짧은 인연은 1970년대 말 삼성에서 다시 바로 위 상사의 관계로 이어졌다.

사람의 인연이란 게 이런 건가 싶다. 작은 만남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어떤 관계든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게 바로 사람의 인연이다.

4학년 때인 1966년 겨울에 삼성 입사시험을 치렀다. 전공 시험 문제를 보니 공작 기계를 실습했던 내용들이 거의 다 나왔다. 나중에 듣고 보니 입사 성적이 매우 우수했다고 한다. ‘대학 때 놀기만 하고 공부도 안 했는데…. 만약 실습을 제대로 안했다면…’하는 생각이 든 게 당연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쓸모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 후로 나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자”고 항상 얘기한다. 그래야 큰일이 맡겨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당시에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나중에는 내 일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대학 때 내가 벌인 일들은 공부와 거리가 먼 것들뿐이었다. 자치회장 활동을 하거나 ‘파스(PAS)당’을 만들어 놀러 다닌 기억이 대부분이다. P는 풀빵, A는 아리랑 담배, S는 삼학소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 보니 그때 배웠던 기본적인 소양들 덕분에 어떤 일이든 남보다 잘 적응할 수 있었다. 학업을 계속해 교수가 된 사람과 다양하고 새로운 경험을 하며 지냈던 사람의 갈림길이 이미 학교 생활에서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조직·사회생활도 이 못지않게 중요하다. 미국은 인재 채용 때 학생회 활동, 봉사활동 등 다양한 사회 경험을 굉장히 높게 평가한다. 사회를 체험하고 시스템을 경험하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정리=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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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1. 6. 16. 13:03

(2) 사람이 곧 혁신이다

내가 태어난 해는 8·15 광복을 맞았던 1945년이다. 당시 아버지는 중국의 만주철도에서 엔지니어로 일하셨는데, 그 덕분에 내 고향은 대한민국이 아닌 중국 베이징(北京)이 되었다. 기억에도 없는 두 살배기 아기 시절이지만, 우리 집은 베이징역 근처 철도 관사에서 살았다.

당시 베이징에는 한국(조선)인과 일본인 그리고 중국인들이 함께 어울려 살았는데, 광복(일본 입장에선 패망) 직후 모두 화차를 타고 다롄(大連)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우린 그곳에서 다시 미군의 수송선을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부모님은 당시 귀국 행렬에 나섰던 한국인과 일본인들의 차이를 여러 번 들려주셨다. 늘 하시던 얘기가 “베이징역에 가보니 그 추운 날 한국인은 아무 준비 없이 자기 보따리만 가져왔더라”는 말이었다. 그 덕분에 난 기억에도 없는 아기 때 일을 지금까지도 눈으로 본 듯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귀국에 나선 사람들은 한국·일본을 가릴 것 없이 살던 번지별로 열차 호수를 통보받았다. 제 식구들 챙기기에 급급한 한국인들과 달리 일본 사람들은 정해진 칸별로 따로 모여 철저히 귀국 준비를 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지붕이 없는 열차인 것을 알고 화물차에 기둥을 설치하고 이불을 뜯어 이어 뚜껑을 만드는 식이었다. 일본인들은 심지어 화장실 칸까지 따로 준비했다. 오르내리는 사다리를 만들어 노약자를 배려했고 음식물도 조직적으로 준비하고 대응했다.

비록 패전 국민이었지만 귀국길만은 굉장히 안락한 여행이 되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저 제 손에 쥔 보따리뿐이었다. 추운 겨울, 지붕도 없는 열차로 다롄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고생스러웠을지는 생각만 해도 빤하다.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베이징 탈출 이야기. 어느 정도 철이 들면서부터 난 앞서가는 국민이란 어떤 것인지, 조직화된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하는 방법을 달리하면 효율이 얼마나 오르는지 생각하게 됐다. 그게 바로 선진 국민과 그렇지 않은 국민과의 차이였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여동생과의 즐거운 한때. 오른쪽은 어머니·형·여동생과 함께한 가족사진.


어린 시절부터 깨달은 선진국의 경쟁력

귀국 후인 1950년 우리 집은 서울 신당동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까까머리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전쟁놀이밖에 없었다. 보고 들은 게 전쟁뿐이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새로운 전략을 짜고, 상대를 이기기 위한 방법을 찾았다.

