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革新2011. 10. 15. 11:27

혼돈의 시대… 길을 묻다
위클리비즈 창간 5주년, 역대 에디터의 인터뷰

분노의 구호는 3년 전 월가발(發) 거품 붕괴로 미국 경제가 초토화됐을 때보다 더 크게 들린다. 충격의 진폭을 차츰 떨어뜨리는 시간의 효과는 이번 위기에선 작동하지 않고 있다. 월가를 점령한 '99%의 보통 사람'들은 성난 목소리로 1%의 부자를 향해 적개심을 표출한다. 분노의 정치학은 논리를 갖추기 시작했다. 영미 언론에는 요즘 레닌의 수사가 자주 등장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

이 혼돈의 시대에 로버트 라이시(Reich) 미 UC버클리 교수는 분명한 로드맵을 그려내는 드문 경제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혼돈의 경제학과 분노의 정치학'을 예언했던 그의 진단은 갈수록 들어맞고 있는 것 같다. 과소비와 과잉 부채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고, 그 배후에는 소득과 부의 불평등 확대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에선 부자 1%가 전체 소득의 23%가량을 가져간다. 이런 극단적인 불평등은 대공황 직전에 있었다.

미국 UC버클리 캠퍼스에서 만난 라이시 교수는 "성장하는 경제에서 적은 몫을 받는 부자가 정체한 경제에서 많은 몫을 받는 부자보다 오히려 더 부유하다"며 발상 전환을 요구했다. 혼돈의 시대를 빠져나오려면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얻으면 다른 사람은 잃는 '제로 섬(zero sum)'의 사고 틀에서 벗어나, 더불어 좋아질 수 있다는 '포지티브 섬(positive sum)' 사고방식을 국가 경제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에게 '포스트 쇼크(post-shock)' 시대의 해법을 들었다.

토픽이미지
"보통 사람들을 위해 작동하는 자본주의로… 더불어 잘사는 포지티브 게임은 부자에게도 이득"

가진 자들은 더 내야 한다
富는 집중되는데 세율은 최저, 최소한의 사회적 서비스 위해 부자들이 공정한 몫 지불해야

부자들만 손해보는 건 아니다
몫은 커도 느린 경제 성장보다 몫이 작아도 빠르게 성장하면 부자들은 더 부유해질 수 있어

무작정 퍼주는 복지는 독
실제로 거둬들이는 것보다 계속해서 더 많이 쓸 수는 없어 그것은 '죽음의 사이클'이다

로버트 라이시 교수와 인터뷰 시간을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쇼크 이후 오히려 위기의 진폭이 다시 커지면서 미국 사회는 라이시 교수의 의견을 갈망했다. 그는 거의 매일 수업 짬짬이 미 UC버클리 캠퍼스 내 스튜디오에서 경제현안에 대해 물어오는 방송과 인터뷰를 가졌다. 라이시 교수의 여비서 레베카 볼스가 컴퓨터 모니터에 띄워 보여준 그의 스케줄은 시간별로 짜인 일정으로 빈틈이 없었다. 인터뷰는 수업과 수업 사이, 대학원 세미나실에서 50분간 진행됐다. 라이시 교수는 진 바지에 라운드 티 차림이었다.

로버트 라이시 교수는 “미국 상위 1% 부자는 전체 소득의 20% 이상을 가져가고 있고, 이는 1920년대 이후 가장 높은 비율”이라며 “(미 정부가 추진하는) 부유층 증세는 적절한 조치”라고 말했다. / AP
부자증세가 만약 계급투쟁이라면, 부자들은 자신 외 모든 사람을 상대해야 할 것

오바마 대통령이 '버핏 세금'을 도입했다. 마침내 당신의 조언을 실천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번 조치 발표 전에 조언을 했는가.

"아니다. 하지만 부유층에 대한 세금 인상은 적절한 조치다. 미국 상위 1% 부자는 현재 전체 소득의 20% 이상을 가져간다. 1920년대 이후로 가장 높은 비율이다. 반면 세율은 지난 50년간 가장 낮다. 미국의 국가 부채는 점점 불어나고 있고, 단기적으로는 경제를 다시 움직이도록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부자들이 자신들의 공정한 몫(fair share)을 지불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오바마 대통령의 제안에 대해 미 공화당은 "계급투쟁"이라고 부르며 반발하고 있다.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 유대와 도덕이다. 장기적으로 늘어가는 빚더미 속에서는 우리가 최소한의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길이 없다. 가장 여유 있는 사람들로부터 돈을 걷어야 한다. 나머지 사람들이 엄청난 경제적 곤경을 당하는 한 부자들은 계속 부자가 될 수는 없다. 만약 계급투쟁을 선언한다면, 부자는 다른 모든 나머지 사람들을 상대로 계급투쟁을 선포해야 하는 상황이다."

자본주의는 늘 진화한다

―이번 경제위기를 통해서 우리는 시장의 대실패를 목격했지만, 여전히 미국에서는 '큰 시장, 작은 정부'의 신자유주의 이론이 우월한 것 같다.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의 유산은 왜 아직도 이렇게 강한가.

"적어도 미국에서는, 큰 정부에 반대하는 문화가 늘 있었다. 미국이란 나라는 큰 중앙집권적 정부에 대항해서 혁명으로 세워진 국가다. 미국 헌법의 틀은 정부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견제와 균형을 말하고, 권력을 분리한다. 미국인들은 18~19세기에 개인주의를 수용했다. 단지 경제적 비상상황, 군사적 위급상황에서만 정부에 대한 이 같은 관념을 중단한다. 1932년부터 1946년이 여기에 해당된다.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 남긴 유산은 케네디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결국 냉소주의가 다시 돌아왔다. 만약 현재 미국의 경제위기가 계속 된다면 미국인들은 다시 정부를 해결책으로 기댈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 역사를 볼 때, 매우 힘든 일이다. 정부가 구해낼 것이라고 미국인들이 믿는 것은 비록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쉬울지라도 정치적으로는 어렵다."

―만약 다음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가 승리해서, 공화당이 주장하는 대로 긴축정책을 펼 경우 미국 경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만약 공화당 후보가 대통령이 돼서 정부 지출을 더 삭감할 경우, 미국 경제는 더욱 침체에 빠져 사실상 또 다른 불황을 맞을 것이다. 실업률은 심각하게 올라가고, 경제성장은 멈출 것이다. 경제는 위축되고, 위기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나빠진다는 것은 또 다른 '대공황(Great Depression)'이 찾아온다는 것인가.

"그렇다."

영국의 언론인 아나톨 칼레츠키는 '자본주의 4.0'이라는 책을 통해 역사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온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3.0'과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를 탄생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가 떠오르는 게 보이는가.

"자본주의는 늘 진화한다. 현재의 자본주의는 10년 전, 20년 전의 자본주의와 다르다. 2007년 경제침체가 시작되기 전의 자본주의는 월가가 경제에 지시를 내리는 체제였다. 1980년 이전에는 월가에 그런 힘이 없었다. 1990년 '글래스·스티걸 법'이 사라지고 난 뒤 월가는 힘을 갖기 시작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대규모 과점에 기반한 자본주의였다. 모든 산업에서 3~4개 주요 기업이 생산량을 조정하고, 엄청난 규모의 경제를 가졌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자본주의가 갑자기 변했다고 개념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항상 형태를 바꾸고 적응한다. 정말 문제는 자본주의가 보통 사람(average people)을 위해서 작동하느냐는 것이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미국에서는 1980년대 이후로 자본주의가 보통사람을 위해 매우 좋지는 않았다. 생산 근로자의 실질 평균임금은 떨어졌고, 인플레를 감안한 시간제 근로자의 평균 임금과 남자 노동자의 평균 임금이 떨어졌다. 하지만 최고 소득층은 매우 좋았다. 그들은 대부분 대기업의 경영진이거나 월가 종사자들이다."

“우리는 99%”, “ 백만장자들에게 세금을!”…. 세계 금융의 중심 미국 뉴욕에서 거대 금융기관들의 탐욕을 비판하는 ‘99%의 보통사람’들이 한 달 동안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지난 11일 뉴욕의 그랜드 아미 프라자(Grand Army Plaza)에 모인 시위대 모습. / 신화통신·연합뉴스
"유럽의 긴축정책은 악순환을 더욱 악화시킬 것"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문에서 '긴축만이 유로존의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단기적 고통과 장기적 이득 사이에는 역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소비자와 투자자들의 신뢰 증가와 실업대열의 축소는 중기적으로 (긴축으로 인한) 단기적인 소비의 감소를 상쇄한다고 했다. 이런 주장은 미 공화당의 주장과도 맥이 닿아있다. 이 논리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이 주장이 틀렸다는 것은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긴축은 '악순환'을 더욱 악화시킨다. 사람들이 쓸 돈이 없고, 정부는 지출을 할 수 있는 세수가 없어진다. 악순환의 고리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계속해서 아래로 추락하는 것이다. 1920년대 고전학파 경제학자를 비롯해 이런 견해의 주창자들은 문제가 과도한 부채라고 생각했다. 과도한 빚을 없애는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강제로 갚도록 했다. 고통스럽지만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은 가장 중요한 요소 한 가지를 빼놓았다. 사람들이 돈을 벌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들의 빚을 갚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일자리가 없는데 어떻게 빚을 갚을 수 있는가? 정부는 점점 더 납세자가 줄어드는데 어떻게 정부 빚을 갚을 수 있는가? 이것은 현실에서는 실패한 이론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에 관한 풍부한 경험이 있다. 아직도 이런 이론을 옹호하는 정치인이 있다는 것이 불행한 일이다."

―유로존의 주변국들은 통화동맹으로 빚을 얻기 쉬웠고, 미국은 달러화를 찍어냈기 때문에 빚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지역에서 문제를 악화시킨 이런 통화적 요소를 걷어내면 빚으로 지출을 떠받쳤고, 핵심에는 중산층의 몰락이 있는 것 아닌가.

"근본적인 측면에서 미국과 유럽의 문제점은 상당한 공통점이 있고, 이런 분석은 매우 타당하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하자면 유럽은 미국보다 훨씬 사회민주주의적 전통을 대표한다. 유럽에서는 불평등이 확대됐다고 하더라도 중산층이 미국에서처럼 곤경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아일랜드에서 재정이 불균형을 이루고 빚을 지게 된 것은 확대된 정부 서비스를 요구하는 중산층의 수요를 정부가 들어주면서 특히 부유층에 대한 세금을 더 걷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

그리스는 국민의 요구에 따라 복지정책을 확대했다. 복지정책의 확대는 중산층에 도움이 되지 않는가. 그리스의 이런 접근법이 갖는 문제는 무엇인가.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거둬들이는 것보다 더 많이 쓰는 것을 지속할 수는 없다. 은행과 채권자들은 지금 불안해하고 있다. 그리스는 세계의 채권자들에게 엄청난 빚을 상환해야 하며, 그들의 비위를 맞춰 계속 그리스에 돈을 빌려주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죽음의 사이클'이다. 그리스가 이 정도 고금리를 계속 지불할 수는 없다."

―결국 중산층을 지원하는 게 항상 옳은 것은 아니고, 경쟁력을 갖출 때만 올바른 처방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우리 모두가 원하는 첫째는 경제성장이다. 내가 경제성장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는 단지 물질적 재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비물질적 재화도 포함한다. 괜찮은 의료보험과 좋은 교육, 양질의 환경 등이 필요하다. 둘째는 중산층과 빈곤층, 고령 근로자계층 등이 성장에 따른 적절한 몫을 분배받아야 한다. 성장의 과실이 단지 부유층에게만 돌아가서는 안 된다. 부유층에게만 성장의 과실이 돌아가면 경제 전체적으로 충분한 구매력을 가질 수 없다. 그렇다고 모두 수출에만 의존할 순 없다. 모든 나라가 순수출국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산층과 그 이후 계층, 빈곤층에 정당한 몫을 지불하기 위해서는 상위 부유층에 대한 과세를 늘리고, 임금 보조를 확대하며, 소득 하위 50% 계층에 대한 공공서비스를 늘려야 한다. 이것은 고도 과학도 아니고 수학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다만 실행이 어렵다. 부유층은 경제적 힘뿐만 아니라 정치적 파워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국가에서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유럽의 주변국들에서 공공서비스를 더 많이 제공하면서도 부유층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도록 요구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경제전문가가 그리스를 부도처리 해야만 하고 대신 나머지 세계는 그리스 부도를 관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진단에 동의하는가. 만약 그리스 부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면 유로존은 해체될 것으로 보는가.

