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革新2012. 2. 18. 22:05

사람이 곧 혁신이다 37

기술원에서 임명한 최고관계(소통)책임자(CRO)들이 항상 관계사들을 순회하며 ‘시급한 기술’을 찾고 묻기 시작했다. 과제에 없는 것도 인원을 차출해 연구하고 도와줬다. 그렇게 해서 나온 성과 중 하나가 삼성전기의 주력품인 적층 세라믹 콘덴서(MLCC)다. 삼성전기의 재료 기술이 약해 고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개발에 착수해 성공한 사례다. 요즘 뜨고 있는 발광다이오드(LED)도 관련사에는 기술자가 부족했고 기술원에서 오랜 시간 연구해 온 분야였다. 오늘날 삼성전기 LED 기술력의 동기가 기술원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뒤 4세대 통신을 연구할 때도 40개 대학의 교수들과 학생들을 엮어 공동 개발하는 커뮤니티를 기술원 주도로 만들었다. 하나의 클러스터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기업이 경쟁을 이겨나가기 위해 현시점과 목표를 오픈하면 대학이나 연구 기관들이 함께 연구해 시너지를 창출하는 게 좋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비슷한 사례로 NTRM(National Technology RoadMap)이 있다. 과학기술부가 주도해 만든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지도다. 이 사업은 삼성 반도체 사업의 미래 방향과 일맥상통했는데, 바로 기술원의 로드맵을 벤치마킹했기 때문이다. “기업이나 국가나 큰 방향은 같다. 국가의 기술이 어디로 갈 것인지 일관성이 없으면 모든 연구 주체들이 시너지를 낼 수 없다. 선진국들은 국가적으로 이를 만들어 조율하고 통일한다. 기술원이 로드맵의 중심이 되고 이를 국가적으로 발전시켜 한 방향으로 시너지 내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나”하는 것이 삼성의 건의 내용이었고 이를 과학기술부에서 받아들였다. 당시 CRO 중 한 명인 이석환 박사가 주도한 프로젝트였다.



삼성그룹 기술의 플랫폼

삼성그룹 모든 기술의 플랫폼화를 표명한 곳이 기술원이었지만 1999년 부임 당시만 해도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삼성의 미래를 책임진다”는 멋진 창업 비전은 온데간데없었다. 심지어 “기술원 문을 닫아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고 조직원들도 자부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문제는 바로 ‘비전’이었다.

기초연구는 연구 자체가 좋아 모인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자기 분야에서 세계적 기술을 개발해 존경과 명예를 얻는 것이 모든 연구원들의 꿈이다. 그런데 사업자들은 기존 기술의 문제점을 개선해 달라거나 당장 눈앞에 있는 기술 등 낮은 수준의 요구를 할 수밖에 없다. 관계사가 요구하는 목표를 달성한다고 하더라도 학회에서 발표할만한 수준이 안 되기 일쑤였다. 한마디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 없는 환경이었다.

예를 들어 2세대 통신 특허의 기술 표준은 이미 선진국들 차지였다. 관계사는 당장 이 기술이 필요해 기술원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연구원들로서는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어차피 3만 명 중 1000명이다. 무슨 큰 변화가 있겠나’하는 것이 부임 당시 연구원들의 마인드였다. 조직을 뜯어고칠 계기가 절실했다.

“우리야말로 선대 회장의 초심·비전을 따라보자. 원천 특허, 세계적 표준, 기업 가치를 뜯어고치는 기술 외에는 연구하지 말라. 앞으로는 이 세 가지만 묻고 요구하겠다. 아닌 것은 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며 “3세대 통신을 연구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구동성으로 “이미 선진국이 다 해 뚫고 들어갈 데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번엔 “그렇다면 4세대가 있지 않느냐”고 되묻자 “누구도 시작하지 않아 뭔지도 모른다”는 게 아닌가. ‘이거다’ 싶었다. 누구도 시작하지 않은 기술에 우리가 처음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4세대 통신 태스크포스팀을 조직했다. 5년 후 삼성은 전 세계 4세대 통신의 선두주자가 됐다. 한국인은 예부터 도전적인 목표를 향해 힘을 모으면 무서운 저력을 발휘한다. 반면 후퇴 기미가 보이면 지리멸렬해지기 마련이다. 2세대 통신 기술에 불평불만이 많던 사람들이 4세대를 화두로 던지자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급기야 팀 구성 1년 만에 4세대 통신의 핵심인 안테나 특허를 낼 수 있었다. 긍정의 마인드만 쌓이면 엄청난 역량을 발휘하는 한국인의 특성이 고스란히 나타난 대목이다. 리더는 이렇게 평범한 과제가 아니라 가슴이 뛰는 목표를 줘야 한다.

높은 목표 한편으로는 위기의식을 고조시켰다. 그 일환으로 창업 이후 1998년 말까지의 기술 과제 130여 건을 분석했다. ‘우리가 개발한 기술이 정말 삼성에 도움이 됐는지’를 파악하고 관계사까지 찾아다니며 조사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긍정적인 답변은 18%에 그쳤다. 이러니 관계사에서 “기술원은 뭐하는 조직인가”라는 민망한 질책이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기술원 내부에선 ‘모두 성공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고객의 가치와 기술원의 눈이 이렇게 달랐다. 관계사는 적군과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기술원 사람들은 원천 유원지에서 뱃놀이하듯 연구·개발하고 있으니 누구도 좋아할 리 만무했다.

2001년에는 미래기술연구회를 발족했다. 앞으로 융합 기술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란 인식에서 시작된 일이다. 새로운 융합은 다양한 기술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들이 서로 교류하고 이해해야 시너지가 나온다고 생각했다. 삼성의 미래도 융합 기술에 달려 있었다.

삼성종합기술원을 삼성그룹 전체의 기술 플랫폼으로 만들며 혁신을 이뤄 나갔다. 사진은 2001년 삼성종합기술원 나노분석연구팀의 연구 활동 모습.


기술 생태계가 답이다

미래기술연구회 주도로 한국 최고의 전문가들을 회원으로 초청해 강연을 여는 등 교류에 나섰다. 나노·바이오·통신·컴퓨터, 심지어 건축이나 사회 전문가까지 20명 정도를 조직화했다. 당시 시작한 연구회 활동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삼성전자의 미래 리더들도 함께했는데, 당시 전무였던 이재용 사장도 연구회 멤버였다. 기술원의 기술 전문가들, 삼성전자의 최고 기술경영자들이 함께 참여해 이들과 교류했다.

서로 듣고 배우는 자리였던지라 참여한 사람 모두가 굉장히 좋아했다. 멤버들 모두가 자신의 분야에서 1등이었지만 다른 분야는 잘 몰랐다. 교류 자체를 굉장히 반가워하고 그런 장을 마련해 준 삼성에 고마움을 표시한 이유다.

삼성으로서도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대표들의 지혜와 지식을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꾸미지 않아도 대한민국 각 분야 최고 전문가들의 교류로 한국이 융합 기술의 꽃을 피우는 데 굉장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모임은 일종의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요즘 동반성장·공생이 화두인데, 산업화 초기만 해도 모회사만 잘되고 하청 업체들은 수단을 제공하는 시대였다. 그야말로 하청 관계다. 그러다 ‘협력회사’로 이름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동반 성장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전자산업으로 본다면 단순히 몇몇 기업의 성장뿐만 아니라 전자산업 전체를 뒷받침하는 큰 생태계(클러스터) 전체를 올바르게 육성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그 구심점에 삼성 같은 큰 기업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생태계를 바탕으로 모기업이 크고 이를 통해 협력사도 발전하면 개인과 중소기업이 강한 시스템이 저절로 이뤄진다. 미래기술연구회도 융합 기술의 리더들이 서로를 이해해 생태계를 만들자는 개념이었다. 오늘날의 공생·동반성장과 같다.

예를 들어 엔지니어를 육성하는 공대와 테크니션을 만드는 실업계 고교 그리고 작은 중소기업부터 중견기업까지 생태계 속에서 잘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하는 게 대기업의 역할이 돼야 한다. 이제는 혼자서만 지속 성장할 수 없다. 4세대 통신 연구를 시작할 때도 5개 대학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대학당 10~20명 정도의 연구 인력이 참여하는 대형 산학협력 클러스터를 만들었다. 이른바 4세대 통신 생태계다. 오늘날 한국이 통신 강국의 위상을 쌓을 수 있었던 직접적인 계기가 바로 이 산학협력 생태계였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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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2. 2. 14. 15:36

사람이 곧 혁신이다  36


이병철 회장은 사업 부지를 구할 때마다 풍수지리에 따라 명당을 찾았다. 그중에서도 삼성SDI 부산 공장은 소문난 명당이다. 뒤로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흐른다. 좌청룡 우백호도 모두 갖춰져 있다. 뒤에 끼고 있는 신불산은 신(神)과 불(佛)이 같이 있으니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험한 산이 아닌가. 산 위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진을 치고 주둔했다는 갈대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통도사도 가깝다. 그야말로 명당자리다. 산의 형세도 ‘여자가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모양’인데, 이는 풍요를 뜻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브라운관 사업을 시작으로 하는 사업마다 융성한 곳이 바로 삼성SDI 부산 공장이다. 

하지만 처음 부산 공장에 갔을 때는 기대와 달리 큰 사고가 계속해 일어났다. 직원의 음주운전 사고나 화재 등이었다.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느냐”고 인사 담당자에게 물으니 “이상하게 여기는 공장장이 바뀌면 꼭 세 번 일이 생긴다”고 하는 게 아닌가. “신불산에 가서 제사를 지내면 없어진다”는 얘기도 이어졌다. “진작 얘기하지 그랬느냐”며 호통을 치곤 바로 신불산에 올라가 임명 신고식을 치렀다. 그 이후 거짓말 같이 사건·사고가 사라졌다.

풍수지리를 믿건 안 믿건 간에 중요한 건 사람의 마음이다. 구성원들의 마음을 결속시키고 신뢰 관계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면 마땅치 않더라도 이런 일이라도 해야 한다. 신불산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의 힘이다. 소형 액정표시장치(LCD) 부문 활성화 때도 모든 조직원들이 산에 올라가 단합 대회를 열고 개선에 성공했다. 신화적 상징을 만들어 낸 것이다. 



긍정의 기운을 세우다

부산뿐만 아니라 수원 공장도 이런 긍정적인 기운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때 생각한 것이 광개토태왕비다. 1998년 6월에 식스시그마 1단계가 정착되고 프로세스 혁신도 1차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신경영동산’을 수원 공장 입구에 만들었다. 이병철 회장은 “컬러 브라운관 1000만 본을 만들어라. 세계에서 가장 큰 생산 회사가 돼라”는 목표를 세웠다. 또 하나는 이건희 회장의 비전이다. “양은 제일인데, 기술은 소니가 왜 넘버원이냐. 브라운관의 월드 베스트를 만들어라. 세계 제일의 기술을 개발하라.” 삼성SDI는 다이나트론 같은 기술로 소니를 능가하는 정상의 제품을 만들며 두 회장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 회장의 월드베스트 정신을 기리는 비석, 양과 기술에서 세계 제일을 상징하는 비석을 만들자는 결정을 내린 배경이다. 