전략을 세우는 일로 하루를 다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생각해 보면 지금도 남들보다 비교적 유연한 발상과 전략적·창의적 사고에서 앞서는 것도 당시의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는 생각이다.

1·4 후퇴로 피란을 간 밀양에도 기차역이 있었다. 동네에서 10리쯤(4km) 떨어진 청도군에 5일장이 섰는데, 이웃 동네 아이들끼리 끊임없이 주도권 싸움을 벌였던 기억이 난다. 장터에 갈 때면 으레 여러 명이 팀을 이뤄 갔고, 기차를 탈 때도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 5학년 12월에 아버지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관훈동에 집을 마련하셨다. 시골에서 매일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던 촌놈은 서울 학교에 전학하자마자 꼴등을 했다. 시골 아이들과 달리 서울 친구들은 그때부터 벌써 성적 올리기에 열심이었다.

그때부터 난 거리낌 없이 쏘다니던 생활 방식 대신 서울 아이들처럼 틀에 박히고 폐쇄적인 환경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다행히 6학년 2학기에 이르자 성적이 좋아져 반장도 맡았다. ‘교동국민학교’면 당시 일류 학교였는데 1학기 중간쯤 벌써 1, 2등을 다툴 정도가 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서울 아이들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던 건, 자연 속에서 건강하게 키운 체력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신적으로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체력만큼은 서울의 그 어떤 친구보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자연 속에서 자유분방하게 지냈던 학생이 마음먹고 집중하면 오히려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걸 난 스스로의 체험으로 깨달았다.

얼마 전 읽은 ‘일본전산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 회사는 신입 사원을 뽑을 때 창의적이고 도전 정신이 강한 인재를 뽑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양성 속에서 독창적 경쟁력을 키워내는 조직 문화가 바로 일본전산의 힘이다.

어떤 해는 운동선수만 뽑고, 어떤 해는 대학 낙제 경험이 있는 학생들만 뽑는 채용 방식은 우리에겐 무척이나 낯설다. 낙제생에게 “그것을 후회하는가, 다음에는 어떻게 하겠나”라는 질문을 던져 “후회하고 공부하겠다”는 사람은 모두 떨어뜨렸다고 한다.
 
대신 “다음에도 그렇게 의지대로 하겠다”는 사람만 뽑았다는 일본전산은 전 세계 그 어느 기업보다 강한 인재 경쟁력으로 세계 정밀 소형 모터 시장의 90%를 점유하고 있다.

전교 꼴등서 학급 반장으로

전기기술자였던 아버지는 귀국 후 잠시 조선전업(한국전력의 전신)에서 일하셨다. 6·25로 파괴된 영월발전소 재건에도 참여하셨는데, 완공 후 준공식 날 벌어진 잔치에서 알코올음료를 잘못 마셔 시력이 크게 훼손되는 불행을 겪으셨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내 기억 속의 영월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커다란 컨베이어벨트를 처음 본 감동으로 남아 있다. 기계에 매료된 건 아버지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일 게다.

아버지는 밀양 피란 생활 동안 방앗간을 경영하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난 방과 후 방앗간에 들러 아버지 대신 기계를 돌리고 손님들이 오면 안내도 하는 일꾼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때 이미 방앗간 안의 모든 기계를 다룰 줄 알았다.

새벽이 되면 소달구지가 지나간 길에는 소똥이 가득했다. 쇠똥을 주워 거름을 만들고 산과 들로 다니며 친구들과 소를 먹였다. 서울서는 경험하기 힘든 소중한 기억이다. 이 밖에도 틈만 나면 낙동강에 나가 은어를 낚았다. 획일적인 암기식 교육보다 자연과 함께하는 경험이 창의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갖게 된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선진국일수록 체험 교육을 무척 중요시한다. 무언가 남을 위해 일해본 사람, 부모나 가정을 위해 심부름을 하고, 이웃을 위해 청소를 해 본 사람들이 결국 조직 사회에서 서로 화합하고 소통하며 사는 기본 체질을 갖추게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지메(집단 괴롭힘)’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일본에서도 그 이유를 연구해 보니 ‘누구에게도 도움을 줘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일수록 왕따를 시키더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이후 일본 정부는 각 가정의 부모들에게 ‘아이들에게 일을 시켜라, 심부름을 시켜라, 학교서도 교육과정을 바꿔라’는 지침을 내렸다.

