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革新2011. 11. 30. 11:59

사람이 곧 혁신이다 27


훌륭한 혁신 사례가 있다면 누가 됐든, 어디가 됐든 찾아가 배워야 한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그랬다. 이 회장은 1994년 즈음 일본의 이즈모시(市)를 찾았다. 이곳은 동해를 면하고 있는 작은 도시로, 이와쿠니 데쓴도(岩國哲人) 시장의 혁신은 바다 건너 한국에까지 알려졌다. 1936년에 태어난 이와쿠니 시장은 시를 국제도시로,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든 인물로 유명하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벤치마킹을 하기 위해 이 회장과 비서실 팀장들, 사장단 등이 모두 함께 시를 방문했다. 

이즈모는 이름 없는 중소 도시에 불과했다. 점점 쇠락해 가는 시를 보며 어느 날 지역의 원로들이 모였다. “이대로는 시가 몰락하겠다”는 판단이 선 원로들은 “훌륭한 시장을 모셔와 시를 부흥시키자”고 결의했다. 이즈모시 출신 인재들을 점검하다가 이와쿠니 데쓴도를 찾아냈다. 이와쿠니는 당시 미국 월스트리트의 모건스탠리를 거쳐 메릴린치의 부사장으로 일하던 잘나가는 금융인이었다. 

시의 원로들은 그에게 “당신이 이미 경제적으로 더 뭐가 필요하겠나. 지금까지 번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 그러지 말고 고향을 최고의 도시로 만드는 게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이냐”며 집요한 설득에 들어갔다. 결국 항복 선언을 받아냈고 이와쿠니는 고향에 돌아와 선거를 통해 시장이 되었다. 1989년의 일이다. 

이즈모시를 방문해 보니 생각보다 놀라웠다. 우선 곳곳의 나무 한 그루도 대강 심은 게 아니라 철저하게 글로벌화 계획에 맞춰 심어져 있었다. 행복한 도시를 위한 마스터플랜도 돋보였다. ‘행정도 서비스’라는 유명한 슬로건 아래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 같은 곳에 공무원 출장소가 마련돼 있었다. 

주중, 주말 할 것 없이 시민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에 출장소를 열고 시민 중심의 행정을 실현한 것이다. 시의 모든 행정은 시민 중심으로 돌아갔다. 시민을 위한 서비스 정신을 기업으로 돌리면 고객을 위한 정신으로 바꿀 수 있다. 이와쿠니 시장의 사례는 한 명의 리더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즈모시와 장성군의 혁신

전남 장성군의 혁신을 이끌어 낸 고(故) 김흥식 군수. 장성군의 혁신 사례를 다룬 ‘주식회사 장성군’이란 책도 베스트셀러에 올라 더욱 화제가 됐었다.

한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전남 장성군 얘기다. 장성군은 광주시 외곽에 자리한 곳으로, 얼마 전 작고한 김흥식 군수의 혁신이 군 전체를 변화시켜 화제를 모았다. 김 군수는 김황식 국무총리의 친형이다. 

김 군수는 ‘광주 같은 대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은퇴하면 어디에 살고 싶어 할까. 환경이 아름답고 먹거리가 풍부하고 인심도 좋은 시골 마을에서 은퇴 생활을 즐기고 싶어 하지 않겠나. 이런 장성군을 만들자’고 결심했다. 

계획의 시작은 ‘장성아카데미’ 설립이었다. 군민이 지혜로워야 장성이 발전한다는 뜻에서 세운 아카데미에는 매주 저명한 선생님들을 모셔 강의를 열었다. 강의는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진행됐다. 500명 정도가 정원인 강당에는 매번 계단까지 강의를 들으려는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군민들은 물론이고 지역의 군인·경찰·종교인 등 온갖 사람들이 모였다. 김 군수는 언제나 맨 앞에 앉아 강연을 경청했다. 그러다 보니 연사들도 장성군에 한 번 갔다 오는 게 자랑스러운 경력이 됐을 정도였다. 

군은 공무원들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600명에 이르는 공무원 전원을 유럽 연수를 보냈다. 예산이 없으니 비행기 값만 대주고 나머지 일정은 배낭여행 수준이었다. 

교육이 이뤄지자 아이디어가 샘솟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장성군을 세계에서 가장 좋은 동네로 만들까’하는 생각에 ‘나무를 심어 하늘에서 봤을 때 집이 보이지 않게 하자’는 20년 플랜이 나왔다. ‘유럽에 가보니 정말 아름다운 집들뿐인데, 우리도 이를 배우자’는 아이디어에 서울의 유명한 건축가를 찾아가 돈을 주고 설계도를 받아왔다.
 
이를 전시해 놓고 누구든지 무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권장했다. 그렇게 20~30년 노력하면 마을 전체가 아름다운 집들로 탈바꿈한다는 생각이었다. 아름다운 집과 수많은 나무, 교육을 받아 지혜로워진 사람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은 장성군이 되었을까. 공무원들도 이전과 달라졌다. 국가에서 하는 아이디어나 제안 공모에 응모해 매번 수상하며 상금을 받아왔다. 급기야 ‘주식회사 장성군’이라는 베스트셀러까지 나왔을 정도로 지방자치단체의 혁신 모범 사례로 이름을 떨쳤다. 



프로세스를 바꿔야 일류가 된다

1994년 1월 삼성전자의 전략기획실장으로 발령 받았다. 당시 전략기획실에선 마침 프로세스 혁신 작업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각계의 전문가들을 불러 마스터플랜을 짜던 시기였고 필자 역시 이에 참여하게 됐다. 

‘언스트앤영’이라는 미국 컨설팅 회사에 자문을 받으며 프로세스 혁신을 시작했다. 마스터플랜 중 가장 오래 걸리고 힘들었던 작업은 ‘어떤 회사를 만들 것인가’하는, 즉 비전을 잡는 일었다. 대부분의 한국 기업은 목표를 세울 때 톱다운 방식을 적용한다. 하지만 언스트앤영은 전사적 공감대를 통해 비전과 목표를 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직원들 스스로가 정한 비전이라고 생각하면 참여의 수준이 달라진다는 뜻이었다.

언스트앤영의 컨설턴트들이 프로세스의 중요성을 일러주기 위해 연 강연이 생각난다. 그들은 테니스 공을 가져온 후 10명씩 그룹을 지어 늘어서게 했다. 그러고는 첫 번째부터 마지막 사람까지 얼마나 빨리 전달하는지 시간을 쟀다. 1m씩 띄엄띄엄 서 있으면 시간이 더 걸리게 마련이다. “어떻게 하면 시간을 줄일지 고민해 보라”는 요구에 서 있는 거리를 줄이자 시간이 제법 단축됐다. “다른 아이디어도 찾으라”는 주문에 한 줄이 아닌 빙 돌아서서 해보는 등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나왔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길 때마다 시간도 단축됐다. 

마지막으로 한 컨설턴트가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며 시범을 보였다. 그러고는 10명이 손바닥을 둥글게 만들어 수직으로 터널을 만들게 한 다음 위에서 공을 떨어뜨렸다. 

“프로세스란 바로 이런 것이다. 미국은 이미 95%의 일을 정보 시스템(컴퓨터)이 하고 아주 복합적이고 전문적인 분야의 5%만 사람이 한다. 삼성은 95%가 사람이 하고 있더라. 이걸 고치면 얼마나 달라지겠나. 이것이 바로 BPR(Business Process Reengineering)다.”

프로세스 혁신에서 제일 우선인 것은 이와쿠니 시장, 언스트앤영 등 세계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을 찾아가 배우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를 능가하게 되면 비로소 최고의 프로세스가 되는 것이다. 삼성전자도 이후 미국의 휴렛팩커드(HP)를 찾고 제록스의 창고 시스템을 견학하고 IBM의 프로세스를 보고 배우며 토론해 비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생산성을 300% 올리자’는 과거의 구호는 ‘우리의 프로세스를 세계 최고로 만들자’는 슬로건으로 바뀌었다. 제품 관리, 경영관리, 로지스틱스(물류) 관리 등을 통해 5년 안에 모든 걸 바꾸자는 목표를 세웠다. 1999년 말까지 6년 정도가 소요되는 일이었다. 기술의 일류화, 사람의 일류화, 일하는 방법의 일류화를 이룩하면 비로소 세계 일류가 된다. 그때부터 삼성의 ‘일류화’가 시작된 것이다. 

오늘날도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이나 대기업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가장 어려운 이유가 일하는 프로세스의 차이에 있다. 한국의 컨설팅 회사들은 대부분 대기업 중심이다. 그러다 보니 중소기업·중견기업은 새로운 프로세스나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도입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다. 그러니 일하는 방법에서 수준 차이가 나고 경쟁이 안 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시급한 국가적 과제다. 일하는 방법은 대학에서부터 가르쳐야 한다. 미국의 대학에선 학문의 본질과 함께 일하는 방법, 즉 프로세스를 다 가르친다. 대학을 졸업해 중소기업에 입사해 이를 전파하면 전체적인 기업 경쟁력이 올라가는 시스템이다. 

핀란드는 대부분의 대학이 폴리텍, 즉 지역과 산학협력 시스템으로 이뤄져 있다. 대학과 지역사회가 함께하는 교육 시스템이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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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1. 11. 24. 20:06

사람이 곧 혁신이다 26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신경영’은 사실상 ‘창의’의 삼성을 만들기 위한 변화의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대 이병철 회장은 ‘인재 제일’, ‘사업보국’, ‘합리 추구’라는 3대 경영 이념을 제시하고 이에 따라 공채 제도 도입, 연수원 건립 등의 인재 양성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합리적인 시스템을 제일 먼저 들여온 것이다.

1980년대 들어오면서 새로운 변화의 시대가 열렸다. 컴퓨터·반도체가 발전하면서 지식 기반 사회로 변화해 가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 존중받길 원하고 꿈을 이루길 원하고 창의를 살리고 싶어 하는 욕구가 1980년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신경영은 곧 창의 경영

이 회장은 ‘삼성은 잘 짜인 조직이지만 관료화돼 창의가 숨 쉬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한 명 한 명의 역량이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환경이었다. 1988년에 회장으로 취임하며 제2의 창업 이념을 선포했는데, ‘자율경영’, ‘기술 중시’, ‘인간 존중’의 세 가지다.

“자율을 통해서만이 창의가 살아난다. 관리의 틀 속에선 역량을 극대화해 발휘할 수 없다. 앞으로의 지식 기반 사회는 자율적으로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 바탕이 되는 핵심 역량이 기술이다. 모방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첨단 기술로 혁신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의 바탕에 인간 존중이 들어 있어야 한다.” 요약하면 이랬다.