"그것은 암울한 전망이다. 그리스를 부도처리 하지 않는 다른 대안들이 있다. 유럽과 영국, 미국의 중앙은행이 그리스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리스가 부도날 것이라고 단순하게 가정할 이유가 없다. 그리스가 부도나면 유로존의 다른 많은 국가들도 위험에 처한다. 투자자들은 다른 국가들도 부도날 수 있다고 두려워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런 전염효과를 우리는 목격한 바 있다. 부도는 어떤 국가에든 안 좋은 것이다. 투자자들은 불안해하고, 따라서 정부는 리스크 프리미엄을 지불해야만 하기 때문에 돈을 빌리는 데 따른 비용이 점점 불어난다. 결국 그리스에 디폴트가 발생하면 모든 국가가 지불해야 하는 금액이 늘어난다. 지금 달려와서 그리스를 구제하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든다. 더구나 여기에는 사회적 비용이 계산되지 않았다. 긴축은 지독한 사회적 비용을 요구한다. 사람들이 실업된 상태에서 공공 서비스마저 감축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고통을 늘릴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불안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

"한국도 불평등 확대…모든 사람 이득 보는 포지티브 게임 해야"

한국에서도 양극화가 확산되고 중산층이 붕괴되고 있다. 복지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커져가고, 이에 상응해 늘어나는 국가부채에 대한 근심도 깊어지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국경제는 미국경제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지난 20~30년간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불평등이 점점 확대됐다. 점점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이 보다 많은 부를 축적했다."

―칼 마르크스가 지적하지 않았는가.

"나는 불필요하게 칼 마르크스와 엮이고 싶지 않다. 그가 말한 것 중 많은 것이 틀렸다. 하지만 최근 자본주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불평등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데이터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사실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를 어떻게 다룰 것이냐는 점이다. 불평등의 확대는 사회적 유대를 해쳐 사회적으로 위험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위험하다. 경제적으로 피해를 주고, 심지어 부유층에게도 피해를 입힌다. 부자들은 몫이 크지만 느리게 성장하는 경제보다 몫이 작더라도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에서 더 부유해질 수 있다. 이것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돈이 부유층으로 가느냐 아니면 나머지 다른 사람에게로 가느냐는 게임이 아니다. 부의 재분배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포지티브 게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득을 얻을 수 있는 포지티브 게임을 어떻게 다시 점화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1930~40년대 미국의 경험에서 보듯이 경제 성장으로 모든 사람이 이득을 본다는 것을 확실히 하는 게 부유층의 이해와도 일치한다. 정부가 적절하게 의료보험과 교육, 인프라와 경제발전을 위한 기초에 투자하도록 하는 것이 부유층의 이해와 합치된다. 경제적 모멘텀을 다시 확보하고 국가부채로 인해 정부가 디폴트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게 부유층에게 이득이 된다."

[출처] 조선일보
Posted by 프로처럼
공부/革新2011. 10. 15. 11:26

"문제는 타이밍… 변신시기 놓쳐 2류 전락한 스타 기업 수두룩"
작은 약국에서 시작… 230년간 달려온 日제약회사가 요즘 급진적으로 변하고 있는데…

용각산·정로환처럼 일본에서 탄생한 약품에 익숙한 한국이지만, 일본이 제약 대국이란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1781년 오사카 도쇼마치(道修町)의 약품상에서 출발해 230년을 달려온 세계 12위의 제약사 다케다(武田)약품. 이런 다케다가 주력 약품의 특허가 만료되는 지금, 영구(永久)기업을 목표로 급진적으로 변하고 있다. 제약의 세계에서 ‘특허 만료’란, 일본이 석권하던 제조업 시장에서 중국의 무명 기업들이 똑같은 제품을 양산하기 시작한 것과 같다.

다케다는 먼저 230년을 이어온 창업가문의 지배권을 버렸다. 다케다가(家)의 7대 후계자 다케다 구니오(國男) 회장은 2009년 경영권을 전문경영인에 집중시키기 위해 스스로 회사를 떠났다. 전권을 이양받은 전문경영인은 창업가가 남긴 현금 1조8000억엔으로 해외 기업을 매수해 영역을 신흥국으로 확대했다.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230년 동안 이어온 ‘무차입 경영’ 전통을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이유로, 다케다의 신용등급을 AA1에서 AA3로 두 단계 강등했다.

하지만 다케다약품 도쿄 본사에서 만난 변혁의 사령탑 하세가와 야스치카(長谷川閑史·65) 사장은 “신흥국을 포기하면 기업으로서 성장을 포기한다는 ‘패배 선언’”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경제단체 경제동우회 대표이기도 한 하세가와 사장은 지금 일본을 “심장마비까지 엄습한 만성 질환자”라고 표현하고, 정부를 향해서도 국가의 전면적 개조(改造)를 촉구하고 있다.

‘기술 대국’이란 특허가 만료돼 가는 일본. 다케다약품은 그런 일본의 축소판이다.

이대로 가면 파국을 맞는다는 것을 알면서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경우가 있다. 사람도, 기업도, 국가도 그렇다. 대지진이라는 초유의 재앙 아래에서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일본이 대표적일 것이다. 세계적 제약사 다케다(武田)약품은 230년의 역사를 가진 일본의 장수기업이다. 파국의 위기 속에서 다케다는 장수를 넘어 기업의 영속(永續)을 위해 어떤 결단을 내리고 있을까? 하세가와 야스치카 사장에게 다케다의 현실에 대해 물었다.

"과거 일본은 타이밍이 빨랐다."

―자동차나 전자는 따라잡아도 신약은 신흥국이 따라잡기 힘든 산업인 듯합니다.

"일본도 에도(江戶·1603~1868년)시대에 중국 또는 한반도를 통해 중국의 생약을 수입·판매한 것이 시작입니다. 결국 메이지유신으로 일본 정부가 일대 전환을 일으킨 것이 발전의 시작이지요. 거국적으로 서양의 진보된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대전환의 타이밍이 매우 빨랐지요. 이것이 어드벤티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다 2차대전 후 시작된 글로벌화가 1989년 동서 냉전이 끝난 뒤 급속히 진행됐지요. 그 타이밍에 일본 제약기업에는 메이지유신 후 축적된 연구가 있었습니다. 세계에 통용될 수 있는 약을 내놓을 수 있는 체제가 정비돼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빨리 타이밍을 잡는가, 누가 타이밍에 통용될 수 있는 약품을 내놓을 체제를 정립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제약산업 역시 단지 시간의 문제이지요. 한국이 뜻을 세운다면 세계에 통용되는 신약을 충분히 내놓을 수 있습니다."

―산업의 성격이 어느 정도 국민성에 맞아야 하겠지요.

"의약품은 여러 요소가 얽혀서 개발됩니다. 지금까지는 시장에 나오는 의약품의 90%가 이른바 저분자(low molecular)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정제나 캡슐과 같은 약품이었습니다. 다케다약품의 주력 상품인 고혈압, 당뇨병과 같은 생활습관병 치료제가 이런 기술에서 나오지요. 우리는 이 분야 연구에 역사와 전통이 있습니다. 질병의 메커니즘을 어느 단계에선가 멈추게 함으로써 질병을 치료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엔 연구자의 경험과 감각, 노력, 근성이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일본인의 강점이지요. 일본인의 멘털리티에 맞는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일본은 타이밍이 늦었다."

―앞으로는?

"저분자 테크놀로지로 치료할 수 없는 병이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유전자공학이나 HTS(High-Throughput Screening·동시에 다수의 물질을 고속으로 분석하는 고효율의 물질 탐색방법)와 같은 기술 혁신과 진보가 급진적으로 일어나는 시대이지요. 다케다도, 일본도 이 분야에서는 시대에 약간 뒤처져 있다고 생각해요. 이제 우리가 첨단을 따라잡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매우 엄중한 상황이지요."

―다케다의 경우 주력 신약의 특허가 줄줄이 만료되고 있습니다. 신약 개발이 어느 한 시기에 집중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30년 역사, 세계 12위의 제약사 다케다약품에 변혁이 일고 있다. 주력 약품의 특허가 만료되면서 신흥국 시장에 적극 진출하는 등 영속 기업으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도쿄 본사에서 만난 하세가와 야스치카 사장은“신흥국을 포기하겠다고 하면 기업이 성장을 포기하겠다고 패배 선언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 마이니치신문 제공
"연구·개발이란 정말로 불가사의합니다. 다케다약품만이 아니라 모든 세계적 제약기업엔 일종의 '파도'가 있어요. 최첨단을 항상 선도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기술 혁신의 템포가 느렸던 20년, 30년 전에는 과거의 성공법칙이 다음 단계에도 통용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혁신의 템포가 빠른 지금은 과거의 성공법칙이 통용되지 않아요. 모두가 필사적으로 신약(新藥)을 찾고 있으니까. 신약을 시대에 맞춰 고르게 개발해 기업에 밀려오는 파도를 평준화하는 공법(工法)은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파도를 낮출 수 없으니 능숙하게 파도를 타서 살아남을 수밖에요. 그것은 기술의 몫이 아니라 결국 경영의 몫, 경영의 결단이지요."

―무엇을 결단하는 것입니까?

"밖에서 개발한 기술을 라이선스하든가 사들이든가 아니면 아예 회사를 통째로 매수하는 방법입니다. 제약의 세계는 연구·개발도, 경영도 본질적으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지요."

"기회가 확산되는 시대"

―제약은 돈과 인력을 투입한다고 성공하는 산업은 아닌가 봅니다.

"세계 최대인 화이자는 7000~8000명의 연구자를 데리고 연간 7000억~8000억엔 규모의 연구비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늘 가장 혁신적인 신약을 내놓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요. 기업의 크기가 반드시 생산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약산업의 역사를 보면 200명 정도의 작은 연구 유니트(단위)에서 가장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기업과 바이오 벤처기업을 비교하면 바이오 벤처에서 새로운 것이 나올 확률이 높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 FDA(식품의약국)가 승인한 약품의 60%는 대기업이 아니라 대학과 바이오 벤처가 개발한 것입니다. 지금은 기회가 (기업) 외부로 확산되는 시대이지요. 따라서 지금 글로벌 제약기업은 자신의 연구 인력이 있어도 연구비의 30%를 외부 리서치에 투입합니다. 과거엔 5% 미만이었지요."

―전자·자동차처럼 대기업이 자본과 인력을 투입하면 제약산업도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믿음이 한국엔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케다약품이야말로 제약 대기업인데, 어떻습니까?

"연구자는 자부심이 없으면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부심이 집착으로 연결되면 이른바 NIH(Not Invented Here·자기가 개발하지 않은 기술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 신드롬에 빠져요. 좀처럼 외부의 연구를 좋다고 인정하지 않는 풍조이지요. 자부심도 좋지만, 지금은 그런 방식이 통용되지 않습니다. 외부와 리서치 얼라이언스(연구 제휴)를 하고, 리서치 콜래보레이션(연구 협업)을 하지 않으면 좋은 약을 안정적으로 개발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지요. 요즘 유행어로 하면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입니다."

다케다약품의 위궤양 치료제 프리바시드. / 블룸버그
1조1000억엔을 주고 산 것은?

―최근 스위스 의약품회사 나이코메드를 인수했습니다.

"의약품의 비즈니스 모델은 선진국과 신흥국이 다릅니다. 선진국은 특허 제품으로 이익을 내는 모델이지요. 특허가 끝나 제네릭(generic·특허가 만료된 오리지널 의약품의 카피약)으로 가면 제네릭 전문회사가 기존 시장을 점령합니다. 그런데 신흥국엔 '브랜드(Brand) 제네릭'이란 시장이 있어요. 제형(劑形)을 바꾼다든가 효능을 추가한다든가 해서 약간 형태를 변경해서 파는 것이지요. 신흥시장에선 제네릭도 브랜드를 확립하면 특허가 끝난 뒤에도 장기간 팔 수 있어요. 모델이 전혀 다르지요. 선진국 시장에 치중한 다케다약품은 신흥국의 '브랜드 제네릭' 노하우를 손에 넣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나이코메드는 우리가 발자국을 찍지 못한 신흥국의 브랜드 제네릭 분야에서 성공한 기업입니다."

―연구·개발 측면에서 나이코메드로부터 얻는 것은?

"거의 없어요."

―신흥국 조직과 노하우를 1조1000억엔에 산 것이군요?

"2008년 리먼 쇼크 이후 세계의 성장 패러다임이 확 변했습니다. 일본, 미국, 유럽이라는 선진 경제권은 여전히 세계의 부(富)를 70% 이상 창출하지요. 나머지 100여개국이 30%를 만듭니다. 하지만 이 30%가 새로 추가되는 부의 60% 이상을 창출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패러다임 시프트이지요. 신흥국에서 노력을 하지 않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세상이지요. 신흥국을 포기하겠다고 하면 기업이 성장을 포기하겠다고 패배 선언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이번 매수로 다케다의 세계 시장은 어떻게 변합니까?

"일본 밖에선 미국과 유럽과 신흥국 3개 지역 매출이 균형을 이룹니다. 요즘처럼 어느 특정 지역에서 변화가 일어나도 비즈니스의 안정성이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마련한 것입니다."

성공의 패러독스

―일본 기업은 전반적으로 신흥국 진출이 늦었습니다.