소를 먹인 건 소를 위하는 일이었다. 산에서 나무를 하는 것도 집안일이었고, 마당 청소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의 생활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 특히나 아름다운 산천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이 이를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독서량이 절대 부족한 요즘 아이들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삼국지’, ‘초한지’, ‘수호지’, ‘세계 명작’, ‘밀림의 왕자’ 등 어릴 때 읽은 수많은 책은 지금도 내 인생의 가장 큰 자산이다. TV도 없던 그 시절엔 동네에 책을 빌려주는 곳이 꽤 많았다.

당시 상당히 인기 있던 ‘학원’ 같은 잡지가 사라진 것도 아쉽다. 그런 문화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인터넷 요약본이 대체했다. 요약된 정보로 움직이는 환경에서 학습하는 것과 원전을 읽으며 생각의 틀을 만들어가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난 지금도 사람을 보며 관리할 때 ‘삼국지’, ‘초한지’ 등의 인재들을 떠올리며 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인재로 키울 것인지 고민하곤 한다. ‘삼국지’는 10번 이상 읽었다. 요즘 최소한 한 달에 책 두 권을 읽자는 운동을 벌이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떠났던 무전여행도 잊지 못할 경험이다. 친구들과 함께 각오를 단단히 하고 떠났지만, 막상 어느 동네를 가도 ‘학생들이 고생이 많다’며 쉽게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꼭 보리밥이라도 한 끼 먹여 보냈고, 손에 차비도 쥐어주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시절의 우리 문화다. 풍요와는 거리가 멀던 시절이었지만 인심은 지금보다 훨씬 후했다.

당시는 학생들의 여행을 권장하는 분위기였고, 어른들이 이를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시됐다. 이게 우리의 문화이자 인심이다. 사는 건 훨씬 풍족해졌지만 사람 냄새는 갈수록 옅어지는 것 같다.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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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1. 6. 16. 13:02

(1) 사람이 곧 혁신이다

한국에서 기술 경영(MOT: Management Of Technology)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최고경영자(CEO)가 있다. 손욱 전 농심 회장이다. 손 전 회장은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후 1975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삼성SDI 사장, 삼성종합기술원장, 삼성인력개발원장 등을 역임한 정통 ‘삼성맨’이다.

창업자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을 모두 보좌하며 삼성의 기술 혁신 과정을 온몸으로 경험한 그는 이후 CEO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손 전 회장이 기술과 경영의 접목에서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몇 안 되는 선구자이자 1세대로 평가받는 배경이다.

‘식스시그마 전도사’, ‘한국의 잭 웰치’, ‘최고의 테크노 CEO’ 같은 수식어가 보여주듯 손 전 회장은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지난 2008년에는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식품 기업 농심의 회장으로 변신해 또 한 번 주목을 받았다.

당시 ‘이물질 파동’으로 시끄럽던 회사를 안정시키고 짧은 기간 동안 기업 혁신의 진수를 보여준 것도 혁신 전도사로서의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경비즈니스는 손 전 회장이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뤄낸 혁신 경영 이야기를 시리즈로 엮는다. 손 전 회장은 “이번 회고록이 한국형 혁신 경영의 체계화로 이어져 많은 후배 CEO들에게 도움이 되는 첫 단추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선진 기업, 일류 기업과 후진 기업, 보통 기업의 차이는 무엇일까. ‘왜’라는 질문을 깊게 파고들다 보면 결국 ‘기업은 사람이다’라는 말로 귀결된다. 기업을 이끄는 사람의 차이는 곧 ‘리더십’의 차이다. 역사를 통해 보면 리더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체계적인 리더 육성에 힘써 온 국가나 기업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리더는 시대적 변화, 즉 천시·지리·인화의 변화를 인식하고 이에 대응하는 비전과 목표, 전략을 세우고 남다른 방법으로 조직원들을 무장시켜 꿈을 이뤄가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남다른 방법은 무엇인가.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단절의 문화를 가진 동양은 계승 발전의 문화를 지닌 서양에 뒤질 수밖에 없어 찬란한 고대 문명을 갖고서도 굴욕의 근세를 겪어야 했다고 해석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전법을 한니발이 계승 발전시켜 로마를 침공하고, 이를 스키피오가 업그레이드해 한니발이 패망하고 다시 카이사르가 계승 발전해 로마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혁신 경영도 마찬가지다. 혁신은 전 세계에서 앞서가는 방법들을 찾아내거나 스스로 개발해 활용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더 좋고, 더 빠르게 고객의 가치를 창조하는 경쟁 우위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1960년대 개발도상국 시절을 거치며 고도성장,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나라다. 성공적인 산업화 모델을 통해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탈바꿈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설비 투자가 이어졌고 규모의 경제, 낮은 노동비용, 수출 주도의 경제 체제도 만들어졌다.