요즘 와서 보니 융합과 창조가 시대의 화두다. 1980년대만 해도 창조라는 인식조차 없었던 시대다. 리더의 선견지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러주는 사례다. 당시 이면우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에게 자문해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삼성을 ‘관리·전략·창의’의 기준으로 나눴던 기억이 난다. 이 교수는 당시 강연에서 “지금까지는 관리의 삼성으로 고도성장을 이룩했지만 앞으로 21세기 시대는 창조의 시대로 가야 한다. 지금부터 노력해 창의와 전략의 삼성을 만들라”고 조언했다.

관리의 삼성이라는 말은 기업의 조직 문화가 조직원들에게 잘 배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창의는 문제가 다르다. 아무리 창의적인 인재라고 하더라도 관료적 조직에선 살아남을 수 없다. 그룹 내부에서도 창의적인 조직을 만들기 위해 이에 걸맞은 인재들을 모아 조직을 꾸렸다. 아무런 제약이 없는 자유분방한 환경을 만들어 준 후 이들에게 삼성의 창의를 맡겼던 것이다. 1994년 삼성전자 전략기획실로 발령받은 후 조직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직접 가서 보니 창의적인 아이디어라곤 도무지 찾아보기 어려웠다. 새로 2기생을 모아 팀을 운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고민 끝에 다시 이 교수에게 부탁했다. “이렇게 젊고 창의적인 인재들을 모아 환경과 일하는 시스템을 다 바꿔주며 마음껏 하라고 했는데 아무 결과가 없다. 지도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교수도 “맡아서 해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비로소 창의 삼성을 위한 지도가 시작됐다.

당시 삼성은 백색가전 부문이 경쟁사에 비해 특히 약했다. 이 부문에서 창의적 아이디어를 발굴해 주면 좋겠다고 건의했는데 놀랍게도 3개월이 지나니 완전히 새로운 세탁기·냉장고·전자레인지가 나오는 게 아닌가. 불과 석 달 만에 워킹 모델(작동 모델)까지 등장했다. 이 교수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창의적인 조직을 만들기 위해선 시스템과 리더십이 뒷받침돼야만 한다. 마냥 편안한 상태에서 아이디어를 내놓으라고 하면 인간의 뇌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었다. 이 교수는 팀원들에게 “백색가전에서 한 번도 LG에 이겨본 적이 없다. 목표는 3개월이다”는 슬로건을 던졌다.

그러곤 팀원들과 매일 새벽 2~3시까지 함께 연구하고 뒹굴다시피 했다. 이런 리더라면 함께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생기자 팀원들 스스로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프로토타입(시험 제작 원형)을 만드는 일도 삼성의 시스템을 활용하면 6개월도 더 결렸다. 이 교수는 “대한민국 내에서 찾아보면 얼마든지 빠른 방법이 있다”며 새로운 방법론을 찾았다. 당시만 해도 청계천 세운상가만 가면 어떤 부품, 어떤 모양이든 밤을 새워 만들어 주는 소규모 업체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밤낮없이 노력하니 3개월 만에 워킹 모델이 나오기에 이른 것이다.


창의적인 기업만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다. 소니는 본래 독창적인 기술로 세상에 없는 제품을 만들던 회사였는데, 재무관리를 중시한 나머지 오늘날 위기에 몰리게 됐다.


창의적 리더가 창의적 조직을 만든다

창의의 삼성(조직)을 만들기 위해선 그만큼 창의적 리더가 중요했다. 리더를 중심으로 창의적인 조직 문화를 만들고 그것을 끊임없이 서포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했다.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는 거의 도산 직전까지 가는 어려움을 겪다가 최근에 다시 미국 시장 1위를 탈환했다. GM의 전 부회장이자 지금은 고문으로 있는 밥 루츠의 일화가 재미있다. 그는 GM에 있다가 포드와 크라이슬러를 거쳐 2009년에 다시 GM 부회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복귀해서 보니 최고의 제품으로 승부한다는 기존 경영 철학이 재무 성과만 추구하는 경영진의 방침 때문에 흐트러져 있었다고 한다.

품질과 명성을 잃는 순간 도산 직전까지 가게 된 것이다. 밥 루츠는 이를 ‘현장 인력(Car Guys) vs 회계사(Bean Counters)’라고 표현했다. ‘차를 만드는 장인과 콩을 세는 재무관리자’는 뜻이다. 최고의 기술자들이 재무관리자들에게 밀리는 순간 기업의 경쟁력은 무너지고 만다.

밥 루츠는 제일 먼저 디자이너에게 “어떻게 이런 엉터리 같은 디자인을 하느냐”고 질책했다. 그러자 디자인 총괄은 “제품의 원가절감만 고려해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GM의 최고 경영 방침이 재무책임자들에게 밀린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오늘날 소니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도 비슷하다. 소니는 본래 독창적인 기술,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드는 기술력으로 승부하는 기업이었다. 하지만 창조적인 연구·개발(R&D) 활동을 무시하고 재무적인 측면, 서비스 부문에 힘을 기울이는 순간 핵심 역량을 잃어버리게 됐다.

이 회장이 2000년대 들어 다시 강조하는 것도 창조 경영이다. 또 이를 위해 “‘초일류 인재’를 확보하는 것이 삼성의 살 길”이라고 얘기하곤 한다. 얼마 전 경영 일선에 다시 복귀하고 나서도 이를 강조하고 있다고 들었다.

창조적인 조직과 문화를 만드는 것도 힘들지만 그만큼 이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은 창의를 실현하는 리더를 양성하고 그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춰야만 진정한 창의 조직으로 변신할 수 있다.

애플이라는 기업의 부침은 한 사람의 리더가 조직의 성패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애플은 스티브 잡스라는 리더를 떼어 놓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기업이다. 잡스라는 창의적 리더가 있을 때 애플은 반짝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재무 전문가들에 의해 쫓겨나자 비로소 위기가 시작됐다.

이후 잡스가 복귀하자 놀라운 변신을 거듭하며 오늘날 최고의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으로 성장했다. 잡스는 어떤 제품을 내놓을 것인가라는 문제보다 어떻게 하면 조직의 문화를 창의적으로 발전시켜 갈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것이 애플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믿었다.

삼성의 ‘브레인 스토밍’의 핵심은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 대해 비평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남의 아이디어에 편승해 발전시키는 것을 장려하는 것이다. 관리하려고 하는 순간 아이디어를 판단하고 평가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아이디어는 사라지고 만다. 근무 환경이 아무리 창의적으로 바뀌어도 창의적인 조직으로 변하지 않는 이유는 리더의 창의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선 창의적인 환경은 공간 낭비일 뿐이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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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1. 11. 21. 10:27

사람이 곧 혁신이다 25

1980년대 초반에 ‘재팬 애즈 넘버원(Japan as No.1)’이란 제목의 베스트셀러가 있었다. 일본의 제조업이 세계를 제패하면서 일본의 품질·생산성·제품 등 일본을 배우자는 메시지를 준 책이다. 그러고 보니 일본이 독일과 협력한 지 올해로 150주년이다. 1800년대부터 교류 협력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일본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서구의 나라가 독일이고 독일도 아시아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일본이다. 두 나라는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다. 

독일도 일본처럼 중소기업이 강한 나라다. 독특한 장인 기술로 세계적 수준에 올라 국가 경쟁력 기반을 마련했다. 자기 직업을 천직으로 아는 천직 사상도 비슷하다. 

이러다 보니 양국 모두 테크니션(기능인)을 중시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한국은 대학을 나온 엔지니어와 테크니션의 사회적 인식 차가 크다. 자연히 급여 차이도 크다. 하지만 일본과 독일은 차이가 없다. 두 나라가 모두 기능인들을 굉장히 소중한 사회적 자본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독일은 초등학교 과정(5년)이 끝나면 직업인 교육을 받을 것인지, 대학에 갈 것인지가 이미 나누어진다. 직업인에 대한 존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천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잡혀 있으니 기술력 강한 중소기업과 중견기업이 나라를 버티게 하는 산업구조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일본은 이런 독일을 많이 배웠고 실제 국민성도 잘 맞는 측면이 있다. 



일본과 독일의 닮은꼴과 끈끈한 우정

일본이 독일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일본으로부터 배워야 할 게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미 군정 하에 있다가 6·25전쟁에 필요한 전쟁 물자 기지로 급격히 재편됐다. 군수물자를 싸고 좋고 빠르게 공급해야 하는 기지가 일본이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처음부터 일본을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에드워드 데밍 박사의 품질관리(QC)가 대표적인데, 훗날 일본의 TQC(Total Quality Control)로 발전했다. 미국식은 제조·생산에 치우친 방식이었는데, 일본인들은 ‘제조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사람을 뽑고 교육하고 부품을 사고 시스템을 만드는 모든 활동이 품질관리라고 생각했다. 즉 ‘전사적 품질관리’를 체계화한 것이다. 

생산관리에 있어서도 미군들이 VE(Value Engineering) 등 합리적 생산방식을 가르쳤다. 이를 다루기 위한 중간 관리자 육성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이를 받아들여 체계적으로 교육했다. 여기에 자체적으로 새로운 과정을 만들기도 했는데, 나중에 한국도 이를 도입했다. 세계 최강의 제조 경쟁력을 갖춘 일본을 미국이 이길 수 없게 돼 미국 본토에 산업 공동화를 일으킬 정도로 성공한 나라. 이런 현상을 보고 쓴 책이 ‘재팬 애즈 넘버원(Japan as No.1)’이었다. 

그즈음 또 한 권의 책 나왔다. 제목은 ‘재팬 인 유에스에이(Japan in USA)’였다. 이 책은 미국 본토에서 일본 기업들이 어떻게 성공하고 실패했는지를 분석한 내용이다. 일본은 제조업의 힘을 이용해 미국, 즉 현지 진출을 많이 시도했다. 그런데 실제로 미국 땅에서 성공한 기업을 찾는 건 어려웠다. 강력한 제조업 기반을 가지고 있는 일본이 왜 미국에선 실패했는가. 이를 조사 분석한 책이 ‘재팬 인 유에스에이(Japan in USA)’다. 

책의 결론부터 말하면 ‘경영 방침’이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하나의 단일 문화권이다. 그 속에서 하나의 경영 방침과 철학을 가지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미국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집합체다. 이들을 고용해 경영하려다 보니 일본에서처럼 철저한 경영 방침을 가르치고 유지하지 못했다는 게 책의 설명이다.