세계 최고의 기술과 세계화를 상징하는 비석은 무엇일까. 결론은 광개토태왕비였다. 태왕비가 안테나가 돼 부산 신불산의 정기를 받을 수 있다는 스토리도 만들었다. 그런데 막상 비를 세우려니 비용이 상당했다. 탁본도 한국에 없고 일본에 있었다. 그런데 수소문하다 보니 뜻하지 않게 삼성미술관에 이미 광개토태왕비가 보존돼 있었다. 천안 독립기념관을 세울 때 태왕비를 세우기로 했는데, 문제는 일본에서 발주해 사 가지고 온 것이었다. “어떻게 일본에서 가지고 온 것을 세우느냐”는 비판이 쏟아지자 차마 세우지 못했던 것. 이를 삼성문화재단이 사준 것이었다. 

삼성미술관 쪽에 요청하니 “팔 수는 없고 빌려주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신경영동산에 광개토태왕비가 세워졌다. 문안을 번역해 방문객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신경영은 비단 삼성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체질을 개선할 수 있는 거대한 화두였다. 모든 언론들도 초기에는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 회장의 베이징 발언 이후 찬밥 신세가 되며 삼성 내부에서만 진행됐다. 오늘날 삼성이 초일류 기업으로 발전한 데 비해 사회의 전반적인 시스템이 아직 선진국을 따라잡지 못하는 격차를 나타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5년 동안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우리라도 뭔가 남겨야 하지 않겠나”고 해서 탄생한 것이 신경영동산과 광개토태왕비였다. 


삼성SDI 수원 공장에 광개토태왕비를 세울 때의 공사 현장 모습. 신경영의 성과와 세계 최고의 기술을 자축하는 상징이다.


삼성종합기술원장으로 새로운 출발

1999년 1월 삼성SDI를 떠나 삼성종합기술원장으로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2003년 1월까지 만 4년간 기술원장으로 일했다. 1년 정도 근속이 대부분이었던 것에 비하면 최장수 기록이다. 기술원은 그만큼 바람도 많고 변화도 많은 곳이었다. 

4년간의 경력 덕분에 ‘기술 경영’ 전문가가 다 됐다.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 상’도 받았다. 기계공학이 아닌, 기술 경영 전문가로 인정받고 기술경영학 명예박사 학위도 받은 건 모두 기술원장 시절의 일이다. 요즘도 강연 같은 대외적 활동과 한국공학한림원·한국엔지니어클럽 등 과학기술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이때의 경험 덕분이다. 정말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기술원은 잘 가려고 하지 않는 기피 대상 중의 하나였다. 대부분의 경영자가 현장 최고경영자(CEO)를 선호하지 연구소의 책임자로 가는 건 마뜩찮아 했다. 하지만 필자는 기술원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그릇을 만들 수 있었다. 삼성 안만 바라보던 내부 지향적 사고가 대학의 모든 전문가, 연구소 전문가들과 교류하는 열린 시각으로 바뀌었다. 또 국가의 기술 정책 과정에도 참여하는 등 활동 범위가 굉장히 넓어졌다. 전 세계의 연구 인력과 교류하니 네트워크의 틀도 넓어졌다. 인생을 크게 구분하자면 경영자로서의 인생과 기술원 이후 기술 경영인으로서의 삶으로 나눌 수 있을 정도다. 

기술원에 처음 갔을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게 있다. 당시 삼성그룹 전체의 기술 인력은 3만 명에 달했는데, 기술원은 고작 1000명에 불과했다. 3만 명 중 1000명이 ‘나만 잘해야겠다’고 생각해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기술원이 코어(core) 역할을 하자. 그래서 3만 명이 성과를 낼 수 있는 ‘씨앗 기술’을 제공하자. 이를 위해 각 관계사들과 협력하고 기업에 속한 연구진이 기술원에 와서 공동으로 연구하고 성과도 내야 한다. 즉 ‘플랫폼’의 역할을 하자는 게 복안이었다. 3만 명이 잘하게 할 수 있는 중심점, 즉 기술원을 삼성그룹 모든 연구의 융합과 시너지의 구심점으로 만들자고 결심했다. 

1년에 한 번 여는 ‘삼성기술전’을 기회로 활용하기로 했다. 그룹의 모든 관계사들이 모여 서로 격려하고 벤치마킹하는 자리다. 이때 기술원의 ‘오픈 하우스’를 기획했다. 기술원의 비전·성과·목표를 공유하는 장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기술원 안에는 ‘무한탐구관’이라고 이름 붙인 곳이 있다. 기술원이 뭘 해왔고 뭘 하는지 성과를 보여주는 곳이다. 예를 들어 나노 기술은 어떻게 발전하고, 세계에서 제일 발전한 기업은 어디이고, 우리는 어느 수준이고, 언제까지 발전해 그룹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로드맵을 보여주는 식이다. 연구원들이 이를 1년에 한두 번씩 고치며 새로운 비전과 목표를 세웠다. 관계사의 CEO들을 모시고 설명회도 열었다. 

기술원이 존재하는 이유는 각 사의 핵심 역량을 제고하게끔 하는 것이다. 연구·개발의 길은 이런 것이고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 여기까지 가겠다는 것을 안내하는 역할이다. 이를 위해선 기술원과 관계사가 서로 믿고 신뢰하는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CRO 제도를 만들게 된 배경이다. 

CRO는 ‘최고관계(소통)책임자(Chief Relationship Officer)’의 영문 첫 글자를 딴 것이다. 기술원 안에 있는 분야별 연구 책임자(전무, 부사장급)를 CRO로 임명했다. 이들에게 관계사와의 연계 활동을 위한 창구 역할을 맡겼다. 분기별로 순회하며 고객(관계사)과 만나 “우리는 이렇게 연구하고 있고 귀사에서 필요로 하는 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때부터 기술원은 ‘따로 조직’이 아니라 함께하는 조직, 즉 융합과 시너지의 플랫폼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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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2. 2. 14. 15:35

사람이 곧 혁신이다 35

삼성SDI가 2차전지 부문에서 최고가 된 데에는 숨겨진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사람, 즉 인재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사례다. 2차전지로 사업 방향을 틀었지만 막상 관련 기술에 대해선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한마디로 제조 기술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 와중에 일본 최고의 기술자와 전문가들을 전격적으로 스카우트했다. 당시만 해도 2차전지 세계 최고였던 소니의 기술자들을 세트로 확보하게 된 것이다. 각각 품질·생산·기술 담당인 이들을 스카우트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소니는 당시 리튬전지에서 가장 앞서가는 기업이었다. 그런데 이를 개발한 곳은 소니 본사가 아니라 소니 자회사의 자회사, 즉 손자회사쯤 되는 곳이었다. 작은 회사가 엄청난 기술력을 발휘해 세계 최고의 리튬전지 회사로 큰 것이다. 리튬의 중요성이 알려지고 부각되면서 본사에서 이들을 흡수 통합하게 됐다. 그러고 나서 소니 사람들을 파견했는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일반적으로 본사 사원이 자회사에 가면 한두 계급 올라가게 마련이다. 이때 회사의 주축이었던 생산·품질·기술·기획 등 4명이 사직서를 내게 됐다. 어찌 보면 아주 사소한 감정적인 문제였다. 

이들은 모두 지긋한 나이에 평생을 기술에 바쳐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젊은 친구들이 와서 기술자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본사의 관료주의적 시각으로 대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이들은 크게 실망했다. 급기야 기획을 맡았던 이는 따로 컨설팅 회사를 차려 독립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이 모두 ‘현장 투입’을 조건으로 삼성SDI에 입사했다. 소니 같은 선발 주자를 따라잡게 된 데는 이들의 공이 지대했다. 



대기업 절반이 퇴출된 소용돌이

사람이 중요한 건 누구나 알고 있지만 때론 품 안에서 내보내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1997년 찾아온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때가 대표적이다. 위기는 모든 것을 비상사태로 돌렸다. 30대 그룹 가운데 거의 절반이 퇴출됐고 중견기업의 27%가 사라졌다. 

변화와 혁신은 사업 규모 조정, 인원 조정, 자리 배치 등의 변화가 불가피한 작업이다. 다행히 삼성SDI는 식스시그마와 프로세스 혁신으로 간접 부문의 생산성을 300% 올리고 나머지는 다른 일을 해야 한다는 목표가 처음부터 있었다. 천안에 새로운 사업장을 준비하고 거기서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전지 사업 준비 등을 위해 이미 사람들을 이동시키던 중이었다. 당연히 구조조정 규모도 작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원 등 많은 사람들을 구조조정하지 않을 수 없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그때가 기업인으로서 가장 어렵고 힘든 때가 아니었나 싶다. 함께 혁신하고 식스시그마를 도입하며 밤낮없이 일했는데, 도대체 누구를 내보낸단 말인가. 대상자가 정해지면 막상 통보는 어떻게 하나.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한 번은 부산 사업장을 찾은 적이 있다. 그곳에 친척이 한 분 계셨는데, 생각의 깊이가 있는 어른이었다. 저녁을 같이하며 어려움을 토로하니 책 한 권을 추천했다. ‘후안흑심’이란 제목으로, 지금은 절판된 책이다. 

후안흑심은 자고로 ‘중국의 영웅들은 전부 낯이 두껍고, 마음이 시커먼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책에선 삼국시대의 영웅인 유비를 가장 낯이 두꺼운 이라고 말한다. 전쟁에서 지면 자결을 택하기보다 반대편, 심지어는 적군인 조조에게조차 머리를 숙이며 연명한 이가 유비다. 조조는 그렇게 유비를 받아들이고 나선 “천하의 영웅은 유공과 나밖에 없지 않느냐”며 떠보기도 했다. 유비는 그럴 때마다 손을 떨어 찻잔을 떨어뜨리며 절대 그렇지 않다고 얘기하곤 했다. 

반면 항우는 낯이 가장 얇은 사람이다. 백전백승하다가 맨 마지막 한판 전쟁에서 패한 그는 “초나라로 데려온 8000 군사를 다 잃었다”며 자살을 택했다. 그런데 유방은 100전 100패해도 또 돌아가서 다음을 준비했다. 낯이 두꺼운 것이다. 유비도 남들 보기에는 연명하는 모양새가 낯이 두껍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누가 욕을 하더라도 이를 참고 견뎌 나라와 백성을 구하겠다’는 큰 뜻이 있었다. 아비규환의 세상을 통일해 다시 한나라처럼 태평성대를 가져오려면 자신이 살아야 한다는 게 지상 과제였던 것이다. 만일 낯이 두껍지 못하면 이를 견딜 수 없었을 게다. 