"성공의 패러독스입니다.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일본도 수출에 상당히 의존하는 나라입니다. 일본의 경우 주로 선진국 시장, 시장의 규율이 확실히 정비된 곳에 내구소비재와 자본재를 수출해 이익을 얻은 방식이었습니다. 신흥국이 저렇게 성장하는데도 '우리는 선진국 시장에서 돈을 잘 버니까 괜찮지 않으냐'는 생각만 한 것이지요. 배려가 약간 부족했던 것입니다."

―선진국의 성공 방식을 신흥국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한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삼성은 각각에 맞는 제품을 자신의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 팔았습니다. 일본 전자기업은 선진국에 팔던 제품을 기반으로 신흥국에서 요구하지 않는 부분만 제거해 싸게 판다는 생각이었어요. 그것이 잘못된 것이지요. 신흥국에 요구하는 것, 그들에게 맞는 것을 원점에서 개발했어야 했지요. 일본은 미국과 유럽에서 충분한 이익을 올렸으니까 그것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지요. 다른 선택을 한 한국은 지금 정말로 꽃을 피우고 있어요. 씨를 뿌려 놓은 것이 수확기에 들어간 것이지요. 미국, 유럽 같은 선진국 시장에서도 일본을 따라잡고 있고. 단, 한국도 인식해야 합니다. 이 역시 모두 '순번'이라는 것을요. 앞으로 같은 방식으로 중국이 따라잡겠지요. 한국과 일본처럼 자원이 없는 나라는 방법이 없습니다. 항상 일보(一步) 앞, 이보(二步) 앞에서 기술을 개발해 리드를 유지하는 방법 외엔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글로벌, 글로벌' 하다가 정체성을 잃고 2류로 떨어진 회사도 있습니다.

"우리는 230년 역사를 가진 회사입니다.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다케다이즘(Takedaism)'이란 가치관이 형성됐어요. 항상 성실하라는 것입니다. 공정, 솔직, 불굴. 메이지시대부터 다케다는 고품질의 약품을 정확한 분량으로 제공해 솔직하고 공정한 회사라는 평판을 얻었습니다. 의약은 생명과 관계되는 비즈니스이니까 신뢰를 잃으면 그것으로 끝이지요. 저는 직원들에게 '이 정신을 확실히 몸에 익히라'고 요구합니다. 인수한 기업도 마찬가지이지요. 230년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이상 우리는 정체성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신흥국에서 '공정'과 '솔직'만으로 영업이 가능할까요?

"가장 미묘하고 어려운 부분이지요. 그래도 몇번씩 강조합니다. '돈 벌지 않아도 좋다, 다른 곳도 (부정을) 하니까 우리도 한다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역시 경영자의 각오이지요. 신용을 중시하는 것이 일본 기업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일본 경제계의 금언 중에는 '손시테 도쿠토레'(損して得取れ·일시적인 손실을 보아도 그 손실에 의해 장래에 큰 이익을 얻는 것이 좋다)라는 말이 있지요."

창업 가문의 위대한 결단

―3년 전 창업 가문의 후계자가 물러났습니다. 정말로 그들의 영향력이 없나요?

"없어요. 두 가지 이유입니다. 첫째 역사가 길기 때문이지요. 다케다 가문이 보유한 회사 지분은 6.5%입니다. 일본의 상속세가 엄격하기 때문에 세대가 지나면서 지분이 줄어든 것이지요. 6.5% 지분으로는 기업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전임 사장인 다케다 구니오 회장이 정말로 위대한 결정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비롯해 회사 간부 자녀의 다케다 입사(入社)를 금지하는 룰을 만들었어요. 물론 자녀가 들어온다고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지요. 하지만 간부 자녀이니까 '옥석혼효(玉石混淆·옥과 돌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는 뜻)'로 들어올 가능성이 크고, 그런 사람들이 권력을 차지하면 회사에 마이너스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지요. 샐러리맨은 감히 누구도 만들 수 없는 룰입니다. 그것을 창업 가문의 후계자가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다케다이즘'이지요."

―전문경영인은 한정된 임기 때문에 큰 결정을 못 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많은 일본 기업이 그래서 곤란을 겪고 있지요.

"다케다 가문에서 회사를 인계받았을 때 현금 1조8000억엔이 있었어요. 저는 두 차례의 대형 M&A로 2조엔을 썼습니다. 빚까지 졌습니다. 다케다는 몇년 만에 사장이 바뀌어야 한다는 룰은 없어요. 단 사장은 몇살까지, 회장은 몇살까지라는 내부 룰은 있지요. 사장의 경우 실적을 내면 10년은 할 수 있다는 문화가 있습니다. 공기업이라면 몰라도 사장을 2년, 4년마다 바꾸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10년은 하겠다는 각오로 해야지요. 지금 결정하는 것의 결과에 대해 자신이 확실히 책임을 질 때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심장마비가 엄습한 만성 질환국"

―3대 경제단체 중 한 곳인 경제동우회 대표로서 정부를 향해 강력한 소신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으면 협박이 아니라 기업은 해외로 떠날 수밖에 없다"고도 했고.

"뭘 모르는 이상주의자들이 '정치 주도'라고 나서면서 관료 말도 듣지 않고, 노하우도 알려고 하지 않아요. (집권 민주당은) 당 자체가 정권 획득만을 목적으로 모인 당입니다. 자민당 시대부터 누적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아요. 국가 채무가 GDP의 180, 190%인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지요. 과거 15년 동안 경제가 전혀 성장하지 않은 나라도 없지요. 디플레이션(물가 하락) 경제에서 소비자는 좋을지 모르지만, 기업은 정말로 지옥과 같아요. 일본 기업은 한국 기업처럼 국내 시장에서 돈을 벌어 국제 경쟁을 위한 힘을 비축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 소모전으로 본 적자를 해외에서 벌어 충당하고 있지요. 일본은 극히 왜곡된 장사를 하는 것입니다. 사회 복지도 당연히 이 상태로는 더이상 유지될 수 없지요. 나라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 정부는 그대로 방치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지진이 덮쳤으니 만성병에 시달리던 사람에게 심장마비가 엄습한 것과 같지요.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결국은 환자(일본)가 죽을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정치는 비전도, 미션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지진은 일본 경제에 최종적으로 어떤 영향을 줄까요?

"일본의 모든 사람들이 말해요. '대지진을 동북지방의 복구만이 아니라 일본 경제의 재생을 위한 계기로 삼자'고. 하지만 아무리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해도 정부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법을 만들지 않으면 공염불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일본은 지금 그런 상황이지요."

―그렇게 소신 발언을 하면 기업 경영에 곤란을 겪지 않나요? 정부가 괴롭힌다든가?

"일본은 그런 나라까지는 아닙니다." 

[출처]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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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1. 10. 15. 11:25

[위클리비즈 창간 5주년, 역대 에디터의 인터뷰] 혼돈의 시대… 길을 묻다
"리스크 큰 CT<컬처 테크놀로지>산업… 내 성공 비결은 매뉴얼, 인내 그리고 꿈"

5만5000명의 청중이 야광봉을 흔들며 파도처럼 물결 치고 있었다. 5시간 30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이어진 공연을 거의 모든 청중이 내내 서서 지켜봤다. 소녀시대동방신기, 슈퍼주니어가 나타날 때마다 그들은 환호하고, 따라 노래를 부르고, 눈물을 흘렸다.

이수만 회장이 말한 '버추얼 네이션(virtual nation ·가상국가)'이란 말이 실감 났다. 일본의 심장 도쿄돔에서, 거의 대부분 한국어로 불리는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그들은 일본인이기도 하거니와 'SM엔터테인먼트'라는 가상국가의 국민이기도 한 것이다.

이 공연의 티켓 값은 1만2800엔, 우리 돈으로 약 20만원이다. 그런데 맨 앞자리이든 3층 맨 뒷자리이든 객석 어느 자리나 티켓 값이 똑같다. 이수만 회장의 표현에 따르면 자리는 오직 '충성도'에 따라 결정된다. 인터넷 예매 때 1초라도 빠르면 앞자리에 앉고, 5분이 늦으면 맨 뒷자리에 앉는 식이다.

원래는 4월에 갖기로 한 공연이었다. 그런데 3·11 일본 대지진이 터졌고, 공연이 무기 연기됐다. SM측은 티켓값을 환불해 주려고 했다. 그런데 팬들이 결사 반대했다. "로또 당첨되듯 표를 구했는데, 왜 뺏어가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환불해 주지 않고 돈을 고스란히 5개월을 갖고 있다가 공연했다. 장사를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프랑스의 경영 석학 장 클로드 라레슈 교수가 "제품을 고객에게 밀어붙이기 식으로 팔지 않고, 사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들라. 스스로 물살을 만들어 올라타라"고 했는데, 바로 이런 게 딱 떨어지는 예일 것이다.

기자는 이수만이 부른 ‘행복’이며 ‘모든 것 끝난 뒤’와 같은 노래를 듣고, 그가 진행하는 TV쇼를 보며 자랐다. 그런데 처음으로 직접 만난 그의 나이가 만으로 59세. 내년이면 환갑이다. 여전히 젊고 활기찬 모습이었지만, 세월의 더께를 감출 수 없었다. 기자는 첫 질문으로 지난해 그의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강연 이야기를 꺼냈다.

―강연 제목이 ‘귀를 자르려고 하지 마라(Don’t try to cut your ears)’였는데, 어떤 내용이었나요?

“반 고흐 같은 천재가 귀를 자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겁니다. 천재들을 위한 교육을 하고, 천재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회 기반을 만들자는 이야기였어요. 반 고흐의 천재성은 남들이 못 갖고 있는 오감(五感)에서 나왔을 겁니다. 그는 음악을 들어도 그림이 보이고, 음식을 먹어도 그림이 보였을 겁니다. 이수만이란 사람은 반대로 그림을 보면 음악으로 들리겠죠. 어느 날 고흐가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그랬더니 벽이 막 녹아내리는 겁니다. 영화에서 가끔 보잖아요? 소리를 들으면 보이는 거죠.”

―감각이 통합되는 경험 말씀이군요.

“예. 사실 그런 경험은 천재에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고흐도 그런 느낌을 처음엔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스스로도 감당을 못하게 힘들어진 게 아닐까. 그래서 귀를 잘라낸 게 아닌가 생각해 보는 겁니다. 천재를 위한 교육이 안 돼 있어서 생긴 비극인 셈입니다.”

그는 주먹구구식이던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최초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도입했다. 고흐처럼 천재의 싹을 가진 연습생을 뽑아 13년 동안 장기 육성해 아이돌 스타로 길러냈다. 그는 영재학교의 교장이었던 셈이다.

◇우연과 일회성에서 벗어나는 시스템화가 필요

하지만 13년에 이르는 장기계약은 ‘노예계약’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공정거래위원회와 협의 끝에 계약 기간을 한국에만 있을 경우 7년, 해외에 나갈 경우 10년으로 줄였다고 했다). 13년이란 시간은 연습생에게는 물론, 경영자에게도 긴 시간임에 틀림없다. 그 기간 동안은 책임지고 키워주겠다는 약속이니까.

가수이자 TV쇼 진행자였던 이수만. 자신의 영문 이름을 딴 SM을 통해 수많은 아이돌을 길러낸 그는 영재학교의 교장이었던 셈이다. /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수만 회장은 K-팝이 전 세계를 휩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장기 계약에 의한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꼽았다.

“우리 같은 매니지먼트 시스템은 미국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연습생을 선발해서 장기 계약해서 오랫동안 트레이닝하는 일이 미국에선 못하게 돼 있습니다. 미국은 에이전시 제도라고 해서 가수나 연예인이 스스로 커지면 에이전시 회사에 일을 하도급을 맡기는 식입니다. 그러니 에이전시가 하도급업체로 전락하고, 유망주에 장기적으로 투자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뒤늦게 문화산업이 발달한 한국이나 일본은 자유 계약이 가능했고, 그래서 장기 투자를 하게 된 겁니다.”

―CT(컬처 테크놀로지)라는 말을 만드셨는데, CT 산업에서 승자가 되는 비결은 뭡니까?

“IT 산업을 흔히 고위험-고수익 산업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CT 산업은 한술 더 떠 초고위험-초고수익 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연과 일회성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그는 도자기공의 예를 들기 시작했다. “어느 뛰어난 도자기공이 독보적인 도자기 제조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기술은 그의 감각과 손끝에 있습니다. 그것을 배우려면 그 사람 밑에 들어가 배워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런 기술을 잘 성문화(成文化)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면, 그리고 이것을 잘 전수해서 저작권료를 받았다면 하나의 산업이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SM은 이걸 하자는 겁니다. 제가 갖고 있는 것, 또 우리 직원 누군가가 갖고 있는 기술, 이런 것들을 성문화하고, 교육을 통해 전수하자. 그래야 지속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시스템이 정립되지 못하면 모든 것이 우연으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이죠.”

요컨대 문화산업 특유의 ‘암묵지’를 ‘형식지’로 전환시키는 매뉴얼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의 충고는 비단 엔터테인먼트산업뿐만 아니라 ‘초불확실 환경’에 직면한 모든 기업인들에게 의미심장한 충고일 것이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가 매우 치밀하고 논리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경영자라면 감성 지향의 우뇌형 경영자의 모습을 기대하기 쉬운데, 그가 구사하는 언어는 다분히 좌뇌적이었다.