처음 미국에 간 일본인들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에서처럼 열심히만 일하면 될 줄 알았던 것이다. 현지인을 채용하고 계약서를 체결할 때 일본식으로 ‘성실하고 근면하게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한다’는 개념을 도입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실제로 계약서대로 최선을 다해 성실히 일하는 사원은 거의 없었다. 그들에게 “왜 계약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으면 “이게 우리의 가장 성실한 모습”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혼란에 빠진 경영진이 현지 컨설턴트를 불러 물으니 “미국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 미국이란 사회는 원래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고 생각이 다 다르기 때문에 계약 시 최선·성실 같은 단어로는 안 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을 할 것인지 업무 분장을 체계적으로 명문화해야 한다. 그렇게 계약서를 다시 써라”는 조언이 나왔다. 

경영진은 컨설턴트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예를 들어 ‘아침에 30분 청소한다’, ‘기계를 청결히 사용하면서 하루에 몇 개 이상 생산한다’ 등 구체적인 업무 분장표를 만들었다. 그런데 제대로 일하지 않고 문제를 일으키는 건 여전했다. 다시 새로운 컨설턴트를 불러 그간의 과정을 얘기해 주며 물었다. 그러자 “미국인들은 어떤 내용을 한다는 것만 있으면 안 되고, 어떻게 하면 처벌하고 상을 주는지 알려줘야 한다. 즉 지킬 약속,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의 처벌이 없는 계약은 아무 소용이 없다. 처벌 조항을 넣어라”는 말이 돌아왔다. 

신상필벌 조항을 넣자 그제야 조직이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발생한 것일까. 물론 일본인 경영진이 미국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일본 기업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경영 방침을 미국에서도 철저하게 지키겠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던 데서 문제가 출발한다. 이런 생각이 확고했다면 처음부터 그런 시스템을 갖췄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인의 처지에 맞추려다 보니 시행착오를 거듭했던 것이다. 

삼성전자도 미국 진출 초기에 상당한 손해를 보며 고전했다. 사진은 2000년 미국의 고급 전자 제품 매장에 진열된 삼성 디지털TV와 매장 모습.


경영 방침 준수가 해외 진출 성공의 열쇠

일본인은 처벌 없이도 최고의 품질을 위해 노력한다. 미국에 와서도 무조건 미국인들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미국 문화를 활용한 최고의 경영 방침을 세우고 이를 철저하게 지킨다는 노력과 의지가 있었다면 성공한 일본 기업이 더 많이 나오지 않았을까. 일본 사례와 비슷하게 삼성도 미국 진출 초기에 시행착오를 겪었다. 

처음 미국에 판매 법인을 설립한 삼성은 현지의 기업인 중 훌륭한 사람을 골라 CEO로 영입했다. 초기 얼마간은 고도성장을 이룩하면서 성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많은 부실채권을 남기며 큰 손실을 봤다. 한마디로 실패였다. 

정식 채용 전 그는 자신의 요구 조건을 장문의 텔레타이프로 전해왔다. 너무 많아 다 기억하지도 못하지만 신용카드는 몇 장을 달라, 골프 회원권은 어디 것, 스포츠센터와 자동차는 어떤 것 등 급여 외에 품위 유지와 생활에 필요한 자질구레한 것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요구한 내용이었다. 그때 우리는 ‘미국인은 뭐든지 확실하구나. 우리도 이런 걸 배워야 한다’며 그의 조건을 모두 들어줬다. 

하지만 그는 부실 영업으로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하는 말이 “삼성이 내게 원하는 걸 해줬는데 뭐가 문제냐”는 것이었다. 삼성 측에서 “우리는 신생 업체이니 미국 내 시장점유율을 빠르게 올리고 매출만 올려주면 된다”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높은 성장률을 달성하려면 부실을 감안해야 하는데, 매출을 올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달라고 하니 판매 조건을 완화하는 등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무엇이 문제냐?” 오히려 그가 우리에게 되물었다. 

우리의 경영 방침은 최선을 다해 성장하면서도 부실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인 CEO에게 이런 경영 방침이 아닌 매출 성장만 강조했다. 그러니 실패를 겪은 게 당연했다. 그 뒤 1985년에 반도체 영업을 시작하면서는 이때의 경험을 살려 철저하게 삼성의 경영 방침과 구체화된 목표를 제시했다. 조직 운영은 현지인에게, 즉 고용은 현지화했지만 삼성의 경영 방침이 철저하게 적용되도록 체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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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1. 11. 15. 11:55

사람이 곧 혁신이다 24

삼성의 해외 진출, 그중에서도 중국 진출을 이야기할 때 잊지 못할 일이 하나 있다. 이건희 회장의 이른바 ‘베이징 발언’이다. 이 회장은 “해외에 나가더라도 거점 전략을 잘 세워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삼성이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데는 ‘수원 단지’가 큰 역할을 했다. 융합 효과와 시너지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거리가 굉장히 중요한 경쟁력이다. 이 회장은 수원 단지를 보며 ‘해외에 진출하더라도 전략적인 거점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중국의 톈진·광둥성·상하이(쑤저우) 등이 대표적인 거점 전략 단지다. 말레이시아와 멕시코 등도 한 지역에 삼성 단지를 몰아놓았다. 그러던 차에 중국에서 최고경영자(CEO)들의 전략 회의가 열렸는데, 바로 이때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문제의 발언이 나오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컴퓨터 업체 AST 인수 실패의 비화

삼성자동차가 실패하지 않고 현대자동차 등과 경쟁했다면 오늘날 한국의 전체 산업 경쟁력이 한층 높아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도체 산업도 마찬가지다.

삼성은 1994년부터 AST라는 미국 컴퓨터 업체 인수를 추진했다. 그런데 마침 인수 허가 시점에 베이징 발언이 터져 나왔다. 당시만 해도 기업의 해외 진출을 정부가 강력히 장려할 때였다. 허가가 아니라 신고만 하면 투자할 수 있을 정도였다. AST 인수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시작됐다. 

이 회장의 베이징 발언 이후 AST 인수를 위한 신고서를 제출해도 접수 자체를 받아주지 않는 일이 이어졌다. 관련 부처에서도 “위에서 야단맞으니 접수할 수 없다”고만 얘기했다. 그런 관료들을 붙잡고 싸울 듯이 덤벼도 “우리 목 날아갈 일 있느냐, 살려 달라”며 오히려 그들이 애원하기까지 했다. 그 바람에 6개월이라는 시간이 허공에 날아갔다. 

AST는 당시 개인용 컴퓨터(PC) 업계에 혜성 같이 등장한 벤처기업이었다. 벤처 기업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결국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일시적인 경영 미스로 좋은 매물이 시장에 나온 상황이었다. 이들을 받아들여 삼성의 컴퓨터를 세계적 수준으로 만들어 보자는 게 우리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고 나니 중요한 인재들이 이미 다 빠져나가고 없었다. 결국 인수 자체를 백지화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까운 기회였다. 

‘삼성자동차’도 비슷하다. 우리 기업사에서 두고두고 연구해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회장은 소문난 스포츠카·자동차 마니아다. 자동차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저 재벌 회장의 호화로운 취미로만 볼 수 없는 것이, 실제로 이 회장은 한국의 산업 구조에 대해 얘기하며 자동차 산업을 특히 강조했다.

“독일·일본·미국 같은 일류 국가의 산업구조를 봐라. 전부 자동차 산업이 맨 위에 있다. 지금 한국은 전자 산업이 제일 크다. 하지만 전자는 산업 규모 자체가 자동차와 다르다. 일류 국가가 되려면 자동차가 일류가 돼야 한다. 구조적으로 많이 취약한 자동차 산업에 삼성이 진출해야 한다. 삼성이 국가적으로 해야 할 일은 자동차를 대한민국 최고로 끌어올리는 일이다.”

당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기 위해선 1조 원대의 자금이 필요했다. 반도체는 투자 대비 이익이 확실하게 보장되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자동차는 미지의 분야였다. “리스크가 있다”고 주변에서 조언해도 이 회장의 생각은 확고했다. 

“메모리 반도체를 시작할 때도 모두 반대했다. 그런데 총력을 기울여 오늘날 전자 산업이 한국 최고, 세계적 경쟁력을 갖게 된 것이다. 이대로 가면 우리는 여기에서 그친다. 자동차 산업을 키우지 못하면 4만, 5만 달러 선진국이 될 수 없다.”

결국 모든 경영진이 이 회장에게 설득 당했다. 실제로 반도체 산업의 취약점은 전후방 파급효과가 작다는 것이다. 반도체 제작을 위한 소재 산업도 규모가 작고 제품을 이루는 산업 규모도 자동차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자동차 한 대에 들어가는 부품은 2만 개가 넘는데, 반도체 소재 부품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다. 

드디어 ‘자동차를 세계 일류로 만들어야 한다’는 회장의 목표 아래 삼성자동차가 출범했다. 1998년, 3년의 개발 기간을 거쳐 처음 만들어 내놓은 게 SM5다. 이 차는 미국의 성능 기관에서 최고의 품질로 꼽히기도 했다. 그런 자동차를 정치·사회적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다. 지나고 생각해 보면 그 부담이라는 것도 별것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건전한 경쟁이 일류를 만든다

만약 현재 한국의 자동차 산업구조가 삼성과 현대가 긍정적인 경쟁을 하며 발전하는 단계라면 어땠을까. 독일도 벤츠와 BMW 등 몇 개 사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고 일본과 미국도 모두 마찬가지다. 한국은 거의 독주나 다름없다. 자동차 관련 부품 산업과 기술 등이 아직 일류를 따라잡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반도체 산업도 통폐합 과정을 거쳐 LG와 현대를 하나로 통폐합했다. ‘하이닉스’라는 외로운 존재는 힘을 발휘하기 쉽지 않았다. 만약 LG가 계속해서 반도체 산업을 꾸려왔다면 삼성과 경쟁하며 한국의 반도체 수준은 지금보다 더 발전했을 것이다. 지금도 LG가 전경련에 비협조적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당시 생긴 감정 때문이란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앞으로 미래의 기업인들을 위한 교훈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당시의 사례들을 분석하고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반도체 산업이든 자동차 산업이든 쌍두마차가 돼서 경쟁했을 때 더 강해지고 더 발전할 수 있다. 그렇게 됐다면 2만 달러를 넘어 4만, 5만 달러를 넘어가는 기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삼성전기도 자동차 부품을 많이 만들었는데, 당시 다 정리됐다. 현재 우리 산업군의 큰 역할 차지하는 게 자동차 부품인 걸 감안하면 안타깝기만 하다. 