IMF 외환위기와 이로 인한 구조조정은 기업인으로서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이다. 사진은 1997년 12월 3일 구제금융 합의안에 서명하는 당시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미셸 캉드시 IMF 총재.


무조건 안고 가는 게 능사는 아니다

흑심의 대표 주자는 조조다. 조조는 천하통일을 위해 방해가 되는 것은 가차 없이 처단했다. 한 번은 조조가 전쟁에 패해 혼자 말을 타고 도망친 적이 있었다. 도중에 친한 옛 친구를 만났는데, 힘든 조조를 제 집에 재워 줬다. 한참 자다 이상한 소리에 눈을 떴는데, 밖에서 친구의 부인이 칼을 가는 소리가 들렸다. “술을 대접해야 하니 돼지를 잡으라”는 남편의 말을 듣고 부인이 칼을 갈고 있었던 것. 하지만 조조는 친구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집에 없는 친구가 관가에 신고하러 갔다고 생각한 조조는 부인을 죽이고 도망쳤다. 

그런데 길을 가다 술을 들고 뛰어오는 친구를 만났다. 큰 뜻을 위해 내가 남을 배반할 수 있어도 남이 나를 배반하게, 원수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조조의 생각이었다. 그냥 돌아가면 부인의 죽음을 보고 원수가 돼 자신을 칠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조조는 그 자리에서 친구마저 죽이고 다시 길을 떠났다. 그야말로 흑심의 대표 격이다. 하지만 큰 뜻을 이루기 위한 흑심은 세상을 바꾼다. 체면을 버리거나 작은 희생을 가슴 아파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유비와 조조의 이야기는 후안과 흑심이 마음의 창과 방패가 된다는 걸 일러줬다. 

책을 읽고 나니 IMF라는 큰 소용돌이 앞에선 전 직원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업을 정리하고 맞지 않는 인원을 정리하는 것은 큰 배가 풍랑을 만나 짐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 죽느냐, 남은 사람이라도 사느냐의 갈림길이었다. 그 순간 후안흑심이 맞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대신 구조조정 당사자들이 새로운 활로를 찾아가는 데 도움 되는 일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GE의 잭 웰치 전 회장이 늘 하는 말 중 하나가 있다. “조직에 A급 인재가 20% 있고, 나머지 80%가 있다. 그중에서도 맨 마지막 10%는 마이너스가 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나갈 수 있도록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잭 웰치 회장은 “사람을 내모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적재적소에서 자기의 잠재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조직과 자신의 삶 모두가 불행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때 조직의 장은 이들을 안고 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일을 찾아가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대답하곤 했다. 그는 “대신 모든 GE 사람들을 변화와 혁신, 교육을 통해 몸값, 즉 가치를 올려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실제로 GE에서 퇴출된 대부분은 다른 회사에 가서 승진하고 월급도 더 받는 경우가 많다. 직원 개개인의 가치를 높이도록 끌어주고 교육시켜 어디에 가든 GE 출신이기에 몇 배 더 뛰어난 인재 소리를 듣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써야 한다. GE는 구조조정 스트레스가 거의 없는 회사로 유명했다. 정성 들여 GE 안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찾아보고, 그래도 안 되면 적극적으로 외부에서 기회를 찾을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시스템이다. 어느 자리든 한 번 들어가면 마냥 좋은 게 아니다.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을 그냥 놔두는 것은 오히려 죄악이다. 삼성SDI도 사원들 중 장기근속해 정년이 다 된 사람들을 위해 ‘희망퇴직’을 받고, 그들을 위해 창업지원센터를 만드는 등 퇴직자를 위한 프로그램에 힘썼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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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2. 1. 30. 09:10

사람이 곧 혁신이다 34

1994년에 삼성전자 전략기획실에서 프로세스 혁신을 경험한 것은 이후 최고경영자(CEO)로서 가질 수 있는 귀중한 자산이 됐다. 1995년 말 삼성SDI 사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이미 2년간 ‘프로세스 혁신(PI)’ 과정을 온전히 겪고 난 뒤였다. 

막상 삼성SDI에 가보니 혁신은커녕 과거 삼성NEC(삼성과 일본 NEC의 합작회사) 시절의 업무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컴퓨터도 NEC 것을 쓰는 등 모든 것이 NEC의 시스템이었다. “간접 부문의 생산성을 300% 올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자”는 승리 전략을 직원들에게 제시했다. 방법은 역시 PI였다. 

삼성전자의 PI는 1994년부터 시작해 6년간 장기 플랜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삼성SDI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신경영 1차 종료 시점인 1998년 6월까지 어떻게든 마쳐야 했다. 첫째 목표는 ‘프로세스 혁신을 1년 안에 끝낸다’였다. 보통 아무리 짧아도 3년은 걸리는 게 기본이었지만 그래선 망하기 십상이었다. 어찌 보면 무모한 도전이었다. 지금까지 누구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PI는 전문가의 도움과 감독이 필수다. 이를 위해 세계 각국의 컨설팅 회사를 찾았다. 언스트앤영(삼성전자 PI 담당), 앤더슨, KPMG 등이었다. 그런데 미국 회사들은 “1년 만에는 불가능하다”고 모두 손사래를 쳤다. 유일하게 독일의 KPMG만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다. 이 프로젝트를 맡은 KPMG 담당자의 이름이 슈미트였다. 그는 “기간 내에 맞추지 못하면 고객이 망한다는데, 맞춰줘야지 어쩌겠느냐”며 우리의 요구에 응했다. 

당시 독일에는 SAP라는 회사가 만든 시스템이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독일이나 유럽 안에서도 부분적(재무·구매 등)으로만 깔려 있었지 회사 전체 시스템에 이를 적용한 사례는 없었다. KPMG는 바로 이 점을 노렸다. SAP 시스템을 기업 전반에 적용해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던 것이다. KPMG의 향후 컨설팅 마케팅에서 이보다 좋은 메리트는 없었다. 

KPMG 안에서도 “내부의 인재를 키우려면 이런 큰 프로젝트 해봐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그 덕분에 삼성SDI의 PI를 담당하게 된 직원들은 KPMG 안에서도 욕심과 열정을 가진 인재들이었다. 이들은 1년 내내 휴가를 가지 않을 정도로 똘똘 뭉쳤다. 나중에 슈미트를 만나 물으니 “1년 사이에 체중이 20kg이나 줄었다”고 말했다. 

제일 어려웠던 것은 직원들의 부인들을 일일이 만나 설득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유럽은 우리와 달리 1년 동안 휴가 없이 지낸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노동환경이었다. PI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난 후 담당자인 슈미트에게 ‘슈드 미트(should meet)’라는 별명을 지어 줬다. ‘고객의 요구를 반드시 들어주는 사람’이란 뜻에서였다.



프로세스 혁신 1년 만에

1995년 들어 제너럴일렉트릭(GE)의 잭 웰치 회장이 식스시그마를 천명했다. 당시 삼성과 GE의 합작사인 삼성GE메디컬시스템즈가 있었는데, 필자도 삼성 쪽 이사로 참여 중이었다. 그 덕분에 이사회 때마다 공장을 방문하고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나오는 게 식스시그마 얘기였다. “그게 뭐냐”고 물으니 “100만 번에 3.4회 불량이 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몇 % 불량률’을 얘기할 때 그들은 이미 100만 개 수준을 지향하고 있었다. 

결국 프로세스만 바꾼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방법론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생각에 식스시그마 도입을 천명했다. 하지만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반대했다. “PI를 1년 만에 끝내 죽을 지경인데 뭘 또 하느냐”는 소리였다. 여기서 필자가 내놓은 게 ‘곰탕론’이다. 한국 사람은 곰탕을 끓이고 비빔밥을 먹는 사람들이다. 

한 가지를 쉽게 가르쳐 놓으면 게으름을 피우기 쉽고 어려운 도전 과제를 주면 악착같이 해내는 게 바로 한국인이란 뜻이다. “한 번 해보자”며 직원들을 다독였다. 프로세스 혁신과 전사적자원관리(ERP)를 동시에 끝내는 Y형 프로세스도 겨우겨우 설득해 시작했는데, 여기에 난데없는 식스시그마까지 붙여 W형 프로세스에 도전하자는 주문이었다. 결과는 결국 성공이었다. 

당시 삼성SDS 남궁석 사장이 우리의 무모한 도전을 보며 걱정했던 모습이 생각난다. “NEC 시스템을 다 끄고 바꾼다고 하던데 다른 회사들도 기존 것을 돌려가며 한다. 그렇게 하는 게 어떻겠나.” 필자의 답은 단호했다. “안 된다, 배수진을 쳐야 한다. 모든 사람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나중에 남궁 사장을 모셔온 적이 있다. 남궁 사장으로선 말리려는 의도였으리라. 이 자리에서도 “삼성SDI를 살리는 길이 PI와 식스시그마에 달려 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는 안 된다”며 오히려 설득했다.


삼성SDI가 2003년 선보인 세계 최고 성능의 리튬 이온 2차전지.


2차전지가 미래 먹거리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삼성의 전지사업은 전기·전자·전관 등이 모두 뛰어든 상태였다. 1994년부터 시작된 그룹 전체 회의를 통해 비로소 “삼성기술원이 연구를 진행하면서 언젠가는 통합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삼성SDI로 전지사업이 일원화된 배경이다. 당시 삼성SDI는 니켈수소전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1996년 부임해 보니 이미 파일럿 생산 단계였다. 

그런데 전지 사업을 공부해 보니 그때 이미 ‘리튬전지’ 시대가 온다는 게 전문가들 사이에선 상식으로 통했다. 하지만 SDI 사람들은 파일럿 단계까지 와 있는 니켈수소전지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니 항상 “문제없다. 시장이 밝다”는 얘기만 나왔다. 

결국 직접 일본에 찾아가 전지 전문가 여럿을 만나봤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니켈수소는 가고 리튬이 뜬다”는 소리였다. 용량이나 품질로 당할 수 없다는 게 대세였다. 돌아와 직원들을 설득하고 리튬전지에 도전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막상 리튬전지 사업을 시작하려고 보니 국내에선 이미 LG화학이 2~3년 전부터 치고 나가 상당히 앞서 있는 상태였다. 불만과 어려움을 호소하는 직원들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사람의 몸을 봐라. 제일 중요한 세 가지가 있다. 첫째가 머리, 그 다음이 보는 눈, 마지막으로 심장이다. 뇌에 해당하는 반도체는 삼성전자가 맡고 우리는 디스플레이, 즉 눈을 맡고 있다. 여기에 심장에 해당하는 2차전지까지 우리가 한다고 생각해 봐라. 결국에는 삼성전자보다 더 가치 있는 회사를 만들 수 있다.” 