그는 “이수만이 없으면 SM이 끝나는 것 아니냐고 걱정들을 하는데, 그래서 이수만을 대신할 수 있는 ‘클론’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사내에 춤과 노래, 믹싱 등 각 분야 전문가 6명으로 만든 팀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란 플러스 알파를 갖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이수만의 머리를 카피한 것 이상이 나올 것이고 SM은 더 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수만 경영의 요체는 ‘인내’

이수만 회장을 오랫동안 지켜본 이장우 경북대 교수(경영학)는 그의 성공 비결을 “최고를 위한 인내의 경영”이라고 표현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선택의 연속이다. 좋은 가수를 고르고, 좋은 스태프를 고르고, 좋은 음악을 고른다. 그런데 그 선택에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사람이 이수만 회장이다. 선택을 위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선택지를 검토하지만, 그래도 답이 없다고 생각하면 깨끗이 포기한다. 회수할 수 없는 ‘매몰 비용(sunken cost)’이 발생하게 되지만 개의치 않는다. 어정쩡한 제품에 목을 매는 리스크를 감수하기보다는 시간과 비용이 들어도 최고가 될 때까지 투자하고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수만 회장이 키워낸 대표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 / 연합뉴스
SM엔터테인먼트는 요즘 새로운 팀을 내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 똑같은 콘셉트의 팀 두 팀을 구성해서 한 팀은 한국에서, 다른 한 팀은 중국에서 동시에 같은 곡을 부르게 된다. 가칭 M1과 M2이다. 두 팀의 타이틀곡 하나를 쓰기 위해 SM은 지난 8월 덴마크노르웨이에서 뮤직캠프라는 행사를 개최했다. 전 세계 작곡가 50여명이 모여서 3~6일간 SM엔터테인먼트를 위한 곡을 쓰는 행사이다. SM측이 M1과 M2를 보여주고, 원하는 콘셉트를 이야기하고, 리듬을 들려주면 작곡가들이 자유롭게 곡을 창작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행사를 두 차례나 했는데도 아직 M1과 M2의 타이틀곡을 못 골랐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경비를 다 날린 셈이죠. 하지만 우리는 늘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SM엔터테인먼트의 힘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트레이닝, 둘째 시스템적으로 움직이는 것, 셋째 곡을 중요시하는 겁니다. 새 팀 하나 론칭하는데 보통 4년이 걸립니다. 동방신기 곡 하나 쓰는데 50명이 모여서 썼고, 맨 처음 데뷔하는 데 40억원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음반을 내는 프로모션비가 또 40억원씩 들어갑니다.”

그는 보아가 일본 진출에 성공한 이후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통할 수 있는 최고의 팀을 구상했다. 그러나 자원의 한계 때문에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그래서 여러 팀에서 최고를 한 사람씩 뽑아서 메이저리그라고 할 수 있는 단 한 팀을 구성했고, 그것이 동방신기였다. “여기에 선발되지 않은 팀은 모두 와해될 판이었습니다. 하지만 계약을 했기 때문에 책임져야 했지요. 그래서 그런 팀 중에서 음악도 잘하고 버라이어티쇼도 할 수 있는 팀으로 키운 게 슈퍼쥬니어였어요.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피눈물나는 노력을 기울였고, 저희도 미안해서 도와주게 됐지요.”

그 슈퍼쥬니어가 생각지도 못한 대박을 터뜨렸다. 지금 슈퍼주니어는 유럽, 태국, 남미에서 최정상의 가수이다.

◇동양의 할리우드를 한국이 만든다

―미국 LA에 이어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SM타운 콘서트를 개최할 예정인데, 이제 미국 시장에 본격 진출하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미국에 진출한다기보다 SM타운이란 가상 국가의 동포들이 거기에도 있으니 위문공연차 가는 겁니다. 앞으로 중국과 아시아 시장이 미국보다 더 커질 겁니다. 그러니 굳이 미국에 갈 필요가 없는 것이죠. 머지않아 동양에 할리우드가 생기면서 문화의 중심이 갑자기 이리로 대이동을 하게 될 겁니다. 미국에서는 동양 노래를 잘 모른다고요? 전혀 상관없어요. 중심은 아시아가 될 거니까요.”

그는 “아시아에 제2의 할리우드가 생긴다면 한국이 일본과 중국을 업고 가는 전략을 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예를 들어 프로듀싱은 우리가 하고, 마케팅은 일본이 하고, 가수나 탤런트, 감독은 중국 사람이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렇게 해서 그 큰 시장의 3분의 1만 우리가 가져와도 우리 국민이 4500만명밖에 되지 않으니 1인당으로 따지면 우리가 가장 수혜를 보지 않을까요?”

그는 늘 꿈을 꾼다. 그가 새로 꾸는 꿈은 ‘빌리 엘리어트’와 같은 뮤지컬을 만들어 전 세계에서 저마다 다른 팀을 선발해 공연하는 것이다. 엄마와 자식이 클래식과 팝을 두고 갈등을 벌이다가 화합해서 더 좋은 음악을 만드는 내용이란다. 그동안 나온 SM엔터테인먼트의 곡과 새로운 곡들을 섞을 것이라고 했다.

이 기사를 쓰던 중에 마이클 잭슨의 프로듀서이던 테디 라일리가 소녀시대의 새 앨범 타이틀곡을 썼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수만 회장은 “SM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작곡가를 배출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출처]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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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1. 10. 15. 11:24

[위클리비즈 창간 5주년, 역대 에디터의 인터뷰] 혼돈의 시대…길을 묻다 _ 박서원 빅앤트인터내셔널 대표
자퇴 두 번, 轉科 여섯 번… 꼴찌였던 재벌 아들, 입문 3년 만에 세계적 광고쟁이로

지난 5일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가 1955년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았을까? 잡스의 창의성이 유지돼 혁신기업을 통해 인류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었을까?

2000년대 한국이라면 얘기가 다를 수 있다는 견해에 희망을 갖는다. 경제성장, 정보기술의 발달, 세계화 덕에 한국에서도 창의적 인재들이 새 비전을 들고 기존 산업에 바람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광고·디자인업체 ㈜빅앤트 인터내셔널 박서원 대표(33)가 선두에 있다. 그는 광고 일을 시작한 지 3년 만인 2009년 반전(反戰) 포스터 한 장으로 클리오(Clio)·뉴욕 원쇼(One Show)·칸 등 세계 5대 광고제에서 몇 안 되는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 5년간 세계 유명 광고제 수상작만 40여 개. 반짝이는 창의성의 원천은 무엇일까. 의외였다. 답은 '즐거움'.

"학교를 두 번 자퇴했고, 전공을 여섯 번 바꿨어요. 적성을 찾기 전까지는 원 없이 놀았죠. 그러다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그 후로는 누구보다 노력했어요. 창의성의 기본은 즐거움 아닐까요."

창의성의 밑바탕엔 땀과 고뇌, 현실을 완벽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숨겨져 있다. 창업 당시 내건 슬로건은 '360˚Creative(창의성)'. 광고 의뢰가 들어오면 제품포장 디자인·프로모션·네이밍을 처음부터 끝까지 챙긴다. 제품 개발 후 광고 전략을 짜는 기존 관행을 엎고 개발 단계부터 참여한다. 매일유업·두산·한국GM·삼성카드…. 직원 13명의 작지만 큰 광고회사 빅앤트의 고객 명단이다.

12일 서울 신사동 빅앤트 사무실에서 박서원 대표가 회사의 상징인 개미 모형을 들고 있다. 그는 세계주요광고제에서 수상할 때마다 팔에다 개미 문신을 새긴다고 했다. 왜 개미 일까.“ 개미는 노력을 상징해요.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노력이에요. 스스로에 대한 노력, 고객들과 좋은 작품을 위한 노력, 동료들을 위한 노력.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박서원 대표에게는 두 개의 삶과 인생기간이 존재한다. '2005년 이전의 박서원'이 하나고, '2005년 이후의 박서원'이 두 번째다. 후자가 진짜 박서원 인생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2005년은 뉴욕의 비주얼아트스쿨(School of Visual Art)에 입학한 해로 그림 한장 제대로 안 그려 본 그가 '미술과 디자인의 세계'에 풍덩 빠진 시기다. 2006년 미국·프랑스·중국 출신의 학과 동기들을 모아 빅앤트를 세웠다. 그 후 세계 광고제의 주요 상들을 휩쓸었다.

1998. 03 단국대 입학

1999. 05 학사 경고 3회 누적/자퇴

1999. 09 미시간대 입학

2000. 04 학사 경고 2회 누적

2000~2002 경영학→사회학→기계공학→심리학→산업디자인학과로 전과

두 번의 대학 자퇴와 여섯 번의 전과(轉科). 방황은 '2011년 박서원'의 밑거름이었다.

광고는 유혹이다

전봇대 위에 총을 든 병사의 사진을 붙여 총구가 다시 병사의 뒤통수로 향하게 한 반전(反戰) 포스터(2009), 건물 한 면을 거대한 책장 사진으로 덮은 광고(2010), 물을 가득 채운 투명 재떨이를 사용한 금연 캠페인(2011)…. 박 대표가 세계광고제에서 이름을 떨친 작품 목록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광고는 뭔가요.

"광고는 유혹(誘惑)이에요. 갖고 싶고, 먹고 싶고, 같이 느끼고, 실천할 수 있게끔 누구를 유혹하는 거죠. '광고를 아주 창의적인 업(業)'이라고들 하는데 절반은 맞죠. 하지만 저는 단도직입적으로 '광고는 마케팅'이라고 해요. 철자를 풀면 마켓에 'ing'를 붙인 거죠. '유혹을 잘해서 시장에서 잘 팔리게 만드는 것.' 이게 광고입니다."

―정말 의미 있는 성공작을 꼽는다면. 뭐가 있나요.

"'바리스타'라는 고급 컵커피 작업이 기억나죠. 매출이 다섯 배나 올랐으니까."

― 크리에이티브(창의성과 아이디어)의 결과였나요.

"광고 대박 났다면 모든 사람이 박수치는 그런 깜짝스러운 아이디어, 누가 봐도 손뼉을 '딱'하고 치는, 기막힌 아이디어의 결과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죠. 절대 아닙니다. 다른 업에서는 모르겠지만, 광고·디자인업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마케팅에서 크리에이티브의 결과가 성공 요인이 아니다?

"나의 제품이 소비자에게 과연 다가갈 수 있는지 고민했죠. '바리스타'의 경우 사실 우리가 한 건 거의 없어요. 하얀색, 붉은색, 진한 갈색의 기존 포장재는 식감(食感)을 잡아주지 못했죠. '커피가 가장 맛있어 보일 때는 가장 커피다울 때'라고 생각했는데 제품포장이나 디자인은 그렇지 못했어요. 포장지도, 성분표시와 제품설명서도 모두 산만하고, 어지럽기만 했죠. 전 그냥 단순하게 접근했어요. 한글로 '바리스타'라고만 쓰고, 포장재 색을 바꿨죠. 제품특성도 보기 쉽게, 간단히 설명해 줬고요. 이게 끝이었어요. 결과는 매출 다섯 배 상승이었죠. 소비자층이 뭘 원하는가를 바탕으로, 정확한 전략적 이미지를 넣어주는 게 핵심이에요."

치밀하게 놀아라, 창의성이 솟는다

―노는 게 그렇게 즐거웠습니까.

"놀았다는 표현은 억울하고. 실제는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제 아이디어의 원천 100%가 여행이죠. 버스 타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기, 차 타고 경기도 국도 순회하기, 강원도 산길 돌아다니기, 경부고속도로 타고 부산 찍고 오면서 휴게소 다 찍고 오기 등등. 그런 여행을 다녀보라는 거죠. 당시 아침에 친구 만나면 '그냥 길 따라 가보자'면서 떠났어요. 가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방 하나 잡아서 잤고요."

―남들 눈엔 쓸데없어 보이는 여행을 참 많이도 했군요.

"제겐 공부였어요. 경기도를 돌아다니면서 '경기도 골목은 서울과 왜 다를까' 궁금해했고, 전혀 정보가 없는 낯선 동네, 낯선 식당에 가선 '내가 왜 여길 들어왔을까, 간판 때문에? 밥집 이름이 재미있어서?' 스스로에게 물었죠. 여행가면 사진을 많이 찍어요. 나중에 그 사진을 보면서 '그 식당의 그 식단(食單)이름이 입맛을 돌게 했구나, 간판 색(色)이 나를 자극했구나' 생각해요."

―부모님 속 많이 썩였죠.(부친은 두산그룹 박용만 회장이다)

"많이 죄송했죠. 그런데 노는 게 너무 좋으니 어떻게 해요. 학교 공부는 즐겁지 않고."

―노는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모두 그렇게 대답합니다.

"반에서 50등 한 성적표를 들고 가면서도 '죄송해요, 언젠가는 정말 잘하는 아들이 돼 있을 겁니다' 마음으로 속삭였어요. 부모님은 그런 저를 믿어주셨고."