현재 삼성전자는 대한민국 1등을 넘어 세계 1등이 됐다. 하지만 마냥 탄탄대로만 걸어온 건 절대 아니다. 이 회장은 틈만 나면 “큰 병, 암에 걸렸다. 망할 뻔했다”라고 표현하곤 했다. 첫 번째 고비는 역시 품질이었다. 

삼성은 선대 이병철 회장 때부터 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깊은 통찰 과정, 특히 일본 기업을 깊이 있게 연구했다. 성공의 요체를 잘 뽑아서 최고의 설비·인재·기술의 삼박자를 갖추도록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제일모직에선 한국 최고의 인재들을 뽑아 독일과 일본에 보내 교육시켰다. 또 설비는 독일산, 원료는 호주 최고의 소재를 들여왔다. 무엇이든 성공의 요소를 설정하고 확보해 실행하는 게 삼성의 원칙이다. 

그런데 삼성전자는 처음부터 최고의 기술처를 찾지 못했다. 후발 기업으로 급하게 시작한 면이 없지 않다. 산요와 기술제휴를 맺긴 했지만 효과가 적었고 재정적인 지원도 원활하지 못했다. 최소의 설비와 인재도 갖추지 못해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보니 초기에는 여러 문제들이 터져 나왔고 가장 큰 것이 바로 품질이었다. 

1970년대 대 후반 고도성장기가 지나고 2차 오일쇼크가 오자 품질 문제가 크게 대두되기 시작했다. 없어서 못 팔 때야 조금 못 만들었어도 됐지만 수요가 확 줄어드니 품질이 제일의 선택 기준이 된 것이다.
 
이 회장은 이때부터 출근 버스에서부터 시작해 생산 공장까지 직접 발품을 팔며 ‘일류 현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비서실에서 따로 감사팀을 내려 보내 감사하는 등 1년 이상 집중적으로 품질 문제를 제기하고 혁신했다. 그제야 비로소 문제가 해결되면서 삼성전자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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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1. 11. 15. 11:54

사람이 곧 혁신이다 23

제너럴일렉트릭(GE)의 잭 웰치 회장이 한국을 찾아 강연을 연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회사 내의 좋은 얘기는 회장에게 제일 빨리 보고되고 나쁜 얘기는 제일 늦게 보고된다”고 말했다. 소통의 원활함을 강조한 얘기다. GE에는 ‘워크아웃’이라고 부르는 회의가 있다. 기업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최고경영진이 공유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시스템이다. 투명하게 문제를 공유하는 열린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이다. 이건희 회장도 신경영에서 이를 강조했다. 

1995년 6월 1일 삼성전자는 신경영 실천 2주년을 맞아 그동안의 경영 성과를 사회에 환원하는 ‘95 고객신권리선언’을 발표했다. 오른쪽 끝이 필자.


이건희 회장이 ‘비디오’ 보는 법

이 회장과 함께 일본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이 회장이 어느 날 “장애인들을 위한 장애인 전용 공장을 만들자”고 얘기했다. 지금의 ‘무궁화전자’인데 삼성 수원 전자단지 바로 옆에 있다. 이곳은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벤치마킹을 위해 찾는 곳이다. 

이 회장의 지시로 회사를 세우기 전 프로젝트 팀을 만들어 6개월 동안 전 세계를 돌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장애인 공장을 견학했다. 드디어 모든 일정을 마무리 짓고 도쿄에 와서 프로젝트 팀의 보고가 이뤄졌다. 

팀장은 식사 자리에서 이 회장에게 자신들이 본 것과 앞으로의 계획을 보고했다. 그런데 보고를 다 들은 이 회장은 ‘세 가지’를 지적하며 다시 보완하라고 지시했다. 식사가 끝난 후 팀원들이 내게 물었다. 

“회장님이 장애인 공장에 대해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족집게처럼 집어낼 수 있죠? 우리도 전 세계를 돌며 지적하신 부분을 보긴 했는데, 너무 비용이 많이 들어서 뺐거든요. 혹시 비서실에서 미리 검토해 보고한 게 있나요?”

“우리도 처음 듣는다”고 해도 믿지 않는 분위기였다. 나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여서 나중에 이 회장에게 직접 물어봤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느냐. 팀원들이 굉장히 놀라워한다. 비결이 뭔가?” 그러자 “자네들은 장애인이 나오는 영화도 본 적이 없나”라는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 회장이 비디오를 많이 본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회장의 말에 따르면 장애인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선천적 장애인과 후천적 장애인이다. 

“선천적 장애와 후천적 장애는 완전히 다르다. 각각을 다룬 영화도 다르다. 비디오를 볼 때 한 번 보면 모른다. 장애인 자신의 처지에서 보고, 장애인의 절친한 친구로서 보고, 리더 역할에서 보는 등 다양한 시점에서 비디오를 보면 볼 때마다 느낌과 깨달음이 다르다. 드라마 속에 감춰둔 얘기들을 볼수록 많이 찾아낼 수 있다.”

신경영식 용어로 하면 ‘입체적으로 사고하라’는 말과 같았다. 갑·을·병의 다양한 입장에서 봐야 문제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섯 번 ‘왜’를 하라”는 말은 이 회장이 요즘도 강조하는 사항이다.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만큼 개개인의 성격과 특성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다. 삼성과 NEC는 초기에 합작회사를 운영했다. 브라운관 산업이다. 지금까지도 삼성과 NEC는 관계가 좋아 반도체 개발도 서로 협력 회의를 운영할 정도다. 

그런데 초기 개발 과정을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삼성 사람들이 학생처럼 질문을 연발하면 일본 사람들이 선생님처럼 답을 주는 광경이 많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직원들의 연령대도 삼성엔 젊은층이, 일본엔 장년층이 많았다. 

그런데 제품을 개발해 물건이 나오는 게 어느 시점부터 삼성이 NEC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256메가, 1기가 등을 NEC보다 먼저 개발한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면 스승과 제자 같은데, 기업으로 보면 삼성이 훨씬 빨랐다. 신기한 일이다.

어느 연구자가 한 말이 생각난다. “일본에 있는 후지산 꼭대기가 뾰족하다. 한국의 백두산이나 한라산엔 큰 연못이 하나 있어 물이 가득차고 넓다. 일본인들은 하나의 기술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사명감으로 깊이 있게 파고들어가 세계적 기술자가 된다. 대신 옆의 다른 기술에는 관심이 없어 시너지 창출이 안 된다. 그런데 한국은 깊이는 없지만, 주변에 관심이 많아 이것저것 들여다보고 얘기해서 이해하는 폭이 넓다. 협력·교류를 통해 시너지를 내는 데는 한국 기술자들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한국과 일본이 협력만 잘하면 엄청난 시너지가 나올 것이다.”


68일간의 신경영 대장정이 끝나갈 무렵이다. 이 회장은 “앞으로 신경영을 하려면 헌법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라고 얘기했다. 다들 ‘기업에 웬 헌법이냐’고 생각했지만, 회장의 지시니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논의해도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고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이 회장은 ‘인간미·도덕성·예의범절·에티켓’이라는 다소 뜻밖의 ‘4대 헌법’을 얘기했다. 

나중에 삼성전자에 와서 프로세스를 혁신하게 됐다. 고객 만족을 위해 어떤 프로세스를 만들 것인지 연구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수많은 조직과 직원들의 ‘도덕성’이 갖춰져야만 비로소 프로세스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또 서로 인간미와 에티켓을 갖춰야만 프로세스가 잘 돌아갔다. 이 회장이 천명한 4대 헌법은 바로 이렇게 가장 근원이 되는 정신문화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제야 이 회장이 엄청난 고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바로 4대 헌법이라는 걸 깨달았다. 



인간미와 도덕성 갖춘 기업이 돼라

누군가 “에티켓과 예의범절의 차이가 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설렁탕집에 청년 두 명이 들어와 두 그릇을 시켰다고 하자. 이어서 노인 두 분이 들어와 똑같이 주문했다. 그렇다면 주인이 어떻게 해야 에티켓이고 예의범절일까.
 
서구의 에티켓은 선입선출이다. 먼저 주문한 사람에게 먼저 주는 게 맞다. 그러나 동양적인 예의범절로 치면 당연히 어른부터 갖다 드리는 게 맞다. 이럴 때 주인은 두 가지 모두 고려해야 한다. 제 마음대로 결정하면 두 그룹 모두 반발하거나 섭섭해 할 것이다. 

젊은이에게 가서 “미안하지만 노인들이 시장하고 힘들어 보이니 먼저 드리면 안 되겠나”라고 물으면 어떤 젊은이들이 안 된다고 하겠는가. 이게 바로 에티켓과 예의범절을 따로 말하는 이유다. 조직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두 가지 모두를 함께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인간미와 도덕성을 강조한 건 인재 양성에 관한 부분이다. 삼성에 들어온 직원들은 한국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인재들이다. 부모에겐 가장 소중한 자식이다. 그들을 가치 있는 인재로 키워 성장시키면 그게 바로 인간미와 도덕성 있는 일이다. 남의 귀한 자식을 데려다 형편없는 인재를 만든다면 인간미와 도덕성이 제로라는 뜻이다. 

삼성도 초기에는 친인척들을 많이 활용했다. 하지만 그러면 잘못된 문제들이 벌어지기 쉽다. 이런 폐단을 알게 된 후부터 삼성 안에 친인척이 사라졌다. 혹여 친인척 관계에 있으면 오히려 승진이 늦어졌다. 회장의 특별 감사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협력업체라도 거래량이 늘거나 가격이 바뀌면 다른 사람보다 더 엄격하게 따졌다. 

자연스럽게 친인척의 권력 행사나 비리가 사라졌다. 회장이 그러니 사장들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사람의 중요성에 대한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사람 관리에 80%를 썼다”는 이병철 회장, ‘인재 제일’을 외친 이건희 회장의 철학은 오늘날의 삼성을 있게 한 근본이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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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1. 11. 15. 11:52

사람이 곧 혁신이다 22

“아무리 정리정돈을 강조해도 13년간 지켜지지 않았다”는 K 보고서의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몇 번의 ‘다시’ 끝에 듣게 된 답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니…. 도대체 ‘정리정돈’과 ‘자기애’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모를뿐더러 감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사고에 사고를 거듭해 가자 실마리가 하나씩 풀려갔다. 내가 정리정돈을 잘한다는 건 결국 자기한테도 큰 도움이 돼 돌아오게 마련이다. 남을 배려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마침내는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뜻이다. 결국 이 회장은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근원적 얘기를 했던 것이다. 