삼성전기 시절에 ERP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했던 일본인 나카바야시 고문도 찾았다. 그에게 ‘후발 주자가 빨리 따라잡을 수 있는 방법’을 물었더니 “전 세계의 연구 결과 어떤 것이 성공하고 실패했는지 전부 파악하면 빨리 따라갈 수 있다”는 답을 들었다. 선문답 같은 대답에 당황해 하자 웃으면서 하는 말이 “모든 기술은 연구 논문과 특허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어차피 이 사업에서 성공하려면 특허를 분석해야 했다. 어느 회사가 어떤 기술에 강하고 어디에 중점을 두는지 특허에 모두 드러나 있었다. 

특허청에 달려가 모든 논문을 다 찾아 발췌하고 복사해 왔다. 수천 건에 이르는 논문이 방 안에 산더미처럼 쌓였고 연구원들이 달려들어 정리,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기술과 협력 사항 등이 소상하게 드러나는 게 아닌가. 이와 함께 토론까지 진행하니 분야별 업무 분장도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빠짐없이, 중복 없이’가 연구 활동의 핵심이었다. 전력을 다해 진행하니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LG화학을 따라잡았고 양산도 우리가 먼저 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때부터 필자는 무엇보다 특허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다. 미국의 전문가를 모셔와 특허팀을 만들고 전 세계의 특허를 연구·분석하는 일만 맡겼다. 오늘날 삼성SDI의 2차전지 사업 기반은 순전히 기술 특허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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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2. 1. 16. 19:51

사람이 곧 혁신이다 33


이병철 회장은 생전에 “삼성SDI를 세계 최대의 브라운관 기업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이 회장의 목표를 바탕으로 드디어 ‘컬러 브라운관 연산 1000만 본’을 생산해 내며 세계 최대 메이커로 성장했다. 하지만 생산량으로 세계 최대를 자부하는 건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도입 이후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됐다. 바로 품질의 문제였다. 전사적으로 매달린 ‘월드 베스트’ 전략과 세계 최대 생산량은 맞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은 “양은 우리가 제일인데, 기술은 소니가 최고다. 언제 따라가겠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새로운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필자가 1996년 당시 삼성전관 사장으로 갈 때 다른 요구는 아무것도 받은 게 없었다. 오직 하나, “소니를 따라 잡으라”는 것 하나뿐이었다. 

소니는 당시 이미 ‘트리니트론’이라는 기술 특허로 만든 원통형 브라운관으로 세계를 제패하고 있었다. 소니를 제외한 전 세계 어떤 제조사도 구형 브라운관을 벗어나지 못했다. 구형 브라운관과 트리니트론은 들어가는 부품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그 어느 기업도 ‘소니에 도전하겠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금요 공정회의를 통한 삼성SDI의 혁신은 세계 최고였던 소니의 브라운관 제조 기술을 따라잡는 원동력이 됐다. 사진은 2000년대 중반 삼성SDI의 PDP 생산 라인.


누구도 넘볼 수 없었던 소니의 아성

소니를 뛰어넘기 위해선 그들의 기술과는 다른 우리만의 새로운 기술이 필요했다. 어차피 소니의 방식이 아닌 독창적인 혁신 기술을 개발해야 했다는 뜻이다. 그 결과 개발된 것이 ‘섀도마스크’ 방식을 적용한 17인치 ‘다이나플랫’ 브라운관이다. 1998년 4월에는 29인치를 개발하는 데도 성공했다. 그 당시 완전 평면 브라운관 생산능력을 갖춘 곳은 소니·삼성·마쓰시타밖에 없었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선 기술자들의 생각부터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당시는 황창규 전 삼성 기술총괄사장이 삼성 반도체연구소장을 맡고 있을 때다. 필자는 황 소장을 찾아가 “반도체는 이미 세계 1등이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느냐”고 자문했다. 그리고 우리 공장 직원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해 달라고 부탁했다. 황 사장은 흔쾌히 동의했고 얼마 후 부산 공장을 찾아왔다. 

황 사장이 밝힌 세계 1등의 비결은 ‘수요 공정회의’였다. 매주 수요일 오후 모든 기술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술 이슈에 대해 벌이는 토론이다. 그 자리에선 직급과 경력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든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고 토론한다고 했다. 수요 공정회의는 반도체 사업부 설립 초기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었다. 필자가 2004년 삼성 인력개발원장으로 있을 때 황 사장이 직원들과 함께 워크숍을 온 적이 있는데 바로 ‘수요 공정회의 700회’를 기념하는 행사였다. 

황 사장은 “모든 기술을 공유하면 저절로 업그레이드가 이뤄진다”고 말했다. 문제가 생긴 사람이 잘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훌륭한 인재를 발탁하기도 하고 아이디어도 창출되는 곳이 바로 수요 공정회의였다. 

이를 벤치마킹해 삼성SDI도 ‘금요 공정회의’를 만들었다. 저녁을 먹고 회사 밖에서 토론을 벌였다. 밤 12시 혹은 1시를 넘기면서까지 끝장 토론이 이어졌다. 이를 매주 반복하다 보니 황 사장의 말처럼 새로운 역량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소니와의 경쟁, 대만대첩의 완성 등 삼성SDI의 경쟁력은 다분히 금요 공정회의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후 크게 히트한 원적외선 브라운관, 기(氣) 브라운관, 프레시바이오 브라운관 등의 창의적 아이디어들이 금요 공정회의를 통해 나왔다. 기 브라운관은 러시아에서 대히트를 기록했는데 러시아는 추운 기후 덕에 일찍부터 원적외선의 효과를 알고 있었다. 러시아 사람들이 삼성 TV 앞에 쭉 둘러앉아 방송을 보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처음 삼성전관 대표이사 발령을 받고 당시 김광호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인사하러 갔다. 그 자리에서 김 부회장은 “전관에 소형 액정표시장치(LCD) 사업에서 해마다 수백억 원씩 적자가 난다. 10년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정리하는 게 좋겠다. 반도체도 잘되고 있으니 생각해 보라”고 조언했다. 



500억 적자를 1년 만에 흑자로

하지만 필자는 ‘적자의 원인이 무엇인지, 제대로 노력했는데도 적자인지, 뭔가 잘못된 것은 없는지’ 알아봐야겠다는 결론을 나름대로 내리고 있던 차였다. 소형 LCD 사업을 책임지고 있던 이는 엔지니어 출신의 상무였다. 사업 책임자라고는 하지만 순수한 엔지니어이지 경영자는 아니었다. 

일단 간부들을 한자리에 모아 왜 적자인지 물었다. 10년쯤 위기를 겪은 사업은 대부분 위기의 원인이 한두 가지로 모아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사람마다 말하는 이유와 생각이 제각각인 것이 아닌가. 위기와 문제의식조차 통일돼 있지 않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결국 토론을 통해 하나의 문제로 집중하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우선 영업부서부터 시작했다. STN(수동형) LCD는 ‘PC용 모니터가 뜨니 모니터용 대형 디스플레이를 만들어야 돈을 번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대형 노트북용 설비 투자를 진행하게 된 배경이었다. 하지만 소형도 제대로 된 품질을 갖추지 못했는데 대형이 될 리 만무했다. 책임자는 무조건 ‘팔라’고만 하니 영업부서에선 공장에서 소화할 수 없는 스펙의 제품들까지 무조건 수주해 왔다. 그런 다음 개발 부서로 넘기면 여기서도 양산 개념 따위는 생각지도 않은 채 그냥 생산 공장으로 내려 보냈다. 자연히 공장은 난장판이 됐다. 이것이야말로 ‘모럴 해저드’다. 내 부서만 욕먹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에 책임 떠넘기기에만 급급한 모양새였다.

문제점을 파악한 후 당장 개발 부서 사람들을 불렀다. 그리고는 “너희들이 제일 중요하다. 우리 기술 역량을 알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때부터 개발부와 영업부가 따로 놀지 않고 같이 다니면서 서로 설득하고 사람도 만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하자 자연히 거래처가 정리되기 시작했다. 사실 훌륭한 거래처들은 흑자를 내는 곳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와 맞지 않는 수많은 거래처 때문에 좋은 거래처까지 만족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고객을 ABC로 나누어 관리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우량 거래처를 최우선시해 그들에게 최고의 만족을 준 후 그들로 하여금 물량을 늘리게 하자는 뜻이다. 반면 손해나고 맞지 않는 거래처의 80%를 잘라내고 20%만 남겼다. 

조직이 안정을 되찾고 여유가 생기자 “또 다른 높은 수준의 고객을 찾아 개발하자”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기술 인력을 영업에 전진 배치하고 A급 고객에게 모든 역량을 총집중했다. B급은 A급으로 만들고 C급은 과감히 퇴출시켰다. 그러자 문제를 보는 눈이 점점 간단해졌다. 이전까지는 서로 엉켜 ‘네 잘못, 내 잘못’을 따지기 바빴던 이들도 변하기 시작했다. 

생산 현장 인력들과 함께 신불산을 오르는 등 극기 훈련까지 진행하며 공감대를 쌓는 등 의지를 다졌다. 결과는 9개월 만에 형광표시관(VFD)의 흑자 전환으로 나타났다. 석 달 후에는 LCD도 흑자로 돌아섰다. 소형 디스플레이 혁신 1년이 지나자 모든 사업부가 흑자로 돌아섰다. 10년 동안 매년 500억 원의 적자를 내며 모두가 ‘정리하라’고 조언했던 사업이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VFD를 보니 일본의 경쟁사가 모두 미국의 ‘빅3’ 자동차 회사에 납품하고 있었다. ‘우리도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미국은 QS-9000이라는 품질 규격을 만들어 모든 부품사에 이를 따르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NEC나 호시덴 같은 기업은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후발 주자인 삼성SDI는 이를 노렸다. 전 사원이 똘똘 뭉쳐 1997년 9월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결국 김광호 부회장에게 “1년만 기다려 달라. 그 안에 흑자를 내지 못하면 내가 접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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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2. 1. 16. 19:51

사람이 곧 혁신이다 32

 1996년 당시 이미 삼성SDI의 모니터 수출량은 전 세계 최고였다. 삼성 안에서 ISO-9000 인증을 제일 먼저 받은 곳도 삼성SDI였다. 하지만 실제로 가보니 안 지키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정말 제대로 해보자. 사느냐 죽느냐는 룰을 지키는 데 있다”며 설득에 들어갔다. ‘삼진아웃’ 제도도 도입했다. 처음 적발되면 경고, 두 번째는 앞의 것까지 합쳐 두 배의 벌, 세 번째는 ‘집에 보낸다’는 뜻이다. 이를 위반하면 식당 앞 게시판에 공고하기까지 했다. 

수원·부산·천안 등 많은 수의 공장 책임자 중 부산의 한 직원이 ISO를 그대로 지키는 프로그램 만들어 열심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직접 찾아가 보니 생산·품질 등 모두가 안정적이었다. 필자는 이를 과감히 도입해 삼성SDI의 표준 품질 프로그램인 SQM(Samsung Quality Management)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다시 만들기도 했다. 