―디자인 공부가 적성에 맞는다는 건 어떻게 알게 됐나요.

"미시간대에 있을 때 일본인 친구랑 농구를 하기로 했는데 이 친구가 안 나왔어요. 집으로 찾아갔더니 종이로 우주선을 만들면서 놀고 있는 거예요. 그 친구한테 그 작업이 한 학기 동안 해야 할 프로젝트였던 거예요. 그 순간 '저렇게 놀면서 할 수 있는 공부가 있구나' 싶었어요. 내가 훨씬 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죠. 다음 날로 전공을 바꿨어요."

―디자인 공부는 재밌던가요.

"재미있었죠. 그전까지 경영학 수업에 들어가면 두꺼운 원서를 봐야 했어요. 하나도 모르겠고, 관심조차 가질 수 없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낑낑대고 있는 모습을 보자 '나라면 이렇게 저렇게 만들었을 텐데' 하는 아이디어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솟구쳤어요. 한 번도 미술을 배워본 적이 없지만 '이게 내 일인가 보다' 싶었죠."



빅앤트가 만든 반전(反戰) 포스터‘뿌린 대로 거두리라’. 2009년 클리오ㆍ뉴욕 원쇼ㆍ칸 등 세계 주요 광고제를 휩쓴 작품이다.
과정을 혁신하라

―광고도 여러 파트가 있습니다. 빅앤트는 광고와 디자인을 같이 하네요. 기존 광고업체들은 디자인, 네이밍, 프로모션 등을 쪼개 외주를 주지 않나요.

"저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합니다. 기업들이 저희랑 일하면 제일 편하게 생각하는 게 바로 그거예요."

―직원 13명인 작은 회사가 모든 걸 총괄하면 부담스러울 텐데.

"소비자들은 너무 똑똑해요. 니즈(needs)도 아주 구체화돼 있고. TV광고 하나 때리면 매출이 막 오르고 그러지 않아요. 예전에는 코카콜라 광고하면 TV에서 상쾌한 이미지 보여주고 '코카콜라~' CM송 내보내면 사람들이 수퍼로 몰려갑니다. 지금은 달라요."

―소비자를 그럴 듯하게 속이는 게 광고 아닌가요. 소비자가 아무리 똑똑한 들 박 대표 실력만 하겠어요.

"거꾸로죠. 소비자들이 저보다 한 수 위예요. 그들은 수퍼나 마트 갔을 때 상품이 매대(賣臺)에 어디, 어떻게 놓였는지, 병 디자인은 어떤지, 옆에 있는 펩시콜라와 비교했을 때 어떤 느낌인지 모든 걸 순간적으로 고려하죠. 광고 하나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비자의 구매 패턴이 그렇게까지 변했다는 사실을 아는 기업인들이 많나요?

"기업 대표들은 '관행'에 안주하죠. 큰 기업들일수록 더하고. 우리는 긴 시간의 조사·분석 후에 리스크를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결론 내지만, 그들은 '너무 파격적이다' '기존에 해오던 게 아니다'란 이유로 거부합니다."

―기업가들이 겁을 내는 것 아닌가요. 흔히 '편하게 가자' 이렇게 생각하기 쉽죠.

"맞아요. 해오던 만큼도 못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고민하는 거죠. 그래서 편한 길로 가자고 스스로 합리화하기도 할 것이고."

―광고를 제작하기 전에 시장분석을 할 텐데. 결과를 확신합니까. 그렇게 과학적인가요. 믿고 맡길 정도로.

"믿어야죠. 저도 밑도 끝도 없이 '이거 하세요' 하지 않아요. 그러면 제가 나쁘죠."

―도전적인 기업인들이 많습니까? '편하게 가자' 하는 기업인들이 많습니까.

"참 이상해요. 회사 시작한 지 5년 됐는데 많이 달라졌어요. 처음 시작할 때, (분석결과를 따라 내 뜻대로) 하자는 분은 10명 중 2명뿐이었어요. 8명은 '안돼!'했죠. 요즘엔 비율이 5 대 5, 6 대 4로 몇 년 사이 확 늘어났어요. 광고주가 선(先)제안하는 경우도 많아요. 오히려 제가 '이건 너무 앞서갔습니다' 말리죠."

―왜 도전적인 광고 콘셉트에 동의하는 비율이 많아졌을까요.

"힘들기 때문이죠. 또 살아남기 위해서죠. 경쟁은 치열해지고, 종전 방법으로는 안될 것이 뻔하고. 생존을 위한 특단의 조치를 갈망하는 거죠. 정보공유 기회도 많아졌고."

―제품의 마케팅 성공에서 광고는 어느 정도로 중요합니까.

"광고 때문에 제품이 잘 팔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봅니다. 제가 광고를 만들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그래요. 제품이 훌륭해야 최고로 잘 팔립니다. 광고 때문에 (소비자들이) 제품을 사면 길게 못 갑니다. 그건 저희에게도 부담스럽고요."

―광고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얘기인가요.

"제품 자체에 광고성이 있고, 주목도가 있어야 성공한다는 뜻입니다. 가장 좋은 제품의 성공법은 '제품 개발 시작 단계부터, 처음 콘셉트 잡는 회의부터 광고가 개입돼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꼭 제품개발 단계에 우리를 넣어달라'고 부탁해요. 개발단계에서 참여해, 어떤 게 이야깃거리가 되겠다 싶으면 계속 인풋(input)을 드리는 겁니다. 없는 걸 억지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요."

―우리 기업들은 왜 그렇게 안 하죠? 애플은 디자인팀을 제품개발 단계에서부터 투입하는데.

"애플 혁신은 바로 프로세스의 혁신입니다. 우리 기업들에도 그런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얼마 전에 기아에서 새로 자동차 만드는데 다양한 분야 사람들을 참여시킨다면서 '와 달라' 제의가 들어왔어요.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서 솔루션을 만들어낸 후에 디자이너가 들어와서 그 솔루션을 바탕으로 차를 디자인하는 겁니다."

―가장 멍청하고 답답한 CEO는 어떤 사람이던가요.

"우유부단한 사람이죠. 끝까지 결정 못 내리는 CEO. 남 얘기 듣지 않는 독단적인 CEO. 이런 분들 보면 '내가 왜 해야 하는지' 맥이 다 빠져요. 광고는 유혹인데, 유혹마저 못한다면 회사의 성공은 장담 못하죠."

1955년생 스티브 잡스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잡스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뭐가 됐을까.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잡스의 생각이 제품으로 나와 우리 삶을 바꿨죠. 정말 대단합니다. 제가 배운 게 이런 거예요. 맞다고, 즐겁다고 생각한 걸 실천으로 옮긴 것. 즐거운 걸 끝까지 했던 것. 거기에 모든 게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즐거운 일을 했고, 그렇게 한 일이 결국은 성과로 나온 거죠."

―잡스가 롤모델인가요.

"저는 직접 만나보지 않은 사람을 롤모델로 삼지 않아요. 제 롤모델은 제가 다녔던 '비주얼아트스쿨' 리처드 와일드 학장님이에요. 미국에서 디자인 크리에이티브 교육학자로는 1등이신 분이죠. 제게 가르쳐준 게 '생각이 지배해야 한다'(Let the idea dictate)는 말씀이에요. 표현방법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아이디어가, 생각이, 본질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예를 든 게 '여자랑 단지 섹스하고 싶어서 자서는 안 된다. 사랑을 느낀 후에야 잠을 자라. 그렇게 해야 관계가 유지된다'였어요."

―프로로서 목표는.

"광고란 게 다른 사람 일을 대신 해주는 서비스업이잖아요. 그 과정에서 '내가 직접 해도 잘 할 수 있을까. 내가 직접 이 제품을 만들어 팔아도 똑같이 잘 될까' 늘 궁금해요. 제 브랜드를 만들어 운영하면서 제품을 만들고 싶어요."

―33세의 젊은 사장입니다. 요즘 20~30대 젊은 직원들에게 중요한 건 뭔가요.

"기업체 사장님들에게 당부드린다면, 기업은 직원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게 첫째 의무라고 봐요. 얼마나 진심으로 직원들을 대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죠. 직원들을 '일하게 하느냐, 일 안 하게 만드느냐' 가르는 건 딱 하나예요. '자기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만드느냐, 아니면 남을 따라 하는 기계로 만드느냐' 이런 것이죠. 어느 쪽이냐에 따라 일하는 즐거움 차이는 엄청납니다. 스스로 참여해 성과를 이루고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았을 때, 그 기쁨은 정말 큽니다. 며칠 밤을 새워도 주말에 들어가 쉬라고 해도 우리 직원들은 회사에 나와 일하고 있어요. '직원들이 얼마나 성장할 수 있나' 그 기반과 환경을 갖춰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13명의 소수정예 조직이면 인재가 가장 큰 자산일 듯합니다. 어떤 사람을 직원으로 뽑습니까.

"전 사람 뽑을 때 느낌으로 뽑습니다. 학벌, 이력, 스펙은 중요하지 않아요. 제일 중요한 것은 인성입니다. 열정은 누구나 다 있는 것이고 그 열정을 이어가는 근성이 있느냐가 더 중요한데 근성은 올바른 인성을 갖춰야 생기는 것이죠. 어려운 상황,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요행을 바라거나 피하지 않고 부딪쳐 이겨낼 줄 알아야 합니다." 

[출처] 조선일보
Posted by 프로처럼
공부/革新2011. 10. 4. 10:39

[8] 전자피부 개발한 서울대 김대형 교수… MIT선정 '세상을 바꿀 과학자'
휘어지고 늘어나는 센서로 심장·뇌 표면에도 부착가능
인체신호 실시간으로 측정, 난치병 치료에 탁월한 효과
목표는 사람에 도움되는 연구… 과학자 아닌 테레사 수녀 존경

최근 미국 MIT의 '테크놀로지 리뷰'지가 선정한 '세상을 바꿀 젊은 과학자 35명(TR35)'에 김대형(34)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가 들어갔다. 한국인으로는 2008년 하버드대 함돈희 교수에 이어 두 번째다. 테크놀로지 리뷰는 매년 35세 이하 전 세계 과학자 중 세계적인 연구성과를 낸 35명을 선정해 발표하고 있다. 리눅스를 개발한 리누스 토르발즈, 야후의 창업자 제리 양,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주커버그 등이 TR35 출신.

김 교수는 인체 전기신호를 기존 센서보다 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이른바 '전자피부'를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전자피부는 말 그대로 판박이처럼 피부에 완벽하게 달라붙어 각종 신체신호를 감지하고 외부로 전송하는 전자회로다. 김 교수는 지난 8월 '사이언스'지에 이 연구결과를 발표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김대형 서울대 교수가 컴퓨터 화면을 통해 손등에 붙인 전자피부를 보여주고 있다. 김 교수가 만든 전자피부는 반도체 칩을 만드는 실리콘으로 만들었지만, 잘 휘어지고 늘어나 굴곡이 많은 피부나 뇌, 심장 표면에 빈틈없이 달라붙는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생체신호 감지센서에 중앙처리장치와 메모리, 외부에서 라디오파를 받아 충전하는 회로, 태양전지까지 다 들어 있어요. 말하자면 반도체 칩들이 가득 들어 있는 의료장비가 얇은 피부 모양으로 압축된 셈이죠."

김 교수가 보여준 손등에 붙인 전자피부는 펜으로 얇은 금줄을 칠한 모양이었다.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도 자기 피부인 양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김 교수는 "좀 더 발전하면 몸이 불편한 사람이 자신을 도와줄 로봇 팔을 움직이겠다고 생각하면 손등의 전자피부가 그때 발생하는 뇌 신호를 감지해 그대로 로봇 팔을 작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피부에 전자회로를 붙이려면 잘 휘어지는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 보통 플라스틱과 같이 탄소로 이뤄진 유기물질에 금속으로 회로를 만든다. 하지만 김 교수는 아예 반도체 칩을 만드는 무기물질인 실리콘을 택했다. 유기물질은 잘 휘어지지만 실리콘보다 전자회로 효율이 떨어지고 자외선이나 수분, 열에 약하기 때문이다.

김 교수가 2006년 미 일리노이대로 유학 갈 당시 과학자들은 실리콘을 얇게 깎아내면 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휘어지기만 해서는 의미가 없었다. 원통에 말면 모를까 옷이나 피부처럼 굴곡이 많은 곳에 붙이면 중간 중간 뜨는 부분이 발생했다.

"골과 마루에 빈틈없이 달라붙으려면 휘어지는 동시에 잘 늘어나야 합니다. 얇게 만든 실리콘 회로 표면에 주름을 잡아 마치 고무처럼 잘 늘어나는 전자회로를 만들었습니다."

김 교수는 이렇게 만든 전자회로를 의학용 센서에 먼저 적용했다. 심장 조직 일부가 모양이 틀어지면 심장박동이 정상보다 빠르거나 느려지는 부정맥에 걸린다. 치료법은 해당 부분을 센서로 찾은 다음 고주파로 태워 제거하는 것. 동물실험에서 김 교수가 만든 센서는 심장 표면에 완전히 달라붙어 손상 부위를 정확하게 찾아냈다.