삼성이 일류 기업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고객을 사랑하는 마음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오르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제조 현장, 사무 현장을 가리지 않고 모두 일류가 될 수 있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1993년 6월 7일 나온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핵심은 ‘양보다 질’이었다. “지금까지는 양을 추구했는데, 이제는 질을 추구해야 한다. 양 100%를 벗어나 질 100%로 가자.” 질이라는 건 고객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것이고, 이는 결국 자신(삼성)을 위한 사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조하는 사람들은 양을 제로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양 50, 질 50으로 하시지요.” 이런 건의도 올려봤지만 이 회장은 확고부동했다. 오로지 ‘질 100%’ 이것이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시작된 신경영의 요체다. 



삼성 제품 바닥서 먼지만 뒤집어써

신경영이 시작된 배경에는 여러 사건이 있었다. 발단은 K 보고서다. 하지만 그전인 1993년 2월 로스앤젤레스(LA) 회의부터가 시작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회장과 삼성 임원들이 LA의 전자 시장 상가를 돌아본 일이었다. 직접 현장에 나가보니 눈에 가장 잘 띄는 높이의 전시대에는 온통 소니나 도시바 같은 일본 제품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다음이 미국산이었고 삼성 제품은 맨 밑바닥에서 먼지만 쌓인 채 방치되다시피 했다. 어떤 건 고장 난 채로, 또 어떤 상가에선 덤으로 끼워 파는 경품으로 내놓은 곳도 있었다. 힘들게 생산해낸 우리 제품이 경품 취급을 받으며 진열대 바닥에 놓인 모습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21세기는 정보의 혁명과 공유를 통해 모든 고객들이 1, 2등만 알고 찾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게 평소 이 회장의 생각이었다. 자동차 회사도 3등 안에는 들어야 하고 반도체도 1, 2등만 이익을 낼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런데 삼성은 1, 2등은커녕 아직 10등 안에도 못 끼는 수준이었다. 

이 회장은 ‘이대로는 살아남기는커녕 망할 일만 남았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회장을 제외한 어떤 임원도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실적과 매출 분석만 보고 큰 문제가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이 회장은 세기말의 변화를 보며 누구보다 절실한 위기의식을 품고 있었다. 

이 회장은 “일본에 가서 전문가들과 토론해 보니 모두 ‘삼성이 이대로 가면 망한다’고 하더라”는 얘기도 했다. 당시 디자인을 지도하던 일본인 H 고문도 “이대로는 안 된다”고 건의했다. 이 회장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대로는 미래가 없다,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바꿔야 하나.’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얻어낸 답이 바로 ‘질’ 경영이었다. 

이 회장은 세계 최고의 품질이 어떤 것인지 보고 듣고 깨닫지 못한 것이 삼성 위기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갑자기 삼성전자의 관계사 임원들을 한 명도 빼놓지 말고 다 집합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진 이유다. 200명이 넘는 삼성전자 임원들이 프랑크푸르트에 모였다. 

이들이 오는 동안 수행팀에 떨어진 명령은 “이제부터 유럽에서 세계 최고를 찾고 견학시켜 보여주라”는 것이었다. 자동차 제조의 최고라는 벤츠와 폭스바겐, 에어버스를 조립하는 파리 공항 조립 현장, 세계 제일의 백화점과 각종 인프라 등 세계 최고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실제 그 리스트대로 직접 찾아갔다. 돌아와서는 매일 저녁마다 각자 보고 들은 것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뼈저린 반성’이 회의 내용의 대부분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유럽과 일본을 거쳐 68일간 이어졌다. 그동안 임원들은 회사 일에서 완벽하게 벗어났고 전화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엔 몇 가지 질책만 듣고 곧 돌아갈 것으로 생각해 2~3일 출장 준비만 해온 사람도 많았다.
 
세계의 기업 역사에서 리더들의 마인드를 바꾸기 위한 이런 집중 교육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세계 최고를 직접 보고 우리의 현실과 비교하는 과정을 통해 임원들 전부가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현장 개선으로 이어졌다. 바로 이런 혁신 과정을 통해 오늘날 글로벌 삼성이 나온 것이다. 

당시 처음 선보인 도요타의 렉서스, 그보다 먼저 닛산의 인피니티에 이르기까지 유럽 시장에서 일본 차들은 제대로 팔리지 않았다. 독일 아우토반에 오르면 시속 200㎞가 넘게 고속 질주하는데, 그 길에서 일본 차들은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내구성과 신뢰성의 문제였다. 일본 제품들이 유럽에서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닛산이나 도요타도 엄청난 노력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닛산은 “우리가 독일 차처럼 만들지 못하는 건 몸으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닛산 회장은 개발자들을 독일로 보내 독일 최고의 차를 타게 하고 최고의 인프라를 경험하고 오게 했다. 그렇게 1년을 독일에서 생활하고 연구하고 돌아오니 과거 일본산 차를 타며 만족했던 체질이 사라졌다. 

일류 자동차만 타다 오니 ‘이건 자동차도 아니다’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유럽에서 처음 성공한 차가 인피니티다. 이를 똑같이 벤치마킹한 도요타도 렉서스를 성공시켰다. 두 브랜드는 유럽 시장 공략에 성공하면서 세계적인 명차 대열에 올라섰다.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하는 체험, 그리고 이에 따른 교훈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1993년 2월 18일부터 나흘간 진행된 미국 LA 전자부문 수출 상품 현지 비교 평가 회의 모습.세계 주요 전자제품과 삼성 제품의 품질·경쟁력을 비교하는 회의였다. 사실상 이때부터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이 시작됐다.


직접 경험해야 일류가 된다

삼성도 그랬다. 매일 저녁 큰 강당에 모여 서로 반성한 얘기를 나눴다. 어느 날엔가는 프랑크푸르트 호텔의 지배인이 “당신들은 무슨 종교 집단이냐”고 물은 적도 있다. 다들 검은색 양복을 차려입고 낮에는 전도하러 다니듯 빠져나가고 밤이 되면 교주 같은 사람이 맨 앞에 앉아 있고 앞에 나와 얘기하며 눈물까지 흘리는 일이 계속됐으니 종교 집단 같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일류를 체험하기 위해 호텔·음식·교통 등 모든 스케줄이 세계 최고로만 짜여졌다.

한 기업이 변화하고 혁신을 이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안에 있는 사람들의 깨달음이다. 그저 지시한다고 해서 혁신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마음으로 깨닫게 해 스스로의 눈높이를 높여줘야 한다. 

신경영 행보 가운데 제일 기억에 남는 이 회장의 말이 있다. “삼성이 이 세기 말의 큰 변화 속에 혁신하지 않으면 결국 망할 것이다. 망하면 무엇을 할 것인지 각자 생각해보라”는 지시였다. 이 말은 임원들에게 큰 깨달음을 준 계기가 됐다. 임원쯤 되면 자기 손으로 하는 일이 거의 없다. 주위에서 다 해주기 때문이다. 비행기표 하나 제 손으로 못 끊는, 더구나 망한 회사의 사람을 어디에서 받아줄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깨달은 건 정말 충격적이었다. 

또 다른 충격도 있었다. 임원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부장급에게 회사를 맡겨 놓았는데 돌아와 보니 오히려 그전보다 더 잘하고 있더라는 사실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임원들이 부장들에게 얹혀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임원은 상황을 크게 분석해 과제를 설정하고 조직을 변화시키는 전략적 기능을 맡아야 한다. 제 부서만이 아니라 회사 전체의 총제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그저 부분 최적화에만 집중했다. 실로 엄청난 반성의 계기였다. 신경영 정신은 요즘 같은 위기에 다시금 돌이켜봐야만 한다.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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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1. 11. 15. 11:51

사람이 곧 혁신이다 21

1992년 말에서 1993년 말의 1년간은 삼성에서 일했던 기간 중 가장 많은 것을 경험하고 보고 듣고 배운 시절이다. 바로 ‘비서실’이라는 조직을 통해서였다. 

삼성의 비서실은 최고경영자(CEO)의 심부름이나 하는 조직이 아니다. 이병철 회장 때부터 비서실은 전략 참모의 역할을 하는 삼성의 싱크탱크였다. 스태프로선 최고의 조직이다. 삼성은 기업 규모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던 1960년대부터 이미 비서실을 전략 참모 그룹으로 활용했다. 

이후 조직의 덩치가 커졌어도 비서실은 원활하게 움직였다. 가장 우수한 인재를 선발해 회장과 직접 멘토링·코칭을 거치기 때문에 훌륭한 인재와 참모로 커나가는 건 당연했다. 비서실 출신 CEO들이 많이 배출돼 삼성을 이끌어 오는 배경이다. 

군대도 500명 이상의 대대급부터는 인사·정보·작전·군수로 나뉜 참모 조직이 갖춰진다. 한 지휘관이 모든 병사를 관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참모 조직이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평가하고 추진하는 것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한 라인의 장을 직접 통솔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참모들의 지혜를 활용해 라인을 움직이는 조직을 운영해야 한다. 그래야 시행착오를 줄이고 올바른 방향으로 조직을 끌고 갈 수 있다. 

중소기업 CEO들은 흔히 회사가 성장해도 자기 혼자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의견 듣는 것을 소홀히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판단 미스로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 중소기업 수준에서 도산하는 기업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삼성을 비롯해 성공한 대기업들은 참모 조직이 잘 작동하고 있다. 이병철 회장은 모두가 인정하는 인사 전문가였다.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해 1950년대에 이미 공채 제도를 도입해 인재를 발탁했다. 그리고 참모 조직인 비서실을 통해 핵심 인재를 양성했다. 

캡션 : 1993년 8월에 열린 비서실 임직원 간담회 모습. 이건희 회장은 이날 ‘질’ 경영을 위한 도덕성과 인간성 회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훌륭한 참모 조직이 기업 성공의 열쇠

사람을 키우기 위한 이 회장의 독특한 질문법이 있다. 회의를 하면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질문하는 게 아니라 그저 “얘기해 보라”는 게 다다. ‘얘길 하라’는 건 그 사람이 맡은 조직에 대해 현재 상황, 가장 중요한 이슈·원인·대책·계획 등을 종합적으로 말하라는 뜻이다. 즉 조직의 장으로서 모든 일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는지 알기 위한 질문이 바로 “얘기해 보라”다. 

회의에 소집된 이들이 각자 조직의 전체적인 상황 분석, 문제 인식, 해결 방안 등을 정리해 두지 않으면 아무 얘기도 꺼낼 수 없었다. 지엽적인 문제를 말하면 경영자로서의 자질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러이러한 문제·과제가 있습니다”라고 얘기하면 경상도 사투리로 “와 그렇노”라는 질문이 돌아오게 마련이다. 이에 대한 답도 단편적인 얘길 해서는 합격점을 받을 수 없었다. 적어도 다섯 번 정도는 “와 그렇노” 소리를 들어야 그 질문이 끝났다. 문제의 본질과 심층적인 원인까지 알고자 하는 의도였다. 