삼성SDI 혁신의 핵심은 ‘프로세스 혁신을 통해 간접 부문의 생산성을 300% 올리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품질 프로세스를 획기적으로 혁신해 품질 코스트를 30% 안으로 줄이고 매년 500억 원씩 적자가 나던 소형 디스플레이를 1년 안에 흑자로 돌리기로 했다.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 등 모두 4가지 방안을 혁신의 모체로 정했다. 

200명이나 되는 인원을 뽑아 혁신 프로젝트팀을 만들었다. 현장에선 “그렇지 않아도 바빠 죽겠는데 그렇게 많은 인원을 데려가면 일이 되겠느냐”는 불만이 쏟아졌다. 사람이 비면 물론 일이 늘고 힘도 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사람과 사람, 조직과 조직 사이에서 오는 손실이 오히려 줄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됐다. 불평불만은 “오히려 일하기 더 편해졌다”는 말로 바뀌었다. 200명의 혁신 팀원도 올곧게 프로세스 혁신에 전념할 수 있었다.

삼성SDI 천안 공장은 생산성 향상을 통해 남은 인력을 투입해 신수종 사업을 시작했다. 사진은 2007년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꼽히는 능동형 유기발광다이오드(AMOLED)를 세계에서 처음 대량생산하기 시작한 천안 사업장의 AMOLED 양산 라인.


팀원만 200명에 이른 혁신 전담팀

필자는 파킨슨 법칙(공무원의 수는 업무의 경중이나 유무에 관계없이 일정 비율로 증가한다는 법칙. 영국의 행정학자 시릴 N. 파킨슨이 주창)을 믿는다. 영국이 전 세계 42개국에 식민지를 뒀는데, 식민지 수가 줄어도 관리청 사람들은 계속 늘어났다고 한다. 일은 주는데 사람은 늘어나는 것이다. 일이란 것은 사람 수에 따라 더 늘어나게 마련이다. 혼자 할 일을 두 사람이 하면 거기서 파생된 관계 문제 때문에 일이 더 많아지고 바빠지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사람을 줄여야 일도 준다. 

200명이나 되는 사람을 간접 부문에서 빼냈으니 규모만도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부임 첫해에 매출 3조 원 중 원가절감 부문에서만 1조1000억 원을 달성했다. 브라운관 가격이 그렇게 떨어지는데도 흑자를 낼 수 있었던 건 위기의 공감, 그리고 신뢰의 공유에 있었다. 위기가 닥치면 ‘망한다’는 부정적인 생각과 ‘기회다, 할 수 있다’는 긍정적 신뢰의 두 가지로 생각이 나뉜다. 위기를 긍정적인 도전 정신으로 승화시키고 융합과 시너지를 이루면 결국 기회로 돌아오게 된다. 

그 무렵 천안에 새로 지은 공장은 최고의 효율을 자랑했다. 그런데 천안 공장의 직원들은 새로 뽑은 인원이 거의 없었다. 기존 공장의 생산성이 오르면서 남는 인원들을 투입한 것이다. SQM으로 품질을 개선했고 1996년 하반기에 식스시그마까지 도입한 결과였다. 

훗날 일본의 닛케이비즈니스에서 조사를 나온 적이 있다. 2000년 즈음의 일이다. ‘일본의 브라운관은 다 적자가 나서 문을 닫거나 위기인데, 어떻게 삼성SDI만 돈을 버는가’가 그들의 연구 과제였다. 나중에 돌아가 잡지에 특집 기사로 크게 소개했다. 삼성SDI는 생산성을 올려 그중 3분의 1을 신규 사업장인 천안에 투자했다. 천안에서 시작한 이차전지 사업이 대표적이다. 식스시그마로 원가 경쟁에서 일본을 10% 이상 앞서나갔다는 게 기사의 결론이었다.
  
숨겨진 일화도 있다. 시장의 맞수인 LG전자도 브라운관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과 마찬가지로 적자를 보고 있었다. 구자홍 당시 LG전자 부회장은 “왜 삼성만 이익인지 철저히 분석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재료비·인건비 등을 아무리 따져 봐도 브라운관 하나당 8000원 이상 LG 제품이 비싸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유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됐다. 8000원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답은 결국 ‘품질비용’이었다. 식스시그마식으로 말하면 당시 LG의 품질 수준은 3.7~3.8 수준이었고 삼성SDI는 이미 5.2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는 걸 뜻한다. 이 일을 계기로 LG전자도 전사적인 식스시그마 도입에 나서게 됐다. 


대만의 ‘미운 오리 새끼’ 삼성SDI

삼성SDI 사장으로 부임하며 기억에 남는 일 가운데 하나가 ‘대만대첩’이다. 모니터용 컬러 브라운관인 CDT는 1995년에 이미 공급이 수요를 훨씬 뛰어넘은 상황이었다. 가격도 50%나 폭락했다. 살아남는 길은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뿐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고정세(高精細) 기술은 따라잡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CDT는 기본적으로 모니터다. 모니터 자체의 특성에 브라운관을 얹었을 때 궁합이 잘 맞으면 화질도 좋아지고 제조도 쉽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삼성SDI 사람들은 ‘브라운관은 글로벌 스탠더드다. 우리는 우리 것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모니터 쪽에선 생산에 들어가 품질을 조정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들어 했다. 

부임 초기 대만의 업체를 찾아가 생산 책임자를 만났다. 그에게 “일본 히타치와 우리 제품의 차이가 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삼성 제품을 라인에 올리면 생산성이 30% 뚝 떨어진다”는 게 아닌가. “양이 모자라 할 수 없이 쓰지 그렇지 않으면 안 쓸 것”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이 이어졌다. 일개 창고 담당자까지도 우리 물건을 깔아뭉갰다. “물건을 50 대 50으로 샀는데, 생산 반장들이 히타치 것만 가져가려고 하니 창고 관리가 더 힘들다”는 푸념이었다.

낯이 뜨거워 더 이상 듣기 힘들 지경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품질·납기와 고객이 생각하는 게 다르다는 걸 절실히 깨달은 계기였다. 예를 들어 ‘그 달 안에 정해진 1000만 개만 선적하면 된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객으로선 자기가 필요할 때 정확히 필요한 숫자만큼 보내줄 때 비로소 ‘납기가 맞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필요 없을 때 왕창 보내 창고에 쌓아두게 하는 건 납기를 맞추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대만 업체 쪽에선 ‘삼성만큼 납기를 잘 안 지키는 기업’도 없었다. 일전에 만난 대만의 생산 책임자는 “곧 납품 평가가 있는데, 9개의 거래처 중 3개만 남기고 자를 예정”이라고 말했다. 공급과잉 때문이었다. 그는 “9개 중 수원서 오는 건 6등, 부산 것은 9등이다. 둘 다 잘릴 것이다”라고 대놓고 얘기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에게 이렇게 말하며 사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은 내가 새로 부임한 사장이다. 주특기가 프로세스 혁신이고, 두 번째는 품질 혁신이다. 그러니 품질을 완벽히 하겠다. 개선이 안 됐을 때 잘리면 상관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당신들 손해다. 그러니 시간을 달라.”

때마침 히타치의 대만 공장에서 기술자 한 명이 퇴임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는 브라운관과 모니터의 특성을 맞출 수 있는 전문가였다. 품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만한 적임자도 없다고 판단해 얼른 모셔왔다. 일본인 기술자는 모니터 설계에 직접 참여했고 우리가 가져온 브라운관의 특성과 맞춰 주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이후부터 어느새 “삼성SDI의 브라운관은 가져다가 바로 꽂으면(조립하면) 된다”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7대 기술 과제’를 정해 품질 혁신에 나섰다. 9개의 거래처 중 잘해야 6등이었던 삼성SDI는 혁신 석 달 뒤 13개의 거래처가 22개로 늘렸다. 1997년 11월 27일, 드디어 ‘대만대첩’이 완료되는 순간이었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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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2. 1. 3. 19:17

사람이 곧 혁신이다 31


초창기 브라운관 사업은 역시 TV가 주종을 이뤘다. TV 시장은 성장률은 낮은 편이지만 반대로 매우 안정적인 시장이다. 완성 세트나 부품 업체 모두 묵시적인 균형을 이룬 상태로, 과당경쟁도 없어 이익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구조적으로도 브라운관은 항상 공급 부족 상태였다. 삼성전관(현 삼성SDI) 역시 한 해도 적자를 내지 않으며 삼성그룹 내에서도 최고의 회사로 인정받았다. 

TV는 컨베이어벨트와 조립용 툴만 있으면 조립 공장을 갖출 수 있다. 반면 브라운관은 부품 자체가 굉장히 무겁고 고정밀도를 요구하는 장치산업이다. 아무나 쉽게 투자할 수 있는 산업 분야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항상 수요가 부족했고 웬만한 품질 수준만 확보되면 가격도 부르는 게 값인 상황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모니터 시장은 급속히 팽창하기 시작했다. PC의 등장 덕분이다. PC용 모니터는 TV보다 더 작은 고정세(정밀·세밀) 제품으로 가격도 3배 가까이 비쌌다. 시장도 엄청 빠르게 성장하다 어느 해는 확 고꾸라지는 등 PC 산업의 궤적에 따라 변동이 심했다. 오늘날의 반도체 산업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안정적이었던 TV 시장에 비해 PC용 모니터는 널뛰기 장세로 부를 만큼 변동성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도성장할 것이라는 시장 전망은 브라운관 제조에 너도나도 뛰어들게 만들며 과당경쟁을 유도했다. 모니터용 브라운관 설비 투자 경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가 삼성전관 사장으로 부임한 1995년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그런데 1995년 말이 되니 시장이 얼어붙고, 공급과잉 현상 등 악재가 겹치기 시작했다. 가격도 급락해 거의 절반 수준으로, 어떤 제품은 3분의 1까지 떨어지는 등 엄청난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말았다. 

1995년 삼성전관 사장으로 부임하며 처음 시작한 일은 프로스세스 혁신 등 일련의 혁신 작업이었다. 사진은 삼성SDI가 2004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초슬림 브라운관 `‘빅슬림’`의 생산 라인.


90년대 중반 ‘브라운관’ 시장 악화

삼성전관은 해마다 상여금도 많이 주는 튼튼하고 안정적인 회사였다. 그래서인지 이러한 시장의 격변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위기’라고 말해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필자는 1993년에 삼성전자에서 신경영을 시작한 이후 1994년에는 프로세스를 혁신해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을 도입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와 똑같은 혁신 작업을 삼성전관 사장으로 와서도 추진하기로 마음먹었다. 삼성전관 내부에서도 1995년 하반기부터 팀을 만들어 준비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가서 실제로 보니 그 정도 준비로는 턱도 없었다. “이런 수준으로 가격이 떨어지면 감당할 수 없다. 위기의식을 가지고 생명을 건 돌파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심어줘야 했다. 