주름이 많은 뇌에도 김 교수의 휘어지고 늘어나는 센서가 적격이다. 김 교수는 간질을 일으키는 이상신호가 나오는 부분을 찾는데 이 센서를 적용했다. 역시 동물실험으로 효능을 입증했다.

전자피부는 이런 센서가 피부 어디에나 달라붙어 인체 신호를 실시간으로 측정할 수 있게 만든 것. 성대가 손상되면 소리는 나지 않지만 말을 할 때 움직이는 목 근육은 살아 있다. 전자피부를 목에 붙이면 근육 움직임으로만 어떤 말을 하려는지 알아낼 수 있다. 이미 이 방식으로 게임기를 작동하는 데 성공했다. 최근에는 팔이나 손등에 붙인 전자피부로 뇌신호를 포착해 생각만으로 기계나 컴퓨터를 작동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김 교수는 한성과학고와 서울대를 나와 남들이 5년 걸리는 박사학위를 3년 만에 마쳤다. 8년 동안 사이언스, 네이처 등 세계적인 학술지에 32편의 논문을 썼고 22건의 특허를 획득했다. 누가 봐도 천재 과학자인 그가 늘 본받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인슈타인도 빌 게이츠도 아닌 테레사 수녀다.

"좋은 논문을 쓰겠다고 하면 좋은 연구를 할 수 없어요. 항상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연구를 하겠다고 하면 자연히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고 결국 좋은 논문이 됩니다."

그는 의료용 센서 연구를 하면서 환자와 그 가족의 고통에 눈을 떴다고 한다. 전자피부는 어떻게 하면 환자의 고통을 줄이고 치료효과를 높일 수 있을까 고민한 결과.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저개발국가 사람들에게도 눈을 돌렸다. 그들을 위해 울퉁불퉁한 건물 표면에 완벽하게 달라붙는 저렴한 실리콘 태양전지를 개발해 곧 발표할 예정이다.

그는 유학을 가기 전 반도체 장비를 만드는 중소기업에서 4년 반 동안 병역특례연구원으로 일했다. 그때 대기업의 2·3차 하도급업체 기술자들이 직장을 잃고 한가족이 다 거리로 나앉는 모습을 자주 봤다고 한다. "중소기업에서 내몰린 사람들이 다시 일할 수 있으려면 새 기업이 나와야 합니다. 학생들이 기업에 가서 신기술을 개발해 새 일자리를 만들어야죠."

[출처] 조선일보
Posted by 프로처럼
공부/革新2011. 9. 30. 14:18

[다섯 손가락 잃은 환자에게 발가락 세 개 이식… 국내 처음 성공한 우상현 원장]
18년전 첫 이식수술 실패로 환자의 발가락만 잃었다
환자는 오히려 용기를 줬다 "더 노력해서 희망을 달라"
30분에 150만원 버는 쌍꺼풀 수술 마다하고
8시간 수술로 90만원 받는 손가락 재건에 몰두했다
"이식 실패 환자 발가락 잃고 퇴원하던 날 미안해서 울고, 내가 한심해서 또 울고…"
"팔 이식수술 도전할 것"

사고로 오른손 손가락 다섯 개를 모두 잃은 환자 우모(38)씨는 발가락 세 개로 탁구공을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빨래집게도 쥐었다 폈다 잘했다. 이 발가락 세 개는 현재 환자의 오른손에 붙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손가락 다섯 개가 다 없는 환자에게 환자의 발가락 세 개를 떼어내 이식하는 데 성공한 결과다.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사례다. 이로써 환자는 손가락 기능을 0%에서 약 80% 되찾았다. 손가락 세 개가 있으면 물건을 쥐고, 비트는 등 웬만한 손 기능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자 발가락 세 개를 떼어내 손에 이식하는 수술에 성공한 대구 W병원 우상현 원장. /남강호 기자 kangho@chosun.com

집도의인 대구 더블유(W)병원 우상현(51·성형외과 전문의) 원장은 29일 "수술 후 21일이 지난 지금 환자의 '발가락 손'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며 "현재 물리치료를 받으며 '손가락' 감각 회복 훈련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발가락을 손에 붙이면 신경이 천천히 돌아오는데, 이식된 발가락이 부드럽고 딱딱한 촉감, 차갑고 뜨거운 온감(溫感), 찌르면 아픈 통각(痛覺)을 모두 느끼기 시작했다고 우 원장은 전했다.

환자는 지난해 12월 경북 안동 인근의 맨홀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다 무게 2톤가량의 콘크리트 하수관이 손위로 떨어지면서 오른손 손가락 다섯 개 모두 절단됐다. 사고 당시 손가락뼈와 피부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손상이 커서 재접합은 불가능했다. 일단 절단 부위만 봉합했다.

넉 달 뒤 우 원장은 환자에게 손가락을 만들어 주기 위해 먼저 왼발 엄지발가락을 떼어 오른손 엄지 자리에 붙였다. 그리고 지난 8일 오른발 두 번째와 세 번째 발가락을 떼어내 검지와 중지 자리에 옮기는 수술을 18시간에 걸쳐 시행해 이식에 성공한 것이다. 현재 환자는 정상적인 회복 과정을 보이며 재활치료 중이다.

 환자가 자기 발가락 세 개를 이식한 손으로 탁구공을 들고 있다. /남강호 기자

18년 전 우 원장은 발가락 이식 수술을 처음으로 시도했다가 처절하게 실패했다. 발가락을 손가락에 옮기는 수술은 환자나 의사에게 극도의 스트레스다. 이식이 실패할 경우 환자는 애꿎은 발가락만 추가로 날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영남대병원 성형외과 교수이던 우 원장은 잘나가는 미용 성형 의사의 길을 마다하고 손가락 재건 수술에 뛰어들었다. 처음으로 엄지 절단 환자에게 엄지발가락 이식술을 시도했지만 14시간에 걸친 수술과 3차례의 재수술 결과는 참혹했다. 엄지로 옮긴 엄지발가락이 까맣게 죽어버린 것. 우 원장은 "환자의 병실에 들어설 때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기분이었다"고 했다.

환자가 퇴원하던 날, "내 발가락을 돌려 달라"며 멱살잡이라도 할 법한데, 그 환자는 눈물이 글썽이며 "교수님, 그동안 저 때문에 마음고생 많이 하셨지요. 제 생각하시면서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연구해서 앞으로 저 같은 환자에게 꼭 희망을 선물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우 교수는 엄지가 없는 환자의 손을 쥐고 "미안해서 울고, 고마워서 울고, 명색이 의대 교수라는 자신이 한심해서 울었다"고 했다. 그때 우 원장은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환자에게 약속했다.

이후 우 원장은 손 수술 연마에 '의사 인생'을 걸었다. 의사 4명이 달려들어 8시간 걸리는 발가락→손가락 이식 수술의 의료수가(酬價)는 90만원. 의사 한 명에 30분 걸리는 쌍꺼풀 수술비는 150만원이다. 그는 쉽게 돈 벌 수 있는 쌍꺼풀 수술에 대한 유혹을 느낄까 봐 여자 눈을 일부러 안 쳐다봤다고 했다. 1990년대 후반 미국 최고의 손가락 수술전문 병원 클라이넛 병원 연수를 통해 그의 수술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닥터 우'에게 자기 환자 손 수술을 맡기려는 미국 원로 의사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 나중에는 병원장까지 나서 미국 외과 의사면허를 내줄 테니 미국에 남으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실패한 첫 환자와의 약속을 생각해 귀국을 결심했다.

이제 그가 한 약속은 지켜지고 있다. 우 원장은 지금까지 손가락 절단 환자에게 발가락을 400여개를 옮긴 국내 최다 발·손 이식 전문가가 됐다. 성공률은 95%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손가락 이식 분야 국제학회 요청으로 의학 교과서도 집필했다. 독일·터키·일본 등 외국 의사들이 그에게 수술을 배우러 온다. 대구·경북 지역 손가락 기형이나 부상 환자가 서울의 유명 대학병원에 오면, 서울 교수들이 "거기에 '우상현'이 있는데 뭐 하러 서울에 왔느냐"며 환자들을 되돌려 보내곤 한다. 지금은 서울 환자들이 KTX를 타고 내려와 그에게 진료를 받는 일도 잦다.

우 원장의 더블유(W)병원은 성형외과 의사 2명과 정형외과 의사 8명이 근무하며 365일 24시간 손가락 절단 접합 응급 수술 체계를 갖추고 있다. 광주광역시와 강원도에서 사고당한 환자들이 밤새 앰뷸런스를 타고 오는 탓에 한 해 손 수술 건수가 8000여건이다. 그 중 우 원장이 3000여건을 맡는다.

이제 그의 목표는 팔 이식이다. 기증된 시신(屍身)의 팔을 통째로 떼어 팔이 없는 환자에게 이식하는 수술로, 미국과 독일 등 몇 나라에서만 성공했다. 우 원장은 "현재 팔 이식을 원하는 100여 명의 환자가 대기 등록을 마쳤다"며 "팔이 잘 보존된 시신 기증만 나타나면 당장에라도 이식을 시도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키워드] 발가락을 이식한 손 사진들성형외과우상현 원장쌍커풀 수술
[H story] 5대 장기 이식술 어디까지 왔나 
 오른손 손가락을 모두 잃은 환자에게 환자 발가락 세 개를 떼어내 이식하는 수술에 성공한 대구 W병원 우상현 원장이 환자의 손가락 석고 모형을 들어 보이고 있다. /남강호 기자 kangho@chosun.com

[출처] 조선일보
Posted by 프로처럼
공부/革新2011. 9. 30. 14:15

'꿈의 여객기' 그 비밀은… 동체 절반이 탄소복합재
더 가볍게 - 강철 무게의 4분의 1, 연료 효율 20% 좋아지고 이산화탄소 발생 20% 줄어
더 쾌적하게 - 창문 B767보다 65% 커져… 탄소복합재, 습기에 강해 30~40% 습도 유지 가능
더 효율적으로 - 큰 조각 결합해 만들어 조립용 구멍 1만개에 불과, 보잉 747은 100만개

보잉사가 '꿈의 여객기(드림 라이너)'라 이름을 붙인 보잉 787(B787)이 첫선을 보였다. B787 1호 비행기는 보잉 본사가 있는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인근 에버렛시(市)를 출발해 28일 오전 일본 하네다공항에 도착했다.

탄소복합재 50%…창문 65% 커져

유럽에 에어버스 A380이 있다면 미국에는 보잉사 B787이 있다. 400~500인승 규모 초대형 여객기인 A380과 200~300인승 중형 여객기인 B787은 체급은 다르지만 첨단 과학기술의 집합체인 차세대 여객기라는 공통점 때문에 늘 비교 대상이 돼 왔다. 세계 최대 여객기 A380이 '큰 비행기'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면 B787은 항공 과학에 역량을 쏟아부었다.

보잉사가 B787을 개발하며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항공기 동체의 소재. 무게는 강철의 4분의 1에 불과하지만 강도(强度)는 10배나 강한 첨단 소재인 탄소복합재 비중을 50%(전체 중량 기준)로 늘렸다. 탄소복합재는 탄소섬유와 에폭시 수지를 결합한 것. 탄소섬유는 말 그대로 90% 이상이 탄소인 섬유다. 섬유 원료에 열을 가하면 산소·수소·질소 등의 분자가 빠져나가 탄소만 남는다. 나무를 태우면 탄소 덩어리인 숯만 남는 데서 알 수 있듯 탄소가 열에 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탄소섬유는 탄성과 강도가 급상승한다.

이런 탄소복합재 비중이 기체의 50%를 차지하는 것은 항공기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까지는 탄소섬유 가공·적용 기술 부족으로 제한적으로만 사용돼 왔다. 직전 기종인 B777은 복합재 비중이 12% 정도다.

소재의 혁신은 당장 외형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B787의 객실 창문은 높이 47㎝, 너비 28㎝. 현재 운항되고 있는 항공기 창문 중 가장 크다. 비슷한 크기인 B767의 창문보다 65% 커진 것이다. 그동안 항공사들이 창을 크게 내지 못한 것은 동체를 잘라내 만드는 창의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나머지 동체에 가해지는 하중이 커지기 때문. 알루미늄 등을 사용한 기존 동체는 창을 더 크게 만들기에는 하중에 견디는 힘이 약했다. 보잉 측은 "탄소복합 소재의 탄성과 강도가 금속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B787은 더 큰 창으로 인한 하중을 견뎌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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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유재일 기자 jae0903@chosun.com
◆눈에 보이지 않는 소재의 과학

탄소복합재로 만들어진 B787 동체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커다란 덩어리로 돼 있다는 것. 기존 항공기 동체는 더 작은 알루미늄 조각을 이어붙인 것이다. 이 때문에 B787은 비행기 조립 중 동체에 뚫은 구멍 개수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B747은 약 100만개의 구멍을 뚫어서 조립하는데, B787은 1만개 정도에 불과하다.