“와 그렇노”가 끝나면 “우짤라 그러노”가 바로 이어진다. 바로 ‘대책’이다. 의사결정이라는 건 문제의 원인 분석, 거기에 대한 대책 수립이 핵심이다.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 “이러이러하게 언제까지 하려고 합니다”라고 하면 “그거만 하면 다 되노”가 따라왔다. 모든 문제에는 반드시 잠재 문제가 있게 마련이다.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위험성, 즉 리스크 요인들을 미리 설정해 대책을 세우고 있는지 확인하는 질문이었다. 요약해 보면 간단한 것처럼 보이는 질문에 ‘상황 분석→원인 분석→의사결정→잠재 문제 분석’의 순서가 정리돼 있었다. 

1986년에 삼성인력개발원을 중심으로 KT(미국의 케프너-트리고 박사가 고안한 문제 해결 분석법) 프로그래밍을 도입한 적이 있다. 미국의 최고경영자와 정치가 등 리더들을 연구했더니 그들 모두가 어떤 틀을 가지고 있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고의 순서가 이병철 회장의 질문 순서와 같았다.
 
수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이 KT 프로세스를 도입했고 삼성도 EMTP(Effective Management Thinking System)라는 이름으로 들여와 전 조직에 교육시켰다. 경영에서 조직원들의 합리적인 판단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삼성은 네 가지 프로세스마다 임원 한 명씩을 앉혀서 관리할 정도로 이 시스템을 중시했는데, 필자가 ‘잠재 문제 분석’을 강의하는 1기 강사였다. 

EMTP는 결국 이 회장이 평상시에 회의하거나 대화하며 질문하는 순서와 똑같았다. 고수가 되면 사고와 문제 해결의 방법론을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것이었으리라. 나중에 일본의 혼다를 방문하니 이들도 KT 프로세스를 우리보다 먼저 도입해 교육하고 있었다. 혼다가 바이크를 만드는 작은 기업에서 글로벌 자동차 기업으로까지 크는데 이런 프로세스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삼성도 그렇다.


신경영의 닻을 올리다

1993년 6월 7일. 기업인으로서의 내 삶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이 공표된 날이기 때문이다. 일본 도쿄 출장을 마친 이건희 회장은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수행팀장이 바로 필자였다. 

새로 임명된 비서실 팀장이 회장의 해외 순방 팀장을 맡아 수행하는 게 삼성의 관행이다. 국내에선 회장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바쁜 일과 중에는 힘들지만 여행 중에는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기에 생긴 관행이었다. 마침 그해 초부터 비서실에서 일했던 내가 수행팀장 역할을 맡게 됐다. 

이건희 회장은 도쿄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출발하기 전날, 일본의 전문가들과 새벽까지 토론을 이어갔다.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는데 비행시간 직전까지는 일본 관계자들과 골프도 했다. 거의 30시간 이상을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었던 것이다. 수행원들은 ‘틀림없이 비행기에서 주무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수행팀장은 행운이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편하게 자면서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예상은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여지없이 깨졌다. 이 회장은 문서 하나를 주면서 “읽어보고 왜 그런지 대책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게 바로 유명한 ‘K 보고서’다. K는 1993년까지 13년간 삼성전자에서 고문으로 일해 온 일본인이다. 그는 오디오 사업 부문에서 설계 기술을 가르쳤다. 보고서의 내용은 대략 이랬다. 

“일본인들은 연구·개발자들이 부품이나 측정기, 각종 도구를 사용하고 나면 원래 위치로 다시 가져다 놓는다. 다음 사람이 금방 찾아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연구 데이터도 잘 정리해 나중에 잘 활용한다. 중복이나 누락 없이 원활한 연구·개발이 가능한 이유다. 그런데 삼성은 13년 동안 정리정돈을 그렇게 강조해도 지금까지 안 된다. 내가 하는 건 한계가 있으니 이젠 회장이 조직 문화를 바꿀 때다.”

이 회장은 이 보고서를 건네며 “왜 안 되는지 원인과 대책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수행원은 모두 6명이었다. 결국 비행기 안에서 토론이 시작됐다. 책임의식·주인의식·룰(규칙·제도)·처벌 등이 없어서 그렇다는 둥 많은 논의와 답이 나왔다. 한두 시간 만에 답을 내어 보여드렸는데 이 회장은 그때까지도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몇 차례에 걸쳐 답을 드렸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다시”였다. 독일에 도착해 주재원을 방문하고 저녁을 먹고 또 토론이 이어졌다. 끝장을 내자는 심산이었다. 이후 몇 차례 더 보고를 해도 다 “아니다”라는 답만 들어야 했다. 

밤 12시가 넘어서까지 이런 상황이 이어졌으니 이 회장이 얼마나 잠을 자지 않고 있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보다 못한 홍라희 여사가 “사람들도 피곤하니, 이제 답을 알려드리세요. 그래야 내일 또 일을 할 수 있죠”라고 건의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그때서야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선문답 같은 답을 주며 “잘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신경영’의 시작이었다.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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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1. 11. 15. 11:51

사람이 곧 혁신이다 (20)

“다른 곳은 법 때문에 안 되는 게 많지만, 여긴 법이 있어도 합리적으로 접근하고 설득하면 들어준다. 그래서 나는 중국을 신뢰한다.”

삼성전기에 있으면서 이병철 회장의 지시로 25개나 되는 신규 사업을 동시에 추진했다. 매출 300억 원에 생산 부품이 4개에 불과했던 작은 기업은 5년 만에 30개의 사업 부서를 갖춘 조직으로 성장했다. 회사 규모도 10배나 커졌다. 현재 삼성전기는 세계적 부품 회사 가운데 하나다. 사업을 진행하고 키우는 방법, 혁신 작업을 통해 기업의 체질을 튼튼하게 하는 노하우 등을 삼성전기 시절에 다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기업의 성패를 좌우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인재다. 어떤 조직이든 혁신에 공감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불씨 같은 인재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 불씨가 일으킨 혁신을 전파하고 격려하고 공유하는 노력을 할 때 비로소 발전하는 조직이 될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반드시 챙겨야 할 것은 조직원 간의 커뮤니케이션이다. 30개가 넘는 팀을 운용하다 보면 항상 많은 문제가 생기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난 해당 사업팀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식사 후 그 식당에서 밤 12시까지 토론을 이어갔다. 주로 가던 집이 ‘해물탕집’이었기 때문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으레 “해물탕 먹으러 가자”는 말이 먼저 나올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해물탕집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근하다시피 하게 됐다. 흔히 한글의 핵심을 ‘미음(ㅁ)’이라고 하는데, 나는 소통의 기본 원리도 바로 이 ‘ㅁ’에서 시작한다고 정리했다. 제일 먼저 ‘만나라’ 그 다음 ‘마셔라’, ‘말해라’, 또 마음을 열기 위해 발가벗고 ‘목욕해라’ 등이다. 조직원 간의 소통을 위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캡션: 1991년 들어 삼성전기 공장이 처음 중국 둥관에 들어섰다. 사진은 1994년 삼성전자와 중국 톈진시의 복합단지 협의서 조인식 장면.

조직원 간에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니 한 달에 한 번 하는 이사회의 자료를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어졌다. 매일 현장 밀착형으로 일했기 때문에 모든 데이터와 현장 상황이 머릿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전까지 밤을 새워 다음날 회의 자료를 준비했던 다른 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원더링 어라운드 매니지먼트’라고 부른다. 리더가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보고받는 게 아니라 현장을 돌아다니며 즉석에서 보고 받고 지시하라는 것이다. 아쉽게도 한국 기업의 리더들은 대부분 사무실에만 앉아 있는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고 토론이 많아질수록 아이디어도 많이 모이게 된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기업의 중요한 성공 요소다. 삼성전기는 월 1회 회의를 열고 품질과 생산성 등 부족한 문제를 공고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해당 부서가 신청만 하면 연수원의 숙소를 빌려주고 1박 2일 동안 토론할 수 있는 시간을 내줬다. 

이후 대강 계산해 보니 1박 2일의 토론 합숙 동안 1명당 2000만 원의 효과가 나오는 것으로 나타났다. 20억 원을 절감해야 하면 100명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인간의 지혜라는 건 모여서 토론을 할 때 더욱 빛이 나게 마련이다. 삼성전기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토론하러 가자”고 말할 정도의 기업 문화가 자리 잡았다.


1991년 삼성전기 최초로 중국 진출

1991년에는 삼성전기가 최초로 중국에 공장을 설립했다. 광둥성 둥관시에 있는 둥관 공장이다. 선전 바로 위에 있는 도시인데, 지금은 외자 기업의 천국이자 가장 번성한 산업 단지지만 우리가 들어갔을 때만 해도 개발 초기였다. 

당시에는 산둥성의 칭다오 시장이 우리 기업을 끌어들이기 위해 한국을 많이 찾았다. 인건비가 싸고 정부 협력이 잘되니 허가를 받으면 한 달 만에 공장이 돌아갈 정도였다. 칭다오는 인천에서 페리선을 타면 금방 도착할 정도로 가깝다. 짐이 따라가듯 배를 타고 가보기로 결정한 이유다. 그날따라 파도가 심해 늦게 도착했는데, 통관 절차는 일사천리였다. 

정말 놀라운 건 모든 통관 작업이 배 위에서 진행됐다는 것이다. 세관원들이 미리 작은 배를 타고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가 탄 큰 배로 와 항해하는 1시간 동안 모든 절차를 끝마치는 시스템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중국의 저력을 다시 보게 됐다. 

배에서 내려 짐을 수속하고 칭다오까지 가는데 4시간이 걸렸다. 당시 공장 구경을 시켜준 사람 있는데, 일본의 조그마한 상사맨이었다. 그는 칭다오에서 1인 주재원으로 20년 넘게 일한 베테랑이었다. 그의 안내로 ‘하이얼’ 공장을 방문했다. 가이드를 맡은 상사맨에게 “중국이 관료 사회라 어려울 텐데 어떻게 이렇게 잘 버티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중국처럼 안정적으로 사업할 수 있는 곳이 없다”고 얘기하는 게 아닌가. 그는 “다른 곳은 법 때문에 안 되는 게 많지만, 여긴 법이 있어도 합리적으로 접근하고 설득하면 들어준다. 그래서 나는 중국을 신뢰한다”고 말했다. 