모든 조직원들이 위기를 제대로 느끼게 하려면 실질적인 것을 보여줘야 한다. 이를 위해 현재 브라운관·모니터 산업이 취한 현실을 그림과 도표로 그리도록 했다. 그리고 이것을 ‘사면초가’라고 부르며 사업장을 돌기 시작했다. 

당시 위기의 징후를 돌아보면 첫째, 모니터용 브라운관에 너무 많은 투자가 몰려 있었다. 그러나 수요가 줄어들고 경쟁사는 계속 늘어나 공급이 넘쳐날 것이 빤했다. “가격이 계속 떨어질 텐데 그 끝을 모른다. 겨우 몇 %의 이익으론 버티지 못한다”며 위기를 똑바로 인식하게 했다. 

둘째, 그 와중에도 일본의 경쟁사들은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들어 냈다. 우리가 14인치 모니터를 만들면 17·19인치 제품을 만드는 식이다. 정밀도 경쟁에서 더 수준 높은 제품을 만들어 하이엔드 마켓에 내놓았기 때문에 그들의 시장은 경쟁이 없는 블루오션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고정세·대형화 기술로 블루오션에서 이익을 확보하는 것이다. 

또 ‘중화영관’ 같은 대만 기업은 가격 경쟁력이 매우 뛰어났다. 대만은 원래 중소기업들이 강하고 모든 사회 인프라가 저가 구조인 것이 특징이다. 한국에 비해 오버헤드 비용이 절반에 가까울 정도였다. 기술 수준이 비슷하면 가격 경쟁이 안 되고, 일본은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공략하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액정표시장치(LCD) 가격도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LCD는 ‘가격이 너무 비싸 아무나 쓰는 디스플레이가 아니다’는 인상이 강했다. 하지만 원가절감에 들어가면서 시장이 확대될 것이고 언젠가는 브라운과과 LCD가 격전해 시장을 빼앗길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하지만 위기의식은 턱없이 부족했다. 



위기 극복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 사면초가로 표현한 것이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흑자를 내고 안전하다는 인식 때문에 위기의식을 갖기 힘들다. 무작정 “위기다, 어렵다”고 얘기하면 무너지기 십상이다. 직원들에게 절박한 심정으로 몇 가지를 제안했다. 이를 통해서만 생존과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첫째가 ‘PI(Process Innovation)’, 즉 프로세스 혁신이다. 당시 이미 미국은 업무의 95%를 정보 시스템으로 자동화하고 5%만 사람이 직접 했다. 하지만 한국 제일이라던 삼성전자마저도 5%만 자동화였고 나머지를 사람이 했다. 미국과는 정반대였다. 이렇게 해서는 인건비 등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프로세스 혁신이 이뤄지면 적어도 300%의 생산성 향상을 통해 비용을 엄청나게 줄일 수 있었다. 직원들에게는 “생산성을 300% 향상하고 나머지 인원은 새로운 부가가치에 나서자”고 설득했다. 

두 번째는 ‘일본을 잡고 블루오션으로 올라가 보자’는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구소·개발 파트 할 것 없이 똘똘 뭉쳐 하나의 팀이 돼 목숨을 걸고 도전해야 했다. 어차피 대만은 기술을 못 따라온다고 보고 일본 수준만 오르면 된다고 결론 내렸다. 이를 위해 ‘17·19인치 모니터 특공대팀’을 만들었다. 

당시 삼성전관에는 골칫거리가 하나 있었다. 전화기·게임기·시계 등에 쓰이는 소형 디스플레이 사업부로 이를 STN(수동형) LCD라고 불렀다. 브라운관을 대체할 평판 디스플레이를 위해 10년째 사업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돈을 벌기는커녕 해마다 500억 원의 적자를 내는 애물단지였다. 현재 삼성전자에서 생산하는 소형 디스플레이는 AM LCD(능동형)라고 부른다. 원래는 삼성전관에서 STN과 AM을 모두 생산했다. 그런데 AM의 특성이 반도체와 가까운 기술이었기 때문에 사업 조정 차원에서 전자로 이관됐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삼성전관이 고생한 배경이기도 하다. 

또 다른 소형 디스플레이로 형광표시관(VFD)이라는 것이 있다. 자동차나 오디오용으로 많이 쓰이는 초록색 디스플레이다. VFD는 세계적으로도 생산하는 회사가 몇 개 없다. 삼성전관에서는 STN과 VFD를 평판 디스플레이의 주력으로 삼고 키우고 있었지만 모두 자리를 잡지 못해 적자를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1년 내에 두 개를 흑자로 돌리자고 마음먹었다. 앞으로 소형 디스플레이의 시대가 오리란 걸 확신했기 때문이다. 두 사업을 끌어올려 보완하고 식스시그마를 도입해 불량률을 줄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사업 분야가 바로 소형 디스플레이였다. 

일본은 불량률이 몇 %인지 하는 개념으로 품질관리를 했다. 하지만 미국 최고경영자(CEO)는 %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일본은 현장 출신이 많아 불량률 얘기를 하면 바로 인식하지만 미국은 ‘이익에 몇 %의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식으로 ‘돈’으로 돌려 얘기하면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품질 코스트 개념이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30%의 반만 줄이면 15%의 이익이 더 난다는 식이다. 

삼성전관의 품질 코스트는 30%는커녕 40~50% 정도는 개선해야 했다. 우선 PI를 통해 생산성과 품질을 잡아서 올려야 했다. 그런 다음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해 이익을 내고 무엇보다 평판 부문의 적자를 면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삼성전관이 망하더라도 브라운관 기업 중에선 제일 마지막에 망해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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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2. 1. 3. 19:14

사람이 곧 혁신이다 30

삼성전자는 1998년 ‘VIP센터’를 세웠다. VIP는 ‘밸류 이노베이션 프로젝트(Value Innovation Project)’의 영문 첫 글자에서 따왔다. 가치 혁신 프로젝트쯤으로 번역할 수 있다. VIP센터의 설립에는 프랑스의 세계적 경영대학원인 인시아드 비즈니스스쿨 김위찬 교수의 역할이 컸다. 김 교수는 현재 인시아드의 석좌교수다. 

김 교수는 그 유명한 ‘블루오션’ 전략을 제창하고 책으로 펴낸 세계적 석학이다. 김 교수는 1996년에 고국을 방문해 강연회를 열었다. 그때 제시한 이론 중 하나가 ‘밸류 이노베이션(VI)’이다. 요약하면 모든 상품을 고객의 관점, 고객이 인식하는 가치 요소로 분석한 후 어떤 가치에 초점을 맞춰 상품을 개발하고 마케팅할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호텔을 예로 들자면 고객이 원하는 가치 가운데 ‘조용하고, 값이 싸고, 음식이 맛있고, 잠자리가 포근하다’ 같은 여러 요소가 있을 것이다. 그중 경쟁사들이 어떤 고객의 가치를 중요시하는지를 분석해 보면 그 속에서 자신만의 체계적인 가치 기준을 만들 수 있다는 이론이다.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VIP센터였다. 

이후부터 삼성전자는 제품을 개발할 때 VIP팀 전체가 참여해 VI 전략을 집중적으로 수립하고 진행했다. 그룹에서는 이들이 원하는 모든 장소와 컨설팅을 제공했다. 팀원은 각계의 전문가들로 이뤄졌다. 원가를 혁신하는 밸류 엔지니어링(VE) 전문가도 있었고 트리즈·품질·식스시그마·VI 등 다양한 분야의 프로페셔널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았다. 이들의 도움으로 신제품 프로젝트팀이 결사대처럼 움직였다. VIP센터는 그때부터 ‘삼성전자 이익의 절반을 창출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 교수의 영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페어 프로세스(Fair Process)’ 역시 그의 지도하에 진행된 대표적인 혁신 작업이다. 

페어 프로세스는 말 그대로 프로세스 자체가 공정(페어)하다는 뜻이다. 즉 의사소통의 공정함을 말한다. 페어 프로세스에 관한 좋은 예가 하나 있다. 한 전자 회사가 있다. 이 회사는 부산에 공장이 하나 있고 수원에도 하나가 있었다. 양쪽 공장 모두 노조가 있는데 수원 공장의 노조는 아주 온건한 편이다. 이들은 회사 정책에도 우호적으로 협력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1969년 삼성전자 수원 단지의 초기 모습. 이병철 회장은 제휴사인 일본의 산요보다 훨씬 큰 대단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삼성 이익 ‘절반’ 창출하는 VIP센터

반대로 부산 사업장은 강성 노조로 유명했다. 사측에서 뭘 하려면 항상 반대와 트집이 이어진다. 회사 측에선 자연스럽게 ‘부산은 골머리, 수원은 좋은 곳’이란 인식이 자리 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셀 방식’이라는 새로운 공장 관리 방식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컨베이어에서 각자 분업으로 일하는 기존 방식을 혁신하자는 얘기다. 컨베이어 방식은 단순한 일을 반복하기 때문에 피곤함을 빨리 느끼고 자존감도 떨어지는 등 불만이 많았다. 또 열심히 일해도 다른 사람 때문에 성과를 인정받지 못하는 구조적 불합리함도 있었다. 

반면 셀 방식은 소수의 인원이 활동하며 생산성을 높이는 기법이다. 경영진은 새로운 방식에 대해 부산 사람들이 또 반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부산 공장 직원들에게는 사전에 의견을 묻고 설명회나 토론회를 거쳐 잘 설득하기로 결정했다. 

반면 수원 공장은 바로 준비해 시작해도 된다고 판단했다. 이후 수원 공장에는 어느 날부터인가 까만 양복에 넥타이를 맨 사람들이 무언가를 측정하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 셀 방식 도입을 위한 컨설팅 업체의 직원들이었다. 못 보던 사람들이 회사 안을 돌아다니자 직원들 사이에선 구조조정이나 어려운 작업 명령 같은 흉흉한 소문들이 돌기 시작했다. 급기야 ‘수원 공장에만 불이익을 주려고 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지금까지 어디보다 평화롭던 사업장에는 급기야 ‘결사 반대’ 현수막이 붙기 시작했고, 곧 노사분규로까지 이어졌다. 원인은 단 하나, 커뮤니케이션의 부재였다. 

수원과 달리 부산은 처음부터 설명과 토론, 의견을 듣고 반영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자 경영진의 예상과 반대로 모든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는 게 아닌가. 반대로 수원 공장은 그때부터 새로운 혁신 방법을 도입하기까지 몇 년 동안 고생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페어 프로세스의 차이다. 기업 조직은 어떠한 경우에도 이런 과정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삼성전자도 이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채널·조직을 만드는 데 굉장한 노력을 기울였다. 