소재의 과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도 가져 왔다. B787은 기존의 무거운 알루미늄 대신 가벼운 소재를 사용해 비슷한 크기의 항공기보다 연료 효율성이 20% 이상 높다. 이산화탄소 발생량도 20% 줄였다. 보잉은 "탄소복합재는 금속 동체에 비해 부식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며 "정비 횟수를 줄여 정비 부문에서만 30%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부식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습도도 높일 수 있다. 기존 여객기는 장시간 타면 콧속이 마를 정도로 건조하다. 습도를 5~15%로 유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B787은 쾌적하게 느낄 수준인 30~40% 습도를 유지할 수 있다.

B787 가격은 2억달러선(약 2340억원). 보잉사는 56개 항공사로부터 850여대의 수주를 받아놓은 상태다.

한편 한국에서도 다음 달 18~23일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리는 '2011 서울 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에서 B787을 볼 수 있다.

[출처]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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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1. 9. 16. 12:35

사람이 곧 혁신이다 (17)

1980년대 초·중반은 삼성전자 마케팅실에서 일했던 시절이다. 경쟁사와의 피 말리는 싸움, 어려워진 경제 여건 등으로 판매 부문에서 너나 할 것 없이 고생하던 때였다. 대리점이 도산해 나가고, 밀어내기 판매가 이뤄지면서 담당자들의 스트레스도 절정에 달했다.

마케팅실로 발령 받은 후 제일 먼저 결심한 것이 ‘전국의 대리점망(영업망)을 살리자’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회사와 대리점 간의 무너진 신뢰 관계를 다시 쌓는 게 시작이었다.

대리점이 믿고 따라올 수 있는 정책적 일관성 그리고 정도 경영이 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점주 교육이었다. 좋은 입지에 자리 잡은 경쟁사의 점주들보다 뛰어난 역량을 가지도록 하는 게 중요했다.

당시 도시바에서 현역으로 일하던 영업 책임자(간부) 한 분을 소개받았는데, 그에게서 참 많은 걸 배웠다. 그는 거의 대부분 매주 금요일 밤 제일 늦은 비행기로 한국에 들어왔다. 주말에 와서 열심히 가르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식이었다.

‘주말 선생님’인 그에게서 배운 건 바로 ‘정도 경영’이었다. 그의 얘기인즉슨 “일본도 1960년대 초반에 대리점 문제와 관련해 똑같은 현상을 겪었다”는 것이었다. 어느 나라, 어느 시장, 어느 산업이나 똑같은 발전 사이클이 있다는 뜻이다.

일본이 어려웠을 때 새로운 영업 체제, 즉 정도 영업으로 바뀐 결정적 계기는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노스케 회장은 아다미 온천장에 영업 책임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대회의를 열었다.
 
마음을 연 토론과 담판 끝에 그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회장인 고노스케가 영업본부장을 겸임해 앞장섰다. 그 후부터 본사인 마쓰시타와 대리점 간의 관계가 매우 좋아졌다고 한다. 초일류 마쓰시타의 경쟁력 중 하나다. 일본인 선생님은 “도시바가 가전에서 마쓰시타를 절대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라고 귀띔했다.


영업의 정도 일러준 일본 선생님

본사가 각 대리점의 캐시 플로를 항시 눈여겨보고 있다가 돈이 많이 남는 점포가 어떻게든 영업 관련 투자를 확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본사와 대리점 간의 무너진 신뢰 관계를 회복하고 지속적인 점주 교육을 진행했다. 그 결과 1985년에야 처음으로 내수 판매에서 금성사를 앞지를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일본의 사례를 들려주고 여러 가지 자료를 챙겨주며 대리점 운영 노하우를 전수해 줬다.

당시 대리점주들은 경영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이가 태반이었다. 심지어 어떤 곳은 이익이 났는지, 아닌지도 몰랐다.

100만 원짜리 냉장고를 사와 120만 원에 팔면 120만 원 전부가 자기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식이었다. 일본인 선생님은 “경영 전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대리점 사장들로 하여금 영업과 이익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경영관리 능력을 본사가 서포트해 주라는 뜻이다.

더 중요한 관리 비밀은 “대리점을 죽이지도 않고, 살리지도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리점이 너무 잘돼 돈을 많이 벌면 이들이 그 돈을 가지고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하지만 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러다 보면 본업인 대리점까지 망하는 게 부지기수였다.

이런 악순환을 방지하는 노하우도 있었다. 본사가 각 대리점의 캐시 플로를 항시 눈여겨보고 있다가 돈이 많이 남는 점포가 어떻게든 영업 관련 투자를 확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점포 디자인을 바꾸거나 규모를 늘리는 식이다.

대리점에서 벌어들인 돈이 본업인 대리점 말고 다른 곳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이와 반대로 부실한 대리점은 구조 분석, 처방 등을 내려 시행착오를 줄여나갔다. 대리점주와 사원들의 교육 훈련도 쉬지 않았다.

‘진짜 고객을 만나는 법’도 그에게서 배운 소중한 경험이다. “삼성에 있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상위 5%다. 빌딩도 한국의 가장 중심가에 있고, 밥도 좋은 데서 먹고, 어딜 가도 호텔만 간다. 그러니 정작 삼성의 물건을 사는 밑바닥 사람들을 모른다”는 게 그의 얘기였다.

 .그는 한국에 오기 전 항상 미리 연락을 취해 방문하고 싶은 곳을 콕 찍었다. 예를 들어 “이화여대 앞에 가면 ○○ 음식점이 있는데, 거길 가보고 싶다”는 식이었다. 일본에서 출간된 한국 관광 가이드북을 읽고 한국 여대생들의 생활상을 직접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술을 한 잔도 못하는 사람이 여자가 있는 술집에 가자고 요구할 때도 있었다. 술집에 가면 바로 노트를 꺼내 놓고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당신 방에 가전제품이 뭐가 있느냐, 몇 인치 TV이고 가격은 얼마냐, 냉장고는 어디 것이고 몇 리터냐, 집이 어디냐, 고향 집에 있는 TV는 몇 인치고 누가 샀느냐”는 따위의 질문들이다.

호스티스들은 대부분 번 돈을 모아 고향집에 TV를 사서 보낸 경우가 많았다. 재미있는 것은 자기 방엔 14인치 TV를 놓았지만 집에 보낸 건 20인치는 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다 듣고 와서 표를 만들어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들이 자기 부모에게 술집 나간다고 얘기하겠습니까. 가족들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좋은 걸 보내는 겁니다. 이런 아가씨들이 대형 제품의 고객인 걸 알았습니까. 그렇다면 제품도 이들에 맞춰 디자인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진짜 고객을 알아봤던 것이고, 그들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은 물론 그들의 욕구까지 알아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영업이었다.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다

선풍기는 초여름에 많이 팔린다. 하지만 생산은 겨울에 한다. 공장에 쌓아둘 곳이 없으니 대리점에 “가격을 깎아줄 테니 미리 가져가라”고 얘기했다. 대리점도 가격이 싸니 얼른 가져갔다. 회사는 자금 융통과 (보관)공간 문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는 셈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리스크 요인이 생기곤 했다. 5~6월이 돼도 날씨가 예상보다 덥지 않아 팔리지 않는 경우다. 그러면 본사에선 갑자기 30% 할인 행사를 진행한다. 대리점이 20% 깎아줘도 팔지 못했던 물건을 본사에서 10% 더 후려치는 식이다. 이런 본사를 신뢰할 대리점은 없다. 정도 경영 없이는 회사가 뭘 하자고 해도 따라오지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이런 불신을 타파하기 위해선 작은 신뢰부터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20%를 할인해 파는 점주들을 일일이 조사해 마진에 ‘플러스알파’을 줬다. 할인해도 이익이 나도록 한 것이다.

본사의 정책을 끝까지 따라가면 이익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하자 무너졌던 신뢰가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1985년 들어 처음으로 내수에서 금성사를 이겼다. 수출은 이미 1978년부터 1위였지만 국내 시장 공략은 난공불락이었기에 기쁨이 더했다.

강력하게 추진했던 ‘3G 금지 운동’도 기억난다. 당시 대리점 사람들이 본사 영업과장을 데리고 다니며 ‘골프’를 하곤 했다. 제조 부문은 임원이라고 해도 골프를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한마디로 ‘접대 문화’였다.

이를 엄격히 금지했다. ‘고스톱’도 못하게 했다. 대리점 사장들이 잘 보이기 위해 일부러 잃어주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고고클럽’ 출입 금지다. 고고클럽은 지금 말로 하면 룸살롱이다. 내가 비교적 골프를 늦게 시작한 이유도 바로 3G 금지 운동 때문이다.

첫 국내 영업 1위는 잔치를 벌일 정도로 기쁜 성과였다. 반대로 금성사는 초상집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듬해 초에 결산해 보니 다시 뒤집혀 있는 게 아닌가. 당시 금성사는 허신구 사장에서 구자학 사장으로 교체된 직후였다.

구 사장은 직원들을 야단치는 대신 “당신들이 영업에서 진 건 회사의 정책 지원이 잘못돼서다. 회사가 오히려 미안하다. 용기를 잃지 말고 다시 해보자”고 격려했다. 최고경영자(CEO)의 마인드가 조직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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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1. 9. 16. 12:34

사람이 곧 혁신이다 (16)

삼성전자는 1983년까지만 하더라도 전자레인지를 생산할 수 있는 핵심 기술이 없었다. 전자레인지 제조에서 가장 중요한 부품은 ‘마그네트론’이라는 고주파 발생 장치다. 일본과 미국 등이 자체 생산 기술을 갖고 있었는데 일본이 미국의 수준을 따라잡아 경쟁력 면에서 압도하고 있던 시절이다.

그즈음 마침 북미 필립스(NA필립스)가 마그네트론 사업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본토에 공장까지 잘 세워 놓았지만 일본산 제품에 밀려 사업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공장에 직접 가보니 유럽에서 이제 막 가져와 포장도 뜯지 않은 설비도 있었다. NA필립스는 ‘아무리 계산해 봐도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매각 대상을 찾고 찾다가 우리에게까지 접근한 것이었다.

기획실에서 투자를 심의하고 있던 터라, 마케팅실에 있던 나는 간사 역할을 맡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원가의 4분의 1 가격에 사들였다. 한마디로 대성공이었다. 드디어 삼성전자의 전자레인지 공장에 마그네트론 자체 생산 설비가 갖춰진 것이다. 경쟁력 향상은 당연했다.

당시 NA필립스와의 협상 과정에서 깨달은 게 있다. ‘무조건 돈을 더 못 준다고 하는 건 설득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일본 제품의 원가가 이런 구조이고 한국에서 너희 설비를 가져와 선적하고 설치하고 자체 생산했을 때 이 정도 비용이 나온다.”

우리는 예상 비용과 가격을 일일이 표로 만들어 제시했다. 그러면서 “원가의 25% 정도 돼야 우리도 생산성이 맞는다”고 설득했다. 우리의 주장이 납득되고 이해되니 그들도 순순히 이를 받아들였다.

“당신들이 실패해서 우리에게 팔았는데, 그 설비가 또 실패한다면 너희들의 명예도 한 번 더 실추된다. 더 이상 팔 곳이 없으면 어차피 버려져야 하는데, 그건 더 큰 실패다. 그러니 삼성의 요구에 맞춰 달라.”

지난했지만 합리적인 설득 과정 끝에 1000만 달러의 설비를 250만 달러에 사들였다. 그때 만일 일본이 이런 협상 사실을 알았다면 일본 업체들끼리 돈을 모아서라도 매물을 사들였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랬다면 우리는 아직도 일본보다 못한 전자레인지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이 일로 난 일본과의 경쟁력을 비교하는 것이 습관화됐다. 미국이나 유럽은 문화나 체질이 달라 접근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하지만 일본은 다르다. 그들이 잘하면 우리 체질에도 맞는 것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일본의 ‘마루J 운동’을 배우다

1994년 4월 삼성전자의 27인치 TV와 하이파이 VTR가 미국 소비자 전문 잡지 ‘컨슈머리포트’에서 베스트 모델로 선정됐다.

그때부터 삼성은 일본이 세계 1등 하는 것만 찾기 시작했다. VTR·전자레인지·카메라 등이 대표적이다. 삼성의 세계 1등 제품 중 과거에는 일본이 1등이었던 제품이 많은 이유다.

반도체도 그렇다. ‘신사업으로 뭘 할 것인가’ 고민하던 중 당시 일본이 메모리 분야에서 1등 하던 것을 보고 시작하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조나 구매 혁신 못지않게 중요한 게 ‘사무 혁신’이다. 바꿔 말하면 간접 부문의 효율화다. 일본은 제조 부문의 혁신을 사무까지 연결했다. ‘마루J 운동’이 대표적이다. 일본어로 ‘마루’는 ‘완벽한’, ‘제로’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에 ‘지무(사무)’의 J를 합쳐 만든 말이 마루J (혁신)운동이다. 삼성도 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사무실의 풍경을 떠올려 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바로 캐비닛이다. 요즘은 파일 박스를 쓰거나 그도 아니면 PC에 저장해 놓지만 예전에는 캐비닛이 주요 서류 저장소였다. 하지만 캐비닛은 정리정돈과는 거리가 멀었다. 쓸데없는 물건이 자리를 차지하기 일쑤였다.