현장을 돌아본 후 ‘하루라도 빨리 중국에 진출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칭다오에 있는 여러 중소기업들이 삼성의 진출을 반대해 득보다 실이 많다는 판단에 둥관에 터를 잡기로 결정했다. 둥관은 이때 이미 전자 산업의 세트 기업이 많았다. 기왕 진출할 것이면 본거지로 들어가자는 각오도 섰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잘한 결정이다. 삼성은 현재 둥관과 선전 양쪽에 큰 공장을 가지고 있다. 

공장을 건설하면서 일본 상사맨이 이야기했던 ‘합리적 접근과 설득’을 직접 체험했던 일화가 생각난다. 한참 공장을 짓는 와중에 마을의 촌장 한 명이 매일 현장을 찾아왔다. 특별한 용무도 없었다. 그저 “필요한 것, 도와줄 것이 없느냐”고 물어보는 게 다였다. 

우리는 당연히 뭔가를 바라고 오는 것으로 치부해 버렸다. 당시 마침 주변에 대만과 홍콩의 공장이 있었는데, 우리를 방문한 그들은 “한국 기업은 어딜 가나 돈으로 매수한다는데 중국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조언하곤 했다. “당신들이 그러면 여기 생태계가 나빠지니까 제발 그러지 마라”고 신신당부하는 말까지 들은 참이라 촌장의 방문은 더 고민스러웠다. 


시골 촌장의 ‘일류’ 마인드

그러던 차에 통관 문제가 생겨 자꾸만 ‘퇴짜’를 맞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매일 찾아오던 촌장 생각이 난 건 그때였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그에게 사정을 얘기했더니 당장 “그런 문제라면 내가 같이 가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긴가민가하며 세관을 찾았는데, 얼마 안 있어 촌장이 직접 우리 짐을 찾아 들고 오는 게 아닌가. 촌장은 “내가 잘 얘기해 찾아왔다”며 중국 관리들을 설득한 얘기를 들려줬다. 

“우리 중국에 들어온 최초의 한국 기업입니다. 홍콩과 대만은 한자를 쓰지만 한국은 안 쓰죠. 그러니 틀린 게 고의는 아닐 겁니다. 중국의 체크 방법과 한국의 그것이 달라 착오가 생긴 것 같습니다. 이번에 통관시키면 내가 잘 얘기해 다음에는 착오가 없게 하겠습니다.”

그 뒤에 나는 촌장을 다시 만나 “촌장의 일도 많을 텐데, 어떻게 매일 이렇게 찾아와 물어보고 도와주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정색하며 “이것이 내 일”이라고 대답했다. 한 촌에서 공장을 유치하면 지방세가 할당되고 고용이 생기면 추가 지원이 이뤄진다는 것. 공장이 잘되고 많이 들어오면 그만큼 촌의 예산이 늘어난다는 말이었다. 

촌장은 “이런 걸 잘해야 좋은 평가를 받아 다음에 또 촌장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촌장이 할 수 있는 건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공장이 성공하고 고용을 늘리는 일이었다. 한낱 시골 촌장의 마인드가 이랬다. 오늘날 중국이 무서운 나라가 된 비결이다. 

첫 공장은 신축이 아니라 기존의 공장을 인수해 리모델링한 것이었다. 공장 건축에 쓰인 슬래브가 너무 얇아 전문가를 불러 강도 진단을 했는데, 놀랍게도 ‘이상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정부에서 모든 공사 과정을 칼 같이 점검하기 때문에 부실 우려가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 촌구석의 공장이 룰을 제대로 지키며 지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며 ‘이 나라는 정말 무서운 나라가 되겠다’는 예견을 할 수 있었다. 룰을 지키고 훌륭한 리더(촌장)가 있었기에 둥관은 외자 기업의 천국이 됐다. 지금 광둥성은 한국 전체를 능가하는 경제력을 지닌 부유한 성이다.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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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1. 11. 15. 11:50

사람이 곧 혁신이다 (19)

1992년에는 회장 비서실로 자리를 옮겼다. 전자 담당이었다. 당시는 금형 공장 자동화를 위해 캐드캠(CAD/CAM) 시스템 도입이 반드시 필요했다. 생산성 향상과 품질 개선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시스템이었다. 미국과 일본 등 기술 강국의 프로그램들을 검토하다가 일본 샤프와 교섭해 시스템을 사들였다. 당시만 해도 이 시스템에서 샤프를 따라오는 기업은 없었다. 

당시 삼성의 일본인 고문 중 샤프와 잘 아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소개로 샤프와 교섭을 시작하게 됐다. 그런데 이 사람의 말이 “소프트웨어만 도입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금형 가공 데이터를 축적해야 시스템이 돌아간다. 내가 보기에 한국은 축적 데이터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삼성전자도 IBM의 소프트웨어를 사다 놓고 못 쓰고 있는 지가 오래였다. 

삼성의 3차원 설계를 완성하다

지난 2001년 일본 도시바 니시무로 다이조 당시 회장의 방문을 받고 있는 이건희 회장의 모습. 이 회장은 일본 내 여러 기업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으며 오늘날 삼성 기술력의 토대를 쌓았다.

마침 샤프에선 “가공 데이터까지 모두 제공하겠다”고 제안해 왔다. 그런 회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샤프로서도 자신들의 시스템을 도입해 공장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모델이 필요했던 것이다. 

시스템 도입이 결정된 후 샤프의 기술자들이 와서 삼성전자의 3차원 설계 시스템을 진단했다. 진단 결과는 한마디로 엉망이었다. 

디자이너가 3차원으로 디자인하면 설계자들이 이를 다 풀어 2차원으로 만든 후 다시 3차원 설계를 하고 부품 개발자들은 또 설계 부문에서 3차원 데이터를 받아 2차원으로 바꾼 후 다시 3차원 작업을 하는 식이었다. 섬과 섬으로 단절돼 있는 시스템, 그게 당시의 삼성전자의 제조 시스템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이런 사정을 전해 듣고 크게 화를 내며 “100m 가서 원점에 왔다가 다시 뛰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질책했다. 

부분 최적화는 완성했지만 디자인·설계·부품 등의 작업에 호환성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이를 보완하려는 노력도 없었다. 그제야 비로소 삼성전자의 시스템이 디자인부터 부품까지 3차원으로 이어지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이 회장은 특히 이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리더가 가장 핵심이 되는 부문에 관심을 가지면 결국 문제점이 풀리게 마련이다.

삼성전기에 있을 때 제일 어려웠던 사업은 ‘오디오 데크’의 메커니즘을 만드는 일이었다. 쉽게 말해 카세트테이프를 돌리는 시스템인데,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실은 무척 정밀한 기계 조립품이다. 프레스 작업으로 만든 부품을 굉장히 정교하게 조립하는데, 불량률이 너무 높았고 작업 자체도 어려웠다. 

금형의 정밀도를 높여야겠다고 결심한 계기 중 하나가 바로 이 오디오 데크였다. 금형 관리, 철판 재질·규격, 프레스물 낙하 충격, 운반 과정 중의 변형 등 불량 요인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싸구려 중국산 때문에 가격 경쟁력도 확보하기 어려웠다. 

일본의 전자 부품사인 TDK의 마쓰지마 대표를 만난 것도 그즈음이다. 마쓰지마 대표는 ‘혁신의 전도사’로 통하는 분이었다. 이분이 전무였을 때 처음 만났는데, 내게 ‘IPS’에 대해 들려줬다. 풀어서 쓰면 아이디얼 프로덕션 시스템(Ideal Production System), 즉 ‘이상 목표 관리제도’다. 

TDK는 오디오·비디오테이프를 만드는 업체로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공장은 규슈의 가고시마라는 시골 마을에 있었다. 당시는 일본도 경쟁이 심화되고 동남아 제품이 쏟아져 나와 가격 경쟁력에서 밀려 적자를 보는 기업들이 많던 시절이었다. 한국도 새한미디어·선경·LG 등 테이프 제조업체가 굉장히 많아 고전하던 때다. 그런데 유독 TDK만 공장을 이전하지 않고도 살아남았다. 그걸 지도한 이가 바로 마쓰지마 대표다. 

그에게 오디오 데크 이야기를 했더니, 규슈 공장에 와보라고 권유했다. 당장 공장을 찾아가 프레스물을 보니 1분에 몇 번 찍는다는 설비 규격이 눈에 띄었다. 한국은 대부분 최종 규격의 80%만 찍어냈다. 풀 캐퍼를 채우지 못한 것이다. 금형이나 작업 환경 등 여러 요소 때문에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였다. 그런데 TDK는 120%를 찍고 있었다. 

“기계를 만든 사람의 최고 이상 설계만 달성하자”는 게 120% 생산의 비결이었다. 마쓰지마 대표의 말에 따르면 이데아(Idea), 즉 이상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개념이다. 최대치를 설정해 놓고 도전하는 것이다. 마쓰지마 대표는 이런 생각 끝에 “금형의 문제를 뿌리 뽑고 소재 문제를 개선하면 100% 가동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그리고 공장의 모든 부분을 설비 규격대로 돌리는 운동을 전개했고 몇 달 만에 이를 달성했다. 

마쓰지마 대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음으로 생각한 것이 “모든 설비 설계자는 반드시 여유를 둔다”는 것이다. 안전계수가 통상 20~30% 주어진다는 데서 착안한 발상이었다. 그는 “우리는 기계를 여유의 끝까지 쓰자”고 주장했다. 

실제로 TDK 공장에 가보니 모든 설비가 기어를 맞추듯 완벽히 돌아가고 있었다. 자연히 불량도 거의 없었다. 합성수지 사출기가 200개가 넘는데 근무하는 사람은 단 두 명에 불과했다. 설비 점검·보존에 한 명, 소재 공급에 한 명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자동화 시스템으로 이뤄져 있었다. 

200대가 넘는 기계를 단 두 사람이 본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당시 삼성전자는 한 사람이 2대 보던 걸 4대로 늘렸다며 한국 최고라고 자랑하던 시절이다. TDK는 공장 가동의 ‘극한’ 상태를 보여주었다. 바로 아이디얼(Ideal)의 상태다. TDK 가고시마 공장은 원가 면에서 유리한 해외 공장을 짓지 않고도 365일 양품을 만들어 내면서 전 세계 그 어느 공장보다 경쟁력을 갖춘 공장이 되었다. 지금도 세계의 음악 마니아들이 TDK를 찾는 이유다. 