삼성전관 최고경영자(CEO)가 되다

1970년대 말에 열린 품질 대상 시상식이 생각난다. 심사위원인 아주대 교수 한 분이 “금성(LG)은 20년 이상 됐고 삼성은 10년 된 기업이다. 공장을 죽 돌아보니 삼성공장 벽에는 ‘세계 일류가 되자’는 말이 붙어 있더라. 반면 금성은 한국 1등이란 소리도 없었다. 목표도 단계가 있는 것이다. 우선 한국 1등부터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얘기했다. 십수 년이 지나 1990년대 중반에 그분을 다시 만났다. 필자를 보자마자 이런 말을 들려줬다. 

“내가 그때 말을 잘못했다. 안식년이 돼서 미국에서 1년간 공부했다. 그때 배운 것 중 하나가 ‘목표를 써 놓고 항상 외우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것이다. 비주얼라이제이션, 즉 목표의 가시화다. 목표를 세워놓고 끊임없이 되뇌면 반드시 이뤄진다고 한다. 그때 생각난 게 삼성전자였다. 형편없는 공장에서 세계 1등을 외쳤던 삼성전자는 지금 실제로 세계 1등이 되었다.”

1995년 12월 삼성전관(현 삼성SDI) 대표이사로 발령이 났다. 1975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이후 20여 년 만에 비로소 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된 것이다. 삼성전관은 삼성전자가 설립된 이듬해인 1970년에 만들어진 삼성 계열사 중 가장 오래된 회사 중 하나다. 

이병철 회장의 꿈은 전 세계 TV 산업에서 1등에 오르는 것이었다. TV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전자 산업의 꽃’으로 불린다. TV에서 1등을 하면 세계 전자 산업에서 1등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1등이 되기 위해선 1등 기업을 직접 보고 배워야 한다. 

삼성전자는 설립 초기 일본의 도쿄산요(산요의 전신)와 제휴 관계를 돈독히 맺었다. 당시에는 마쓰시타가 일본 최고의 기업이었는데, 마쓰시타는 이미 아남과 제휴를 맺고 있었다. 도시바는 대한전선, 히타치도 금성사와 제휴를 맺었다. 삼성으로선 제휴를 맺고 선진 기술을 도입할 수 있는 곳이 산요밖에 없었던 셈이다. 

전자 산업 시찰을 위해 도쿄산요 공장을 둘러본 적이 있는데, 비행장 격납고를 공장으로 개조해 부지 면적이 132만2000~ 165만2500㎡(40만~50만 평)에 달했다. 모든 작업과 공정이 그 안에서 이뤄지는 복합 센터 같은 대단지였다. 당시 일본의 기업들은 대부분 작은 공장을 전국에 산재한 형태로 운영했다. 도쿄산요만 그렇게 대단지를 꾸며 놓고 있었다. 

이병철 회장은 “산요보다 더 크게 만들자”는 결정을 내렸고 이렇게 해서 수원 단지가 만들어지게 됐다. 오늘날 삼성전자 단지 부지는 165만2500㎡ 규모다. 삼성전기·삼성코닝·삼성전관이 빙 둘러 있는 대단지다. 오늘날 융·복합을 강조하는데, 이 회장은 이미 그때 ‘지리적으로 가까워야 융·복합이 자연히 이뤄진다’는 개념을 그리고 있었다. 이 회장은 이를 “얼굴을 마주 보고 힘을 합쳐야 한다”는 말로 표현하곤 했다. 

당시 대한민국의 어느 누구도 이런 대단지를 생각한 사람이 없었다. 1등 TV가 목표였던 이 회장은 TV의 가장 중요한 부품인 브라운관 공장을 세웠고 진공관으로 유명했던 일본의 NEC와 합작해 ‘삼성NEC’를 출범시켰다. 

브라운관을 잘 만들기 위한 부품으로 유리의 중요성이 부각돼 미국의 코닝과 합작한 ‘삼성코닝’도 설립됐다. 이후 1973년에 삼성전기가 세워지면서 튜너·콘덴서·변압기 등의 전기 부품과 유리·브라운관을 거쳐 세트까지 완성되는 수직 계열화가 비로소 이뤄졌다. TV 1등이라는 당시의 목표는 지금 현실이 됐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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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1. 12. 27. 15:17

사람이 곧 혁신이다 29


1994년 들어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 내 모니터 사업의 통합을 지시했다. 당시 필자가 삼성전자 기획실로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역시 기본 개념은 복합화였다. 계열사 간 중복되고 불필요한 경쟁 구도를 없애 통합하는 작업이었다. 모니터 사업의 통합은 그룹 내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통합 작업이었다. 

삼성에서 모니터 사업을 가장 먼저 시작한 곳은 삼성전관(현 삼성SDI)이다. 삼성전자는 그 이후였는데 전자에선 TV용 브라운관만 제작했다. 물론 완제품인 세트로서는 TV가 중요한 분야였지만 부품의 부가가치로만 보면 모니터용 브라운관의 가치가 훨씬 컸다. 삼성전관은 모니터 사업에 대한 이해가 뛰어났고 이미 자체적으로 개발팀과 생산팀이 조직돼 있었다. 

삼성전자는 후발 주자로 뛰어들었지만 자신들이 세트 기업이니 우리도 하는 것이 맞다며 모니터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전부터 사업을 진행해 온 삼성전관의 경쟁력이 훨씬 뛰어난 건 당연했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니 삼성전자의 모니터 사업도 궤도에 오르면서 양 사가 시장에서 부딪치는 수준에 이르고 말았다. 모니터 사업부 통합에 나서게 된 배경이다. 

통합은 물리적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당시는 이미 이 회장의 신경영을 통해 모든 조직원들이 변화를 수용하도록 교육이 돼 있었다. 이런 베이스가 있었기에 통합 작업이 가능했다고 본다. 68일간 이어진 선진 일류 산업 현장 시찰이 없었다면 ‘도토리 키 재기’식으로 각자 잘한다고 얘기했을 게 빤하다. 그런 식의 경영과 성과는 의미가 없다. 회사 임원진과 직원들 사이에서도 ‘최고의 모니터를 만드는 게 의미 있는 것 아니겠느냐’는 공감대가 생겼다. 삼성이 월드 베스트 상품을 내놓기 시작한 배경이다. 


삼성은 1994년 시작된 모니터 사업 통합을 기점으로 ‘월드 베스트’ 상품 전략을 세웠다. 사진은 2005년 국내 업체 최초로 미국 ‘컨슈머 리포트’에서 최우수 제품으로 선정됐던 삼성전자의 LCD 모니터.


세계 최고의 모니터를 만들라

세계 일류 모니터는 도대체 어떤 제품일까. 이를 위해 소니의 모니터 라인에 견학을 간 적이 있다. 전원이 들어가자 화면에 똑같은 패턴의 영상들이 뜨며 지나갔다. 그런데 어떤 모니터나 영상의 질이 똑같았다. 화면의 밝기만 봐선 늘어서 있는 모니터들이 마치 하나의 제품 같았다. 그때만 해도 삼성의 모니터는 어떤 것은 밝고 흐리고 해서 한 대도 같은 게 없을 정도로 품질이 균일하지 못했다. 품질 검사 수준으로는 합격이지만 모든 제품이 균일한 퀄리티를 확보하지 못한 수준이었다. 

소니는 처음 설계 때부터 모든 과정을 균일하게 맞췄기 때문에 마지막 완성품에 이르기까지 균일한 품질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품질관리라는 건 바로 저런 것이다.’ 현장을 둘러본 난 큰 충격과 함께 머릿속에 ‘소니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당시 우리는 품질은 물론 마케팅 등도 서로 잘났다고 싸우기에만 바빴다. 그 뒤 식스시그마도 도입했다. ‘100만 개 중에 3.4개 불량’ 수준이 식스시그마의 요체다. 삼성전관 사장으로 가며 첫해 시작한 게 프로세스 혁신과 식스시그마였다. 

이 회장이 VTR 부품을 만드는 일본의 일류 공장을 직접 찾은 적이 있다. 공장에는 부품의 길이를 측정하는 미크론 단위의 자동 측정 기계가 있었다. 0~100미크론까지 눈금이 있었는데 한국에선 항상 90~95미크론 사이에 있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10미크론 사이에서 바늘이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닌가. “규격이 100인데, 왜 굳이 10에서 왔다 갔다 하느냐”고 물었다. 

“이렇게 엄격하게 유지해도 어쩌다 보면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이게 바로 불량이다. 불량품은 어쩌다 하나가 나올지 모르지만 이를 받아든 소비자는 모든 제품이 불량이라고 생각한다. 100이 규격이라고 하더라도 10분의 1, 20분의 1에 도전하면 그런 불량이 나오지 않을 것 아닌가.”

그러고 보니 한국은 항상 한계치에 맞춰 놓고 있었다. 자연히 불량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작업 보증을 통해 스피드·품질·원가를 모두 절감했다. 이를 보고 이 회장은 일본에서 전화를 걸어 한국에 있던 관계 임원, 사장단을 모두 불러냈다. 그 덕분에 필자도 따라가 공장을 보게 된 것이다. 규격의 한계에만 맞으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과 100만 개 중애 1개도 벗어나선 안 된다는 극한의 생각과는 결과에 엄청난 차이가 존재했다. 

세계적 휴대전화 제조사인 노키아의 한국 공장이 마산에 있었다. 세계의 여러 공장 중 이곳은 최고의 품질, 생산성, 원가 경쟁력을 자랑하는 공장이었다. 그곳에도 직접 찾아가 현장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에서 2000명이 일하고 있으면 여기에선 500명이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해답은 ‘서브어셈블리(subassembly: 기계·전자 기기 등의 하위 부품이나 조립)’에 있었다.

제품 생산에 필요한 부품을 예비 단계에서 미리 조립해 납품받는 방식이다. 노키아 한국 공장은 이를 위해 작은 외주 업체들을 발굴했다. 이들이 저마다 가져온 부품을 맨 마지막에 조립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품질이 균일하지 않은 어려움이 생기지 않느냐”고 물었다. 당연했다. 이곳에선 이를 막기 위해 품질을 생명처럼 여기고 이상이 발견되면 즉각 퇴출시키는 등 아주 엄격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최종 조립 라인에 서있는 사람들이 편한 마음으로 조립해도 불량이 나지 않을 정도로 서브어셈블리의 수준이 높았다.

설비도 계획 보전이 돼 있었다. 고장이 나기 전에 미리미리 관리하고 수리하는 것을 뜻한다. 모든 기계의 치수를 끊임없이 보정해 맞춰 놓는 식이다. 완전한 품질의 부품을 완전한 설비 하에서 조립하니 최고의 세트가 완성됐다. 