경제 발전 과정에서 수많은 방법론들이 도입돼 활용됐다. 지난 40년을 돌이켜보면 매우 적극적으로 선진국의 혁신 방법을 도입하고 변화·발전시킨 기업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넘어 세계적인 기업이 됐다.

이에 비해 (기업 수 99%, 종업원 88% 차지하는)수많은 중소기업 현장을 가보면 너무나도 뒤처져 있는 게 사실이다. 삼성전자도 처음엔 중소기업이었다. 똑같이 출발했지만 어떤 기업은 세계 일류, 어떤 기업은 후진적 체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일류 기업이 그랬듯이 모든 기업이 혁신의 방법을 배운다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돌멩이를 들고 싸우는 사람이 총을 들고 싸우는 이를 이길 수 없다. 좋은 방법이 없으면 결국 성공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턴가 방법론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시작했다. 제목 정도를 알고, 몇 번 들은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혁신은 가장 앞서가는 방법론을 도입해 성과를 내고 체질화는 것이다. 그저 ‘아는 것’과 다르다. 예를 들어 바둑을 둘 때 정석은 공부하지 않고 일류 기사의 기보만 연구하는 것이 지금 우리 기업의 모습이 아닐까 우려된다.

혁신은 바닥에서 기본적인 것부터 쌓아올려야 고차원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 프로세스 혁신 없이 전사적자원관리(ERP)만 도입한다고 끝이 아니다. 품질관리도 모르면서 식스시그마를 도입한다고 성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 기업들의 현실은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대학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컨설팅 회사도 마찬가지다. 기본을 등한시하는 혁신은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낳는 부작용을 가져온다.

또 우리는 변화 관리를 소홀히 해 변화에 실패한 사례가 많다. 대통령이 변화와 혁신을 주창하면 얼마 안 가 혁신 피로감·저항 같은 얘기가 나온다. 결국 마음을 한 방향으로 바꾸는 변화 관리를 소홀히 한 것이다.

공감하지 않는 혁신은 성과를 낼 수 없다. 성과가 없으면 재미와 즐거움이 없다. 결국 피로감이 쌓일 수밖에 없다. 성과를 내고 이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즐거움의 혁신을 이번 시리즈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것이 필자의 희망이다.

즐거운 혁신 전하고 싶어

앞으로 필자는 삼성 이야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할 것이다. 필자는 다행히도 삼성 같은 일류 기업에서 40년 가까이 일했다. 혁신 도입과 활용의 중심에 있었다. 이런 노하우를 더 많은 사람과 기업이 활용할 수 있도록 알려줘야 하는 게 남은 의무가 아닐까 한다.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또 글로벌 기업으로 뻗어나가는 사례가 많이 나와야 비로소 선진국 문턱을 넘을 수 있다.

삼성의 역사는 한국 혁신 경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故) 이병철 회장의 창업 이념 중 하나가 합리 추구였다. 이것은 합리적인 변화 관리, 즉 혁신을 말한다. 새로운 방법론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도전하는 문화가 창업 이념에 깔려 있었다. 이 회장은 앞서가는 사람의 말을 듣고 이를 도입하려는 조직 문화를 정착시키려고 애썼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신경영’도 마찬가지다. 장장 68일에 걸쳐 유럽과 일본을 다니면서 선진 기업을 벤치마킹한 여정은 세계 기업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임원 200명을 데리고 68일 동안 오직 벤치마킹만 하러 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과 결과를 분석하고 체계화한 연구 자체가 한국에는 없다.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은 인재 제일에 더 많은 정성을 기울인 분이다. 기업은 결국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이를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이 회장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채 제도를 시작했고 연수원을 만들어 조직적인 직원 교육에 힘썼다.