제일 먼저 한 일은 파일 박스 하나 크기와 책상 아래 서랍 크기가 똑같도록 서류를 통일한 것이다. 체계적인 파일링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서랍별로 넣는 서류가 달라졌다. 또 진행·완료 등 사안별로도 정리가 가능했다.

그 당시 나온 말이 ‘1장 베스트, 2장 베터’ 같은 용어다. 이런 시스템이 정착되기까지 3년 정도나 걸렸다. 서류가 차지하는 업무와 공간의 비효율성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는 방증이다.

파일링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면서 눈에 띈 것이 있다. 바로 컴퓨터다. 모든 서류를 컴퓨터 하드에 집어넣고 관리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즉 정보 시스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일본은 정보 시스템에서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미국에 IBM이 있다면 일본에는 도시바와 히타치가 있었다. 각 그룹마다 이미 컴퓨터 시스템을 개발해 쓰고 있었다. 사무 혁신에 성공하니 정보 시스템 도입도 쉽게 이어졌다.

대부분의 회사들은 사무 혁신 없이 정보 시스템만 도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면 불필한 정보도 넣어두게 된다. 자동화·정보화도 좋지만 사람의 손으로 일단 개선해 놓은 후 이를 시스템에 적용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시스템이 아니라 쓰레기통이 되기 십상이다.

컴퓨터 활용 능력도 올라가고 전사적자원관리(ERP)를 도입할 때도 먼저 프로세스를 혁신하고 나면 시스템이 잘 돌아간다. 많은 관리자나 경영자들이 시스템만 도입하면 모든 게 잘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관리의 삼성’에서 ‘창조의 삼성’으로

삼성전자의 ‘신경영’ 1주년 기념 ‘고객 신권리 선언’ 장면. 신경영은 창조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한 출발이었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필자.

마루J 운동 성공의 대표적인 예는 ‘혼다’다. 사무 혁신과 정보 시스템이 제일 앞서 있던 기업이 바로 혼다였다. 우리도 전문가를 초빙하기도 하고 직접 일본에 찾아가 배우기도 했다. 처음 혼다에 갔을 때 들었던 질문이 떠오른다.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뭔지 아느냐”는 질문이었다.

그게 바로 ‘KT(미국의 케프너 박사와 트레고 박사가 고안해 낸 상황 분석 방법론) 방법론’이다. 혼다는 직원들에게 그걸 다 가르쳤다고 자랑했다. 삼성전자도 1986년 이를 도입해 전사적으로 교육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마쓰시타와 혼다가 큰 프로젝트를 공동 추진한 적이 있다. 마쓰시타는 굳이 비유하자면 삼성 같은 회사다. 관리를 잘하는 기업이란 뜻이다. 반면 혼다는 창의적이고 자유분방한 회사로 이름이 높다.
 
마쓰시타 사람들은 혼다 사람들을 보며 “저렇게 제멋대로 하면서 어떻게 안 망하나”라고 말했다. 반면 혼다는 마쓰시타를 보며 “어떻게 저렇게 숨 막히게 틀에 박혀서 일을 하느냐”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오늘날 삼성은 ‘관리의 삼성’보다 ‘창의의 삼성’에 가깝다. 21세기는 창조 경영의 시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관리의 삼성이라는 틀을 깨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1988년 이건희 회장이 취임하면서부터 한 얘기가 ‘창의·창조’다.

1993년 신경영은 이를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이 회장은 지금도 “20년 넘도록 노력했는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얘기한다. 그만큼 한 조직과 기업의 문화를 뜯어고친다는 것은 어렵다. 모든 임직원이 필요성을 공감하고 동참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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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1. 9. 16. 12:34

사람이 곧 혁신이다 (15)

일본은 2차 오일쇼크를 겪으며 산업(제조업)의 혁신에 눈을 떴다. 그러면서 수많은 경영 컨설팅 업체들이 생겨났는데, NEC컨설팅도 그중 하나다. 당시 삼성전관(SDI)과 NEC가 합작회사를 만들어 우리도 NEC컨설팅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들은 틈만 나면 원가·생산성 혁신 등을 배우라고 권유했다. 제일 먼저 들고 온 것이 VE(Value Engineering:가치 혁신)였다. 하지만 컨설팅 비용이 무척 비쌌다. 당시 기획실에 근무할 때였는데, ‘이걸 도입하면 적자에 허덕이는 사업부의 실적 개선이 가능할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하지만 문제는 실제 작업 현장에서 아무도 호응해 주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엔 ‘(생산)방법론’에 대한 개념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런 건 돈만 든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러던 차에 냉장고 사업부장이 눈에 들어왔다. 압축기 공장에서 같이 일했던 분이었다. “비용은 회사에서 부담할 테니 사업부 비용 부담은 없다. 대신 매주 이익 개선표에 VE 효과를 같이 발표해 달라”며 설득에 들어갔다. 마침 냉장고 부문의 적자 폭이 컸다. 사업부장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VE 도입을 결정했다.

VE와 관련해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의 유명한 일화가 떠오른다. 고노스케 회장이 오디오 사업 부문을 개선할 때의 일이다. 사업부를 찾아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니 “노력하고 노력해 원가를 3% 개선하겠다”는 대답이 나왔다.

이에 고노스케 회장은 “부품을 다 가져와 뜯어보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부품 하나하나를 집어 들며 “꼭 필요한가, 재질을 바꾸면 안 되겠나”라고 물어 결국 원가를 30%까지 줄였다. “3% 개혁은 어려워도 30% 개선은 쉽다”는 격언을 남긴 에피소드다. 당시 VE 계통에선 신화 같은 얘기였다.

냉장고 부문에 일본에서 배운 VE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효과는 예상보다 빨리 나타났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니 몇 천만 원 적자가 흑자로 돌아서기 시작한 것이다. VE 도입에 냉랭했던 다른 사업부장들도 냉장고 사업부장이 “VE를 통해 적자를 줄였다”고 하니 거꾸로 “우리는 왜 안 해 주느냐”고 얘기하기 시작했다. VE가 삼성에 정착된 계기다. 어떤 일이 됐든 과학적 방법론과 주먹구구식의 결과는 천지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삼성의 VE 도입 사례에서 배울 수 있는 건 ‘혁신은 가장 효과가 날 수 있는 곳부터 적용한다’는 것이다. 올코트 프레싱(전면 압박)을 하면 성공과 실패가 뒤섞이거나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기 쉽다. 맨 처음에는 한두 개 적합한 곳을 찾아 총력을 기울여 성공시킨 후 이를 바탕으로 전사적인 전개에 나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한국 최초로 도입한 ‘방판 조직’

1971년 삼성산요전기의 초기 흑백 TV 생산 라인. 삼성은 라이벌인 금성사보다 10년 늦게 전자 산업에 뛰어들었다. 당연히 사업 초기에는 기술력과 판매력이 모두 열세일 수밖에 없었다.

금성사(지금의 LG전자)는 1959년에 설립됐다. 삼성은 1969년이니 10년이나 뒤진 셈이다. 기술력뿐만 아니라 판매망도 금성사를 쫓아가기엔 한참 뒤져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대리점이다.

당시 우스갯소리로 “대한민국의 지방 유지들은 모두 가전 대리점을 한다”는 말이 있었다. 돈 좀 있는 지방 유지들이 앞다퉈 가전 대리점을 냈고, 그 덕분에 금성사는 전국에 촘촘한 대리점망을 갖출 수 있었다.

경제적 역량을 갖춘 사람들이 지역의 가장 좋은 길목에 대리점을 냈다. ‘흑백 TV 한 대 팔면 땅이 한 평 남는다’는 말이 돌 정도로 실제 이윤도 많이 남던 시절이었다. 대리점 부지 땅값이 크게 올라 부자가 된 사람도 많았다. 이에 비해 삼성은 상대적으로 대리점의 입지나 대리점주의 역량이 모두 떨어졌다. 시장점유율에서 금성사와 대한전선에 뒤진 가장 큰 이유였다.

판매 네트워크는 약한데 판매 실적을 늘리다 보니 부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채권이 회수되지 않는다든지, 대리점이 망하는 일이 이어졌다. ‘밀어내기식’ 판매에 급급하다 보니 팔수록 적자가 커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렇다고 판매 목표를 줄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기획실에서 ‘10년 비전’을 만들며 봤던 많은 책 중 ‘샤프의 아톰(부)대’라는 책이 떠올랐다. ATOM은 ‘시장 공략(Attacking Of Market)’을 뜻하는 영어 조어다. 샤프는 마쓰시타·히타치·도시바 등의 일본 전자 업체 중 후발 주자였다.

그러다 보니 삼성과 마찬가지로 대리점망이 취약했다. 샤프가 고전하다 생각해낸 것이 ‘꼭 점포만 고집할 게 아니라 방문판매를 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샤프는 곧바로 ‘방판팀’을 따로 조직했다. 젊고 준수한 직원들을 선발해 훈련시켰다. 넥타이를 매고 단정한 양복에 ‘007가방’을 든 핸섬한 청년들이 집을 방문해 “샤프에서 왔다.

가전제품을 쓰는데 불편한 점은 없느냐. 우리가 봐드리겠다”며 접근하자 판매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인적 판매 네트워크를 만들어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오늘날의 샤프가 있게 된 비결이다.

책을 보고 ‘금성사에 이기는 길은 아톰대를 양성해 방판 조직을 만드는 것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영업본부장을 설득해 아톰대 양성에 나섰다. 작고하신 고(故) 남궁석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영업본부장을 할 때니 1981년 즈음의 일이다.

영업본부에선 “기획실에서 창설했으니 기획실에서 교육을 맡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따라 끈질기고 전략적 사고를 지닌 사람을 한 명 뽑았는데, 그가 박을석 부장이다. 박 부장은 그전에 종합 품질관리(TQC)를 추진할 때도 함께한 경험이 있었다.

박 부장은 “갑자기 일을 하라 하니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사실 나도 책 한 권 읽은 게 전부였다. 고민 끝에 “당장 일본에 가서 이 책을 쓴 컨설턴트를 직접 만나 배우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박 부장은 정말로 책 한 권 달랑 들고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외상 거래 관행을 척결하다

“내가 컨설팅해서 성공한 게 맞지만 가까운 한국의 동종 업체를 도와줄 수는 없다.” 저자는 정중히 고사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박 부장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매일 사무실과 집 앞에서 죽치고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1주일 정도를 버티니 일본인 컨설턴트도 박 부장의 열정에 감동했다. “얼마나 진지하면 이렇게 열성적으로 원하는가. 당신이라면 내가 돕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고졸 사원 중 깐깐한 심사를 통해 ‘아톰대’를 뽑았다. 유격대 훈련 같은 정신 극기 훈련도 시켰다. ‘무박 100km 행군’까지 했다. 이들에게 007가방을 쥐어주고 멋지게 시작했다. 또 그 밑에 주부 사원을 두고 훈련시켜 방문판매를 도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한창 많을 때는 주부 사원만 1만 명을 넘은 때도 있었다. 밀어내기 판매를 하지 않고도 금성사를 따라잡게 된 배경이다. 박 부장은 나중에 회사를 나와 ‘아톰대’ 원 저자와 함께 컨설팅 회사를 차려 큰 성공을 거뒀다.

1984년이 되니 도산하는 대리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970년대는 땅값이 2~3배 계속 뛰는 상황인지라, 가전제품을 받아서 외상 거래 기간 동안 땅을 사두면 그 시세 차익만으로도 이익을 많이 보는 황금기였다.

하지만 오일쇼크로 땅값이 폭락하고 물건도 팔리지 않기 시작했다. 거래가 끊기고 땅값도 폭락할 수밖에 없었다. 절반 이상의 대리점이 문을 닫았고 이는 금성사도 마찬가지였다.

‘왜 외상 거래를 하나’라는 의문이 든 것도 그 즈음이었다. ‘10년 비전’을 기획하며 마쓰시타에는 현금 거래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터였다. 마쓰시타는 거치 기간 없이 다음 달 15일까지 돈을 다 받았다. 그러니 부실도 없었다.

‘이걸 배우자. 우리도 그렇게 하자’고 생각했다. 대신 우리는 이미 깔아놓은 게 있으니, 일정 기간 거치 기간을 준 후 대리점 형편에 따라 갚을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면 됐다. 2~3년만 고생하면 우리도 현금 거래를 할 수 있고 정상적인 실판매를 늘릴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당시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이 계열사 관리를 맡고 있었는데, 이분에게 분석표를 만들어 보고서로 올리며 “현금 거래로 바꿔야 한다”고 건의했고 결국 받아들여졌다.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Posted by 프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