디자인은 기업 이미지·전략의 복합체

라인을 멀찍이 떨어져서 보면 여직원들이 굉장히 쉽고 느슨하게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불량이 없었다. 삼성의 생산 라인을 보면 모두가 초긴장된 상태에서 생산하고 조정하느라 애를 쓰곤 했다. 그런데도 불량이 많았다. 처음부터 올바르게 한다는 게 이렇게 중요하다. 여기에 ‘규격에 맞춘다’는 수준을 뛰어넘어 ‘한 치라도 어긋나선 안 된다’는 엄격함을 스스로 갖춰야 노키아코리아나 소니를 따라잡을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브라운관의 성공 이후로도 삼성은 ‘월드 베스트’ 상품을 몇 개 더 만들겠다는 목표를 계속 세워갔다. ‘양에서 질’이라는 신경영의 철학적 목표가 구체화된 것이 월드 베스트 상품이다. 쉽게 말해 최고를 만들고 제값을 받자는 뜻이다. 

디자인 부문의 고문을 맡았던 후쿠다 고문이 있었다. 1992년 삼성이 도쿄에 디자인 분소를 설립하면서 모셔온 분이다. 이분이 낸 보고서 하나가 지금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삼성전자에는 상품 기획 전략이 없다. 디자인은 상품 전략을 구현하는 것인데, 전략이 없으니 디자인하는 사람이 따라갈 수가 없다. 또 관계된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니 어떻게 바람직한 모습의 디자인이 나오겠는가. 디자인이란 것은 그 회사의 이미지와 전략이 종합적으로 표현되는 복합체와 같은 것이다. 삼성은 디자인을 하나의 단순한 기능으로만 본다. 중구난방하다 보니 사기도 떨어진다. 이래선 삼성의 미래도 어둡다.”

이건희 회장은 후쿠다 고문의 보고서를 ‘디자인 일류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의견으로 받아들였다. 디자인에서도 일류, 품질도 일류, 점유율도 일류…. 그 결과로 나와야 할 것이 바로 월드 베스트 상품이었다. 반도체를 비롯해 디스플레이가 맨 앞에 서 있었다. 삼성의 오늘을 만든 여러 요인 중 눈에 가장 잘 띄는 것이 ‘월드 베스트’ 시리즈다.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게 위해 밤낮없이 노력했다. 연구·개발, 디자인, 마케팅 그 어느 하나 가릴 것 없이 모두 뛰어들어 만들어낸 결과물이 월드 베스트 상품이다. 이후 삼성은 거의 모든 전자 부문에서 세계 1등이 됐다.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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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革新2011. 12. 8. 15:04

사람이 곧 혁신이다 28


삼성전자 전략기획실에서 추진했던 프로젝트 중 하나가 ‘복합 단지’ 개발이다.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을 추진하면서 ‘복합화’라는 화두를 던졌다.

“앞으로는 복합화의 시대다. 여러 곳으로 분산돼 있는 요소를 한 지역에 모아 시너지를 창출하도록 복합 단지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때마침 당시는 중국 진출의 큰 그림을 그릴 때였다. 역시 기본 발상은 복합화였다. 어떻게 하면 융합과 시너지 실현을 위해 좋은 환경을 만들어 낼수 있을까. 수원의 삼성전자 단지는 165만2500㎡(50만 평) 규모인데, 이 회장은 여기에 종합연구소를 만들고 싶어 했다. 연구원이 1만, 2만 명씩 늘다 보니 여기저기 분산되기 시작했고 늘어나는 연구 인력 수요를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팽창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의 성공 원동력 중 하나가 바로 이 종합연구소다. LG는 지금도 분야별로 분산돼 있다. 삼성은 초기 10여 년 동안 모든 연구·개발 파트를 수원으로 통합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전자를 중심으로 코닝·전기 등이 이 안에 다 들어왔다. 서로 돕고 협력하고 회의할 일이 있으면 단 몇 분 만에 다 모이는 게 가능했다. 연구원들과 엔지니어들이 언제든지 모여 교류 협력할 수 있었다. 시간만 단축한 게 아니다. 교류 활성화를 통해 융·복합을 효율적으로 달성한 모델이 바로 수원 단지였다.

연구·개발(R&D) 건물 하나를 크게 지어 모든 부문을 통합하자는 게 이 회장의 구상이었다. 어떤 부문이든 5분 내에 교류가 가능하면 엄청난 시너지가 나올 것이란 계산에서였다. 그런데 인근 오산 비행장의 고도 제한 때문에 27층 이상 되는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 현재 수원에 가보면 27층 규모의 R&D 건물 4개동이 나란히 있는 걸 볼 수 있다. 하나의 단지 안에 R&D 연구소가 긴밀하게 배치돼 있는 기업은 지금도 찾아보기 어렵다. 삼성의 저력 가운데 하나다.



복합 단지 개발로 시너지 극대화

수원에서의 성공으로 해외의 산업단지 건설도 복합화가 기본 전략이 됐다. 현지 교섭력, 기업 간 교류 협력을 통한 관리 효율·시너지 창출이 복합화의 기본 개념이다. 이에 따라 영국의 윈야드, 미국의 티후아나(멕시코), 말레이시아의 세렘반, 브라질의 마나우스 단지 등 지역별로 커다란 하나의 거점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반면 중국은 엄청나게 넓은 땅덩어리로 수십 개 나라가 모인 것과 같은 셈이어서 하나의 단지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이 섰다. 결국 여러 지역에 분산 배치하는 방법을 찾자고 결론을 내린 후 5개 권역으로 나눴다. 둥베이삼성(東北三省), 베이징·톈진, 상하이·쑤저우, 광둥성, 서안 중심의 내륙 등이다. 5개 권역 중 아직까지 삼성이 진출하지 않은 곳이 두 곳 있다.

바로 둥베이삼성과 서안 내륙이다. 둥베이삼성에는 예전부터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진출해 있었다. 삼성은 이곳에 단지가 들어서면 여기서 생산한 제품이 북한으로 수출되는 거점으로 변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언젠가는 북한, 특히 평양 근교에 삼성전자 복합 단지가 들어가고, 이를 계기로 북한 경제를 살리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그 시점에 둥베이삼성 단지를 세우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다. 후일 상황을 봐가면서 진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지역에는 삼성이 없다. 서안 내륙은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상권이 형성돼 있지 않다. 당연히 그때도 계획을 미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글로벌 복합 단지 플랜을 짜고 건설을 시작했다. 모든 마스터플랜은 전략기획실이 주도적으로 해나갔다. 당시만 해도 복합 단지는 굉장히 신선한 전략이었다. 일례로 일본 산업계는 분산 배치가 정설처럼 굳어져 있던 때다.

이 회장은 산업단지뿐만 아니라 기술 개발에도 시너지 창출을 강조했다. 1996년 선보인 ‘명품 플러스원’ TV가 대표적이다. 그전까지 생산된 TV는 모두 브라운관의 비율이 4 대 3이었다. 방송 화면에 카메라로 촬영한 화면이 다 나오지 않고 일부 잘린 부분이 있는 것도 바로 이 비율 때문이었다. TV 규격상 1인치가 숨겨져 안 보이는 것이다.



세상에 없는 제품을 내놓다

이 회장은 “100% 다 보여주는 화면을 만들어야지, 왜 4 대 3이라는 규격에 얽매이나. 이것을 바로잡아라”고 지시했다. 전 세계 그 어느 누구도 4 대 3을 스탠더드 규격으로 당연시하던 때에 생각의 틀을 깬 것이다. 방송국에서 송출할 때의 화면 비율은 12.8 대 9였다. 방송 장비를 전혀 손댈 필요 없이 TV만 바꾸면 숨겨진 1인치를 다시 볼 수 있다는 말이었지만 현장 기술자들은 100% 반대했다.

이 회장은 생각의 틀을 깨고 싶어 했다. 하지만 커진 비율을 맞추려면 삼성전자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12.8 대 9라는 전혀 새로운 규격에 맞춰 코닝이 새로운 유리를 만들어야 했고 이에 따라 삼성전관(SDI)이 새로운 브라운관을 만드는 건 당연했다. 여기에 모든 관계사가 모여 프로세스를 정하고 비용을 분담해 성과를 창출해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하지만 기술 복합화를 통해 결국 제품 생산에 성공했다. ‘명품 플러스원’ TV는 이후 삼성의 TV가 세계적인 기술력으로 명품 대접을 받기 시작하는 첫걸음이 됐다. 세계적인 일류 제품보다 20% 싼 데서 출발했던 삼성전자 TV는 이 제품을 통해 96%까지 가격을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존경받고 위대한 기업이 되는 길은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세상에 없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면 된다. 남의 것을 모방하면 ‘잘했다’고 칭찬을 받을 수 있지만 ‘존경’은 받지 못한다. 기술계에선 이를 ‘도미넌트(dominant: ‘우세한, 지배적인’이란 뜻) 디자인’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흑백 TV에서 컬러 TV로 바뀐 게 도미넌트 디자인이다. 요즘 삼성과 LG가 ‘3D TV’ 전쟁에 나선 것도 언젠가는 3D TV만 살아남는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3D TV가 도미넌트 디자인이 되는 것이다. 이 회장이 주도해 탄생한 ‘명품 플러스원’ TV의 성공은 삼성전자 기술인들의 마음속에도 깊은 자긍심과 자신감을 안겨줬다. 바로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삼성전자는 1996년 ‘엠페러(emperor)’라는 전문가용 스피커도 개발했다. 당시 이 오디오 시스템 가격은 2000만 원에 달하는 초고가였다. 이 회장은 오디오와 소리에도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TV의 음질도 명품 오디오의 소리를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회장은 이를 위해 일본의 럭스(LUX)라는 회사를 인수했다. 명품 오디오 시스템을 만들던 기업이다. 이 회장은 이후에도 한국 최고의 오디오 전문가들을 모아 사업팀을 만드는 등 정성을 기울였다. 오늘날 삼성 TV의 음질이 세계 최고를 유지하는 밑바탕이다.

엠페러 역시 한국에선 누구도 시도하지 않는 세계 최고 품질에 도전해 성공한 사례 중 하나다. 삼성전자뿐만이 아니다. 1991년 제일모직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1PP’ 명품 복지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1PP는 수입 원단과 또 다른 차원의 최고급 복지를 말한다. 어떤 원단보다 감촉이 좋은 극세사 옷감이다. ‘명품 플러스원’ TV나 ‘엠페러’ 오디오 시스템, ‘1PP’ 복지 등은 모두 세계에서 제일가는 품질의 제품들이다. 바로 ‘월드 베스트’라는 모델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훗날 삼성SDI 사장으로 갈 때의 얘기다. 이 회장은 내게 단 하나의 조건을 걸었다. 이미 당시 세계 최대 브라운관 생산 기업이었던 SDI를 기술로도 1등을 만들어 달라는 얘기였다. 판매는 SDI가 1등이었지만 기술력 1등은 일본의 소니였다. 소니는 트리니트론이라는 독창적 컬러 브라운관을 만들어 세계를 제패했다. 일반 브라운관보다 20~30% 비싸면서도 독보적 위치를 차지한 제품이었다. 어찌 보면 당시의 소니는 지금의 애플 같은 기업이었다.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정리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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