‘이건희와 일본 친구들’, LJF

일본인들은 예전부터 부품을 엄청 소중하게 생각했다. 부품 경쟁력이 세트의 경쟁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 회장도 “삼성전자가 잘되려면 일본 부품 회사들과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고 얘기하곤 했다. 실제로 이 회장은 협력 모임을 만들라고 지시했는데, 이것이 ‘이 회장의 일본 친구들’이라는 뜻으로 통상 불렀던 ‘LJF’다. 정식 명칭도, 조직도 아니었지만 일본의 유명한 전자 부품 대표들과 이 회장이 친분을 쌓고 기술 협력을 진행했다. 마쓰지마 대표도 LJF의 멤버였다. 

이 회장은 LJF를 통해 부품의 중요성, 협력사와의 공생 발전 등을 배워 삼성에 뿌리내렸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지적이 “왜 삼성이나 한국 기업은 구매 책임자들이 상무·전무급이냐? 일본은 넘버 2다. 그건 부품의 소중함을 몰라서다”라는 얘기다. 마쓰지마 대표는 이 회장에게 이런 말도 전했다. 

“일본도 초기에는 독일과 미국에서 부품을 수입했습니다. 그때는 세트 업체들이 부품 업체를 홀대했죠. 하지만 1970년대 들어 부품의 소중함을 알게 되면서 부품 업체가 방문하면 세트 사장이 맨발로 뛰어나와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기업도 그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이 회장님이 모범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 덕분에 삼성전자에선 일본 전자 부품 전시회가 여러 번 열리고 세미나도 많이 진행됐다. 마쓰지마 대표는 그야말로 혁신의 전도사였다. 한번은 “삼성전기가 초소형 칩 콘덴서(MLCC) 제조에 문제가 많아 고민”이라며 고민을 토로한 적이 있다. 

마쓰지마 당시 전무는 “구체적인 기술은 영업 비밀이라 이야기해 줄 수 없다”면서 “TDK도 비슷한 고생을 했고 기술자 전원이 몇 달에 걸쳐 원인을 찾아 개선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씩 웃으며 “먼지가 원인이었다”는 말을 흘렸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먼지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환경도 다 뜯어고쳤다. 지금은 삼성의 MLCC 품질이 세계 최고다.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Posted by 프로처럼
공부/革新2011. 11. 15. 11:49

사람이 곧 혁신이다 (18)

일본은 어떻게 세계 최고의 제조업 강국이 되었을까. 그 비밀은 품질, 즉 ‘신뢰성’에 있다. 삼성전기에 근무하던 1988년 무렵 마쓰시타의 품질관리 담당으로부터 3년 정도 지도를 받은 적이 있다. 그가 우리에게 “신뢰성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예를 들어 TV의 고장 원인은 다양하다. 다양한 원인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면 그에 맞는 대책을 세울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마쓰시타 맨이 말한 신뢰성이었다. 마쓰시타는 TV를 처음 생산하면서 고장의 원인을 새로 알아내는 직원에게 상을 줬다. 전압·누수·먼지 등 고장의 원인은 무척 다양했다. 많은 연구원들이 근본적인 고장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실험과 연구에 경쟁적으로 참여했고 이를 ‘고장(failure) 모드’라고 불렀다. 


실패를 연구하는 기업, 마쓰시타

삼성전기의 생산 라인 모습. 일본의 미네베아에서 전수 받은 기술 혁신을 통해 한국 최고의 정밀 금형 공장이 들어설 수 있었다.

한국은 달랐다. 일본과 미국에서 ‘신뢰 모드’를 배우기는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일본도 미국에서 배우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만의 환경 안에서 고장 모드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한마디로 근원을 찾는 노력이다. 그런 과정이 쌓이고 쌓여 비로소 신뢰성을 갖출 수 있었다. 

초창기 TV는 진공관을 사용했는데, 고열로 고장이 잘 났다. 이를 막기 위해 등장한 것이 TV 케이스의 구멍이다. 공기를 잘 통하게 해 진공관을 냉각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구멍을 통해 쥐가 들어가 집을 짓고 심지어 새끼를 낳기도 했다. 수많은 신뢰성 연구 끝에 판매에 나섰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쥐라는 변수가 생긴 것이다. 그렇다고 구멍의 크기를 줄이면 진공관에 문제가 생기는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일본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들은 일본의 쥐라는 쥐를 다 모았다. 그리고 쥐의 몸 크기와 구멍의 크기를 일일이 대조하며 실험했다. 어느 정도까지 구멍 크기를 줄여야 들어가지 못하나, 가장 작은 쥐가 들어가지 못하는 구멍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 찾아낸 것이다. 근본을 탐구하는 노력, 그 탄탄한 토대 위에 기술을 쌓았기에 오늘의 일본이 자리할 수 있었다. 

우리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현대자동차의 엔진 개발 과정이다. 초창기 현대차는 미쓰비시에서 기술을 도입해 엔진을 만들었다. 이후 자체 개발에 나섰는데, 가장 큰 문제는 엔진 열의 냉각 기술이었다. 현대차의 엔진 기술자들은 엔진에 직접 구멍을 뚫어 일일이 열을 측정했다고 한다. 일본의 기업처럼 근원을 탐구하는 자세다. 이로써 현대차는 엔진에 관한 한 독자적 기초 기술, 기본 기술을 갖게 됐고 현대의 엔진을 벤츠와 미쓰비시에 역수출하는 성과로까지 이어졌다. 

미쓰비시의 회장이 현대차 이현순 부회장 시절에 회사에 찾아와 엔진 개발 현장을 돌아본 일이 있었다. 미쓰비시 회장의 방문 목적은 “엔진 개발이란 게 너무 어려우니 우리 기술을 쓰라”고 얘기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국 기업을 방문하고는 “지금 한국을 보니 10년 안에 현대가 미쓰비시를 능가할 것”이라는 회한의 말을 토해냈다. 

근원을 탐구하는 모습을 보며 오늘날 일본 기업에는 없는, 과거의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미쓰비시 회장의 말은 지금 현실이 됐다. 한국의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 근처에 정체돼 있다. 근원과 근본을 캐는 연구자들이 많아질 때 이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쓰시타는 실패 사례를 연구해 공유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필드 엔지니어’가 따로 있어, 그가 공장 전체를 순회하면서 기술을 연구해 공유하는 역할을 맡았다. 예를 들어 납땜 기술이 부서별로 차이가 있다면 좋은 기술을 찾아내고 잘못된 것을 개선하면서 사업부 전체를 도는 식이다. 이렇게 하면 전체적인 수준이 높아진다. 

마쓰시타는 중요한 요소 기술마다 필드 엔지니어를 임명해 분석·교육·개선 작업을 펴 나갔다. 근원을 파고 서로 배우는 동안 일본은 세계경제 넘버 2, 제조업 넘버 1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전자·철강·자동차 등은 글로벌 기술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산업이 많아 낙후돼 있는 게 사실이다. 전체적인 수준은 아직 멀었다는 뜻이다. 서로 배우고 상호 보완하는 노력을 통해 전체 수준이 오르는 과정이 제대로 이뤄진다면 삼성 같은 기업이 10개도 나올 수 있다. 


거실보다 깨끗한 금형 공장

‘미네베아’라는 일본 기업이 있다. ‘니폰 미니어처 베어링’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이다. 미네베아의 창업자인 다카하시 회장은 건강상의 문제로 일찍 숨을 거뒀는데, 생전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만나 한 가지 부탁을 전한 일이 있다. 

당시 미네베아는 베어링으로 시작해 일본의 전자 부품 회사를 인수, 동남아에서 생산하는 신규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다카하시 회장은 이 회장에게 “삼성이 전자 부품 사업을 도와주면 삼성이 필요로 하는 (베어링을 통해 습득한) 정밀 기술을 전수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는 약속이 실현되기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다카하시 회장은 후임 오기노 사장에게 유언을 통해 “내가 죽더라도 꼭 삼성을 찾아가 약속을 지켜라. 그래야 우리 부품 사업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기노 사장은 전임 회장의 약속을 지켰다. 삼성의 각 계열사에서 뽑은 20명의 정밀 가공 기술자들로 견학단을 꾸려 일본과 동남아의 모든 공장을 돌며 서로 협력할 부문을 찾았다. 그 당시 견학단의 리더가 바로 나였다. 

그런데 삼성을 경쟁자로 인식해서인지, 현장에선 제대로 된 견학이 이뤄지지 않았다. 사장이 직접 “다 보여주라”고 지시해도 모두가 무언가를 감추기에 급급했다. 이때 오기노 사장이 다카하시 회장의 명언을 전했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안 보여줘도 언젠가 한다. 할 수 없는 사람은 보여줘도 못한다. 그러니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긴밀하게 협력하려면 다 보여줘라.” 그 바람에 미네베아의 정밀 가공 기술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견학을 마친 후 기술 연수를 보내겠다고 제의했다. 길게는 석 달, 짧게는 3박 4일의 일정이었다. 장기 연수로 실제 현장에서 일하며 배우는 등 많은 사람을 미네베아로 보냈다. 하지만 이들의 기술을 제대로 전수받아 혁신을 이룩한 건 삼성전기뿐이었다. 삼성전기 금형 공장이 한국 최고로 변모하게 된 계기다.

삼성전기는 금형 기술이 회사 존망의 결정적 요소라고 판단했다. 연수를 갔다 온 사람들을 모아 놓고 우리가 잘못한 것, 배워야 할 것, 개선할 것을 공정별로 논의하게 했다. 각자의 기록을 한자리에 모아 공유하고 토론해 새로운 개선안을 만들어 냈다. 

미네베아의 금형 공장은 특이하게도 나무로 바닥을 깔아놓았다. 일반 주택에서 쓰는 바로 그 나무 바닥이다. 대부분의 공장이 모두 콘크리트 바닥이던 시절이다. 이들은 클린 룸 설비도 갖추고 있었다. 마이크론 단위의 정밀도는 온도와 습도 등에 굉장히 민감하다. 이를 제대로 유지하려면 그런 환경이 필요했다. 

나무 바닥은 기술자들의 의식 자체도 달라지게 했다. 고급 나무 바닥에 무엇이라도 한 번 떨어뜨리면 바닥이 망가지게 돼 있다. 기름이나 물도 흘리지 않으려고 주의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금형 공장은 지저분한 게 당연시됐다. 하지만 미네베아의 공장은 집 안 거실처럼 깨끗했다. 

삼성전기도 똑같이 바꿨다. 역시 직원들의 의식 자체가 달라졌다. 나무 마룻바닥을 가진 첨단 금형 공장이 드디어 한국에도 들어선 것이다. 의식이 바뀌고, 일하는데 정성을 기울이고, 배운 것을 연구해 개선하는 일이 삼성전기 안에서도 이뤄졌다. 급기야 삼성전기의 금형 생산성이 미네베아보다 30% 높아지는 성과로 이어졌다.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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