삼성 공채 1기는 1957년에 뽑았는데 직원 연수원이 따로 없어 외부에 위탁 교육을 맡기기까지 했다. 좋은 사람을 뽑아 잘 교육시키면 회사의 성장 동력이 된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삼성의 인재 개발 틀을 만든 것도 창업자다.

훌륭한 인재에게 혁신의 방법론을 가르쳐 준 사례는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이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삽·쟁기·트랙터·비행기 중 무엇을 줄 것인가에 따라 농사의 성과와 스케일이 달라진다.

그런데 우린 왜 방법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까. 한국적인 혁신 방법을 연구하는 사람도 드물고 학자도 없고 컨설팅 회사도 없다. 언제까지 다른 나라의 것을 배워다 따라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는 없다.

틀을 벗어나지 못하면 일류 국가나 선진국은 먼 얘기가 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식스시그마, 일본의 도요타 방식, 러시아의 트리즈가 있다면 한국에는 무엇이 있을까 깊이 고민해야 한다.

삼성의 역사는 한국 기업 혁신의 역사

중소기업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중소기업 육성책이 나온 지 이미 수십 년이다. 한국의 중소기업 백서와 일본의 백서를 비교해 보면, 우리 것이 오히려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은 유럽을 배워 산업화를 시작한 이후 스스로 깨우친 정책을 활용해 선진국이 됐다. 우리는 일본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정책을 도입하고 노력해 왔다.

백서의 항목 숫자는 많은데, 하나하나 내용을 깊게 들여다보면 형식에 치우쳐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제목은 그럴듯한데 알맹이가 빠진 격이다. 서정욱 전 과학기술부 장관은 “우리나라는 모내기 사진만 있고 추수하는 사진이 없다”고 말했다.

결국 내실 있게 추진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중소기업이 잘 안 되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결국 인력의 질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뜻이다.

대기업은 우수한 자질을 갖춘 인재,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는 사람들을 모은다. 여기에 그치는 게 아니다. 이들을 다시 세계에서 최고로 열심히 가르친다. 삼성처럼 직원 교육에 투자하는 기업은 세계에서도 흔하지 않다. 그러니 일류가 된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중소기업은 매우 낮은 수준의 교육 환경에 머물러 있다. 이것이 중소기업의 현실이다. 대책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모든 기업인, 사원들의 수준을 어떻게 뜯어고치고 교육시키느냐에 달려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고기술·고부가가치 산업 측면에서 본다면 이공계대학의 혁신부터 시작돼야 한다. 중소기업이 “이렇게 교육시켜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언론에서도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것을 보지 못했다. 전시 행정적인 혁신은 많지만 공과대학 증원 등 근원적인 문제는 다루지 않는 식이다.

생각해 보면 필자는 정말 행운아다. 혁신의 과정에서 항상 팀원으로 일해기 때문이다. 특히 1993년 신경영 기행이 독일에서 시작될 때는 이건희 회장의 수행팀장을 맡았다. 당시 비서실 소속으로 전자부문 전략기획팀장을 맡았기에 가능했다. 신경영을 함께한 건 굉장히 값진 경험이었다. 20세기 들어 그런 변화의 리더십을 보여준 사람이 없었는데, 그 과정을 함께한 건 행운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병철 회장은 나를 삼성전기에 잡아와선 “5년 동안에 10배 키우라”는 특명을 내렸다. 1982년 당시 삼성전자는 TV 부품 4가지를 만들며 매출액 300억 원에 머무르던 작은 회사였다. 이를 1987년까지 3000억 원으로 키우라는 소리였다.

25개 신규 사업을 도입하고 기존 사업도 확장했다. 매년 67%씩 성장해야 가능했던 미션. 그때 필자는 생산·기술 총괄을 맡고 있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경험을 쌓았다. 이것 역시 굉장한 행운이자 정말 감사해야 할 경험이다.

삼성에서 마지막 6년간 삼성종합기술원장으로 5년, 인력개발원장으로 1년을 일했다. 모두 초대 원장이었다. 삼성의 백년대계는 결국 기술과 사람이었는데, 그것을 온전히 경험했던 것이다. 기술원 5년 덕택에 기술 경영 전문가가 됐고, 인력개발원 덕에 사람 관리, 특히 리더십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손욱